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자기 경험, 그로 인한 생각이나 느낌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길 바라는 마음은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사람에게 이런 마음이 없다면 지구는 아주 아주 조용해질 테고,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뀔 것이다. 작가가 굳이 밝히지 않더라도 독자는 에세이가 작성되고 발표된 이유를 (최소한 한 가지는) 알고 있다. 그런데도 작가가 굳이 동기를 밝히는 데에는 각기 그럴 만한 까닭이 있을 터이다. 〈쉼터에 살았다〉는 제작 의도가 본문에서 유독 여러 번 제시되는 에세이 만화다. 목적이 여러 가지이고, 지은이의 마음이 간절했기 때문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은 부모에게 가정폭력을 당한 자녀가 가출해서 때 이른 자립을 시도하는 과정을 다룬다. “쉼터”는 지금 당장 자립할 수 없는 청소년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복지 시설이다. 시간 순서대로 구성했다면 이야기가 주인공의 어린 시절에서 시작했겠지만, 작가는 쉼터 경험을 1부에서 먼저 다룬다. 입소한 계기, 입소 과정, 일과, 숙식뿐만 아니라 쉼터에서 제공하는 상담, 직업 교육에 준하는 각종 특별 활동, 여가 생활 지원 등에 관해서도 소개한다. 에피소드 1~2개마다 새로운 정보가 하나씩 나온다. 리디북스에서 연재될 당시에는 없었지만, 단행본으로 출판되면서 회차별 소제목이 추가된 덕분에 개요를 파악하고 원하는 부분을 찾아 읽기가 더 쉬워졌다.
< 이미지 2, 쉼터에 살았다 9화 >
가정 폭력, 가출 과정, 우울증과 트라우마는 1부에서 조금씩만 언급되다가 2부에서 자세하게 나온다. 시작부터 주인공에게 매우 불리한 싸움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독자에 따라서는 읽는 것만으로 진이 빠질지도 모르겠다. 작품의 적재적소에 배치할 경우 독자가 이야기를 끝까지 읽게 만들 수 있는 완충 장치가 적어서 더 그렇다. 자조나 농담, 초현실적인 연출, 화자가 작품 속 시간과 공간에서 벗어나 한숨 돌리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어느 작가에 따르면 그리는 입장에서도 유머를 섞는 편이 덜 힘들다고 한다) 그 대신 작가는 정면 돌파를 선택한 이유를 알려준다. 본인이 맨 처음 정식으로 연재했던 웹툰이 사실은 “가정폭력 때문에 죽고 싶어 하는” 본인의 이야기였으며, “다른 사람의 이야기인 것처럼 꾸미더라도 어떻게든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가 바로 이 이야기였다고 밝힌다. ”이 얘기를 안 그린다는 선택지는 없”었다고.
< 이미지 2, 쉼터에 살았다 48화 >
2부는 1부보다 읽기 어렵지만 그래도 잘 읽힌다. 길고 어려운 시기를 잘 견딘 것부터가 성취였고, 경험을 잘 정리해서 작품으로 만들고 발표한 것은 별개의 성공이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하건만 작가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주인공이 어떻게 성장했는지도 보여준다. (모든 에세이가 작가의 성장을 다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만, 이 작품은 그중에서도 완성도가 높은 편이다) 주인공은 실패 이외에 다른 결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불완전한 자립을 계속 시도한다. 우울과 무기력과 트라우마가 밀물과 썰물처럼 왔다 갔다 하는 순간을 모두 견딘다. 그러다 결국에는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를 속여야만 했던 과거의 자기 자신과 다른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가해자와 소통하는 장면이 픽션처럼 세련되고 후련할 수는 없지만, 평생 두려워하던 대상에게 똑바로 맞서는 주인공을 독자는 믿고 응원하게 된다.
〈쉼터에 살았다〉는 독자를 의식하고 배려하는 면모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비슷한 경험을 했거나 지금 힘든 시기를 버티고 있는 이들에게는 위로와 공감을 제공할 수 있다. 쉼터 청소년의 이웃들에게는 복지가 왜 필요한지, 편견을 갖고 있다면 왜 버려야 하는지 차근차근 알려준다. 캠페인이나 광고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는데도 경험담과 정보의 균형이 절묘하게 맞추어져 있어서 읽고 나면 기대보다 얻은 것이 많다고 느끼게 한다. 아주 많이 힘든 상황이라도 어떻게든 나아질 여지가 있다는 희망도 그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