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합격인간> : 공포를 버리고 메이저로 올라온 ‘엠생도살기’
[출처] 카카오웹툰/불합격인가/Sepia
sepia 작가가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2016년 무렵이었다. 2016년 sepia 작가는 디시인사이드의 카툰-연재 갤러리(이하 ‘카연갤’)에 <고3과 모의고사 이야기>부터 <반수와 마지막 이야기>까지 총 4화에 걸친 만화를 업로드한다. 입시에 실패한 주인공 @@이 어머니의 용돈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며 반수를 한다. 그러나 @@은 근거 없이 자신을 과신하며 노력하지 않는다. 그 결과 @@의 어머니는 과로로 인해 사망하고, 어떠한 생활력도 길러놓지 못했던 @@은 죄책감과 경제적 위기를 면치 못하고 자살한다.
‘반수새끼’라고도 불리는 이 만화를 통해 sepia 작가는 ‘엠생도살자’라는 별명을 얻으며 카연갤에서 주목받는 유저로 떠오른다. 이후 sepia는 <희망대학교>, <9급 공무원> 등 ‘자신을 과신하고 노력하지 않아 인생을 망치는 주인공 @@(%% 등)’을 내세운 만화들을 통해 ‘엠생도살자’라는 별명을 얻으며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불합격인간> 역시 sepia 작가의 전형적인 ‘@@서사’를 따르고 있다. 주인공은 여전히 자신을 과신하여 노력하지 않고 있고, 이 때문에 고난을 겪는다.
서사의 전형성에도 불구하고 5년이 넘는 시간 동안 sepia 작가가 만화계에 공헌한 성과가 있다면, <모정 돼지>부터 이어진(다고 추정되는) ‘엠생도살기’라는 하위 장르를 메이저의 수면 위로 올렸다는 것이다. ‘엠생도살기’의 주인공들은 이저리도 저러지도 못했다는 변명을 하지만 사실상 이도 저도 아닌 도피에 실패한 인물들이다. 그 실패는 늘 파국으로 이어진다. 파국에는 심리적인 리얼리티가 녹아있지만, 냉정하게 놓고 보면 만화적인 과장에 가깝다.
하지만 주목받는 장르가 그렇듯, 어떤 리얼리티를 품고 있느냐에 따라 대중적인 호소력이 달라진다. sepia 작가가 메이저로 올려놓은 ‘엠생도살기’는 한국의 과경쟁 사회에서 도태되면 벌어지는 계급추락에 대한 공포심을 바탕에 두고 있다. sepia 작가의 ‘엠생도살기’는 그 공포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만화로써, 휴먼 드라마보다는 사회성 공포에 가까운 서사적 관습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보다 흥미로운 것은 sepia 작가의 ‘엠생도살기’가 카연갤을 벗어나 메이저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변화다. sepia의 만화는 2017년 <마지막 일주일>을 통해 각성하는 주인공을 그린다. 이전처럼 이도 저도 아닌 도피를 벌이다 부모님의 도시락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게 된 주인공은 각고의 노력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대학교에 합격한다. 이는 <마지막 일주일> 직후 작품인 <20대의 끝에서>에서도 거의 동일하게 사용된다. sepia 작가는 희망적인 엔딩을 그린 두 작품을 그리고 나서야 카카오에서 정식연재의 기회를 얻게 된다.
재미있는 사실은 2020년 연재한 sepia 작가의 메이저 데뷔작 <공부하는 고양이>는 sepia 작가의 시그니처였던 ‘엠생도살기’ 장르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고양이를 통해 자신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각성하여 번듯한 인간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는 ‘엠생도살기’가 가지고 있던 사회적인 공포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서사에 가까웠다. 도리어 <공부하는 고양이>는 인생의 밑바닥을 찍었던 주인공이 반려동물이 가디언이 된다는 판타지를 적극적으로 충족시켜주는 동화에 가까운 작품이었다.
[출처] 카카오웹툰/불합격인가/Sepia
<공부하는 고양이> 이후 2021년 카카오웹툰에서 연재한 <불합격인간>은 전작보다 ‘엠생도살기’에 가까워졌으며 특유의 사회적 공포 역시 담고 있으나, 여기서도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공포보다 주인공 &&이 무너진 일상의 균형을 잡고 본인의 역할을 찾아 나가는 성장기에 가깝다. 2016년에서 2021년까지 sepia 작가가 카연갤이라는 ‘언더그라운드’를 벗어나 양대 플랫폼으로 입성하며 보여준 변화는 명확하다. sepia 작가는 공포와 파국의 인과를 꺾고, 좌절과 성장의 판타지를 그 자리에 앉혔다.
이 변화가 가치 있고 세련된 변화인지는 확언할 수 없다. 그러나 시장의 선택이 한편으로는 검열의 기능을 수행한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우리 사회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단면이지 않을까 하는 의문은 분명 숙고 필요한 고민일 것이다. sepia 작가가 <불합격인간>의 연재를 끝내고 1년 뒤, 우리는 판타지에 가까운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만났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재벌집 막내아들>이 회귀를 통해 자본주의의 화신이 되어 사적 복수를 이룩하고 있는 광경에 열광하고 있다. 그 판타지의 언저리에는 ‘엠생도살’의 공포가 서려 있지는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