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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와 구> : 때로는 대답보다 질문에 머무는 시간 자체가 위로가 되기도 한다

<리와 구>/남유진/카카오웹툰

2022-12-10 최윤주

<리와 구> : 때로는 대답보다 질문에 머무는 시간 자체가 위로가 되기도 한다

[출처] 카카오웹툰/리와 구/남유진

 

영영 들을 수 없는 대답, 끝내 번복할 수 없는 선택, 메울 수 없는 상실과 실수. 겨울에 나는 자꾸만 이런 것들 앞에서 멈춰 선다. 밝고 따뜻한 곳을 향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믿음 앞에서 오히려 움츠러들고 말 때가 있다. 그러는 와중에 놓치고 잃어버리는 것이 있을 거라는 생각에 두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출처] 카카오웹툰/리와 구/남유진

 

이야기는 작은 미신에서 출발한다. 대답을 듣고 싶은 누군가에게 질문하듯 종이에 궁금한 점을 적고, 그 사람의 머리카락을 올려 놓고 접은 뒤 베개 밑에 두고 자면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 있다. 이웃이자 같은 학교 친구인 민구를 오랫동안 좋아한 세리는 미신의 힘에 빌어서라도 그의 마음을 알고 싶다.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해 민구의 머리카락을 얻은 날 밤, 민구가 아파트에서 뛰어내린다. 세리는 염원하던 대로 미신의 힘을 빌려 꿈속을 헤맨다. 자기 고백에 대한 대답 대신에, 민구가 대체 무엇 때문에 죽으려 했는지 그 이유를 찾아서.

꿈속에서 세리는 민구가 된다. 몸과 기억은 세리 그대로지만, 가족과 친구 관계, 주변 환경 모두가 민구의 것과 뒤바뀐다. 세리의 부모님은 민구의 부모님이 되고 부모님 없이 고모와 함께 살던 민구의 사정은 세리의 것이 된다. 몸이 바뀌는 빙의가 아니라, 몸을 제외한 모든 것이 바뀌는 운명의 교환인 셈이다.

[출처] 카카오웹툰/리와 구/남유진

 

처지가 뒤바뀌니 민구의 모든 사정을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간편한 전개 같은 것은 이 작품엔 존재하지 않아서, 세리는 뛰어내리기 전 한 달 동안 민구에게 무슨 일이 있던 것인지 하나하나 직접 겪으며 깨달아 간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을 만큼 괴로운 가정사, 그로 인해 따돌림 당했던 경험, 그것을 빌미삼아 협박하는 동급생. 쾌활한 만큼 경솔한 성격의 세리는 심지어 자기중심적이기까지 해서 민구에게 이런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민구의 사연을 알게 되는 때조차 매번 이쯤이면 전부 알아낸 것이라 안일하게 생각해버린다.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선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알아내야만 하는데, 안일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세리는 민구가 뛰어내린 날이 다가올 때까지도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다. 대신에 민구가 겪었을 절망적인 상황들을 더디게 통과하면서야 타인의 가장 깊은 곳을 함부로 들출 수 있다 믿었던 자신의 오만함을 반성한다. 민구를 상처 입힐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던 자기의 무신경함에 괴로워하며 이제는 자신의 방이 된 민구의 방에서 울기도 한다. 끝까지 민구가 뛰어내린 이유를 알 수 없게 된다면 자신 역시 민구처럼 창밖으로 뛰어내릴 결심까지 한다.

아주 이상한 말이지만, 만화가 그려 내는 어떤 화해나 회복보다도 세리의 그 천천히 무너져 내리는 마음을 지켜보는 일이 좋았다. 타인의 상처를 헤아릴 줄도 모르고 세상에는 자기 경험 밖의 어둠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도 못 하던 이가 불가해 속에서 침잠하는 과정이 이상하게 위로가 되었다. 세계의 비밀을 전부 알고 있다는 착각이 깨어지는 순간이 보여준 냉혹하지만 정직한 직면이 좋았다. 민구를 이해하기 위해 뛰어내리겠다고 결심하는 모습에서는, 폐허가 된 마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마침내 스스로 폐허가 되겠다고 말하는 결연한 의지가 읽히기도 했다.

세리가 겪은 그 모든 일들은 현실의 민구가 누구의 이해도 없이 숨죽인 채 견뎠을 시간이다. 아무도 없는 속에서 홀로 얼어붙고 부르텄을, 터무니없이 혼자였을 그 몸과 마음을 누군가 온 힘을 다해 대신 들여다보려 했다는 사실. 그 사실만으로 전해지는 위로가 있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있을 몰이해 속에서 외롭게 얼어갔던 지난 시절에 대한 위로인 동시에, 누군가를 그렇게 얼어붙게 했을 어느 날들의 내 부끄러움에 대한 당부가 되어주기도 한다. 설령 그 노력이 한발 늦은 것이라 할지라 해도 말이다. 이상하고 지독한 것들이 차라리 위안이 되는 때가 있다. 내게는 춥고 어두운 계절을 날 힘이다.

필진이미지

최윤주

만화평론가
2021 대한민국 만화평론공모전 대상
2019 만화평론공모전 신인부문 대상, 2020 만화평론공모전 기성부문 가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