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다잉> : 아프고 병들어야 온전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출처] 네이버웹툰/언다잉/임목원
여기 아프고 병들어야 온전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독자들은 대체 무슨 말을 하느냐고 반문하겠지만 이 말은 틀린 말이 아니다. 말이 안 되는 상황이지만 지금 소개하고자 하는 웹툰에서는 말이 된다. 아니다. 말이 된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무조건 그렇게 되어야만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 적어도 임목원의 웹툰 <언다잉>(2022년 10월~현재)에서는 이러한 역설적인 상황이 통한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대체 어떤 세계관을 품고 있기에 이와 같은 역설적인 상황이 성립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우리는 인간의 수많은 감정 중 ‘수치심’에 대해 잠시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스피노자는 이 감정을 ‘부끄러움’과 비슷한 감정으로 보았다. 하지만 정확히 따지자면 ‘부끄러움’과는 차이가 있다. 부끄러움은 “부끄럽게 생각하는 행위에 뒤따르는 슬픔”인 반면, 수치심은 “불명예스러운 어떤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부끄러움에 대한 두려움 또는 겁냄”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방점은 ‘불명예스러운 어떤 일’이다. 그만큼 수치심은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상처받거나 외면 받을 것을 각오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임목원의 웹툰 <언다잉>은 후자의 감정에 대해 다룬다는 점이다. 그래서 불명예스러운 것을 해야만 하는 입장과 태도가 강하게 관철된다. 각각의 인물들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불편한 이 감정을 받아들이고 버틴다. 그렇다면 다시 질문해 보자. 구체적으로 <언다잉>의 세계관은 무엇인가. 도대체 어떤 세계관을 품고 있기에 이런 감정에 대해 질문하는가.
[출처] 네이버웹툰/언다잉/임목원
<언다잉>의 세계관은 1화에서 언급된 이 대화에 응축되어 있다. 이 웹툰은 전국의 수많은 노인들의 병이 갑자기 낫게 되는 그 순간의 표정을 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아픈 몸이 이제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되었으니 너무나 감사하고 기쁘다. 하지만 이 웹툰의 인물들은 이러한 불가사의한 일을 반기지 못한다. 기적 같은 일이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마냥 기뻐하지 못한다. 독자들께서도 생각해 보시길 바란다. 자신이 사랑하는 부모님이 어느 순간 갑자기 아프지 않게 된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이 웹툰은 이러한 일반성에 대해 질문한다. 이러한 모순(?)에 천천히 반문한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서사를 품고 있는 것일까. 지금 현재 <언다잉>은 연재 중 이어서 속단할 수는 없지만, 세 사람의 인물을 통해 이러한 서사를 끌고 간다. 용철, 광석, 지훈이 그들이다.
용철에게 아들의 집은 불편하다. 죽는 순간 갑자기 병이 나아 짓궂은 손자와 함께 방을 써야 했던 그는 “병원이 편했다”라고 고백한다. 그래서 갈 곳이 없는 용철은 좀비처럼 노인정으로 향한다. 하지만 그곳에 몰려든 수많은 노인들로 방황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어떤 노인은 사망 보험금 때문에 아들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한다. 죽어가고 있는 사람이 기적적으로 살아났으니 살아야 할 의무가 있는데, 그렇지 못한 상황이 펼쳐지니 무섭다. 용철은 집에 들어가지 않고 주변을 배회한다. 그런데 이런 용철을 바라보는 아들의 시선이 섬뜩하다. 집에 들어오지 않는 아버지를 실종 처리하게 될 경우, 보험금을 받을 수 없다는 이유로 실종 처리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용철은 우연히 이런 순간을 엿듣는다. 여기서 방점은 ‘안’ 부정이 아닌 ‘못’ 부정이다. 용철은 점점 더 찌그러진다.
병원에서 투병 중이었던 광석은 갈 곳이 없다. 퇴원해야 하지만 갈 곳이 없어 병원에 기생한다. 목구멍 깊숙이 손가락을 깊이 넣어 매일 매일 토한다. 토를 하면서 쓰러진 채 일어나지 않는다. 모두 다 연기다. 아프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프다는 것을 의사에게 증명해, 병원에 좀 더 머물기 위해 애쓰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연기가 조금 어설펐다. 끝내는 들키게 되고 병원에서 내쫓긴다. 길거리를 배회하는 광석은 여러 고민에 빠진다. “팔, 다리 하나 부러질 정도만” 다치면 된다고 자신을 다독인다. 광석의 주변 사람들은 횡재를 얻거나 운수가 대통 났을 때 사용하는 표현인 “노났다”라는 말을 아픈 사람들에게 역설적으로 쓰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은 광석의 상황을 더욱 초라하게 만든다. 아파야 살 수 있는 아니러니 한 세계이다.
마지막으로 지훈의 이야기다. 지훈의 이야기는 <언다잉>의 세계관에 살짝 어긋나지만 아픈 사람이 낫는다는 설정은 비슷하다. 지훈은 오랜 시간 자신의 아들을 병시중해 왔다. 쉽지 않았을 것이다. 병시중을 해 본 사람은 안다. 누군가를 하루 종일 옆에서 지키는 일은 나를 지우는 일이니 그렇다. 그래서 지훈은 아들을 안락사 시키려고 한다. 그래서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의 아들을 베개로 누른다. “안락사가 아니야. 그저 치료행위를 그만하는 거야”라고 말하며 자신을 다독이며 베개를 더 세차게 누른다. 그런데 이 행위가 실패한다. 아들은 건강하게 다시 일어난다. 중요한 것은 아빠가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실을 온전히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지훈은 오묘한 상황에 놓인다.
12화까지 진행된 <언다잉>의 풍경을 거칠게 살펴보았다. 이 글의 서사를 함께 공유한 독자들도 짐작하겠지만 각각의 인물들이 놓인 상황이 현실과 괴리된 설정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이야기임을 확인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가깝게는 우리 주변을 살펴보아도 이러한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갈 곳이 없어 배회하는 노인들, 가족들에게 외면을 받는 할아버지 할머니들, 오랜 간호가 힘겨워 죽음을 선택한 사람들, 이들은 우리 주변 곳곳에서 평범하게 삶을 살아내고 있다.
이처럼 임목원의 웹툰 <언다잉>은 우리 주변에서 펼쳐지지는 불편한 진실에 대해 질문한다. 독특한 상상력과 세계관을 제시해 동시대의 고령화라는 사회문제뿐만 아니라, 독자의 흥미를 자극시키고 있으니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도 그의 이야기는 우리의 표정이다. 독자들에게 이 웹툰을 적극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