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만이 깊은 곳까지 가서 헤엄을 칠 수 있다.” 2023년 제95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더 웨일(The Whale)>의 배우 브랜든 프레이저가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받자, 다수의 국내 언론사에서는 그가 위와 같은 수상소감을 밝혔노라고 기사를 게재하였다. 영화 제목이기도 한 ‘고래(The Whale)가 초고도 비만인의 별칭인 것을 생각해 보면, 영화의 주제를 반영하는 감동적인 수상소감이다. 그러나 실제 오스카상 수상 영상에서 배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I want to tell you that only whales can swim at the depth of the talent of Hong Chau.“ 실제 소감은 영화의 메시지에 대한 것이 아닌, 함께 출연한 다른 배우의 재능에 대해 칭찬이었다. 그럼에도 기사화된 문장은 의미가 배어들어 나름의 깊이와 아름다움을 지니게 되었고, 한 번쯤 되새기게 만드는 힘을 갖게 되었는데, 초고도비만인(고래)인 주인공 찰리가 고통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발견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영화의 서사 때문일 것이다.
찰리가 삶의 의지를 상실하고 폭식으로써 자신을 학대하여 일종의 육신의 실패를 반복한다면, 크리스 웨어의 그래픽노블에서는 관계의 실패를 반복하고 소외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크리스웨어의 전작 <지미 코리건>이 약 100년간 이어지는 4대의 가계(증조부-현재의 지미 코리건까지)를 핵심 소재로 삼았다면, <지미 코리건> 이후 18년간 작업한 그래픽노블 <러스티 브라운>은 70년대 미국 네브래스카 오마하의 어느 사립학교를 배경으로 하여 7명의 주요 등장인물을 소환한다.
현실을 인식하고 과거의 기억을 조합하는 방식은 인간의 자아와 정체성을 구성한다. <러스티 브라운>에서 인물들은 산발적으로 회상하기도 하며, 어떤 사건들은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으로 인식되거나 재구성되어 독자들에게 불친절하게 정보를 제공할 때도 있다. 그것이 그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풍부한 상호텍스트가 시대적 구체성을 더함으로써 인물에 사실적인 삶을 부여한다. 그렇게 그들은 고유한 결점과 문제들까지 지니게 되는데, 그 결점 때문에 독자는 그들에게 인간적인 호감을 느끼기 어려운 경우도 발생한다. 그럼에도 <러스티 브라운>의 인물들에게 우리가 연민과 공감을 갖는 이유는, 그들이 현실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야기 안에서 끊임없이 무언가에 실패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고, 두 번째로는 크리스 웨어가 언급한 대로 “선(善)이 즉시 분명히 드러나지 않더라도, 내(크리스 웨어)가 상상한 ‘사람들’에게서 항상 그 선을 보려고 노력하는 나의 시도”(“my attempts to always try to see the good in those ‘people’ I have imagined, even if that good is not immediately apparent.”)(1)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등장인물 안에 내재된 선일 수도 있고, 등장인물을 통해 독자가 파악하는 선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각 챕터의 주인공이 선택적으로 기억하지(보여주지) 않는 일들은 대개 다른 인물을 통해 밝혀진다는 점 또한 <러스티 브라운>이 자아의 작동 기제를 드러내는 흥미로운 방법이다. 조던 린트는 방황하던 청년기를 졸업하고 신을 영접하여 건실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스스로를 규정하므로 둘째 아들에 대한 폭행은 그의 회고에서 의도적으로 누락되어 독자에게 정보가 제공되지 않지만, 그 사실은 조던의 노년에 둘째 아들의 자전 소설에서 폭로된다. 또한 우디 브라운의 챕터에서 그는 한껏 외로운, 연민을 자아내는 인물로 등장하지만 실은 자기 합리화에 열중할 뿐이다. 그의 가부장적이고 (선택적으로) 공격적인 모습은 조던 린트의 챕터에서도 그랬듯 우디의 챕터에서는 제거되고, 아들 러스티 브라운과 동료 교사 조앤 콜이 화자로 등장하는 부분에서 드러난다. 흑인 교사인 조앤 콜의 파트에서는 사건의 앞뒤 순서를 명백하게 파악하기 힘든 과거 회상도 종종 등장하며 시간의 흐름 역시 뒤죽박죽으로 진행된다. 크리스 웨어의 인터뷰로 추정컨대, 그것은 그녀가 “추억과 옛 생각에 빠져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2). 그녀는 과거를 끊임없이 현재로 소환하고 있다기 보다, 현재를 끊임없이 과거에 발 묶어두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흑인이라는 정체성과 관련된 사건들이 현재 그녀의 사고와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주는 연출적 시도다.
인물들은 자아뿐만 아니라 타자, 집단, 사회와의 관계에서 반복해서 실패한다, 전작 <지미 코리건>의 지미는 ‘슈퍼맨’에 부성을 투영하고, <러스티 브라운>의 러스티와 초키는 ‘슈퍼히어로’를 좋아하는데, 이들에게는 실패한 가족 및 대인관계에서 초래된 결핍을 가상 인물을 통해 충족하고자 하는 공통점이 있다. <러스티 브라운>에 등장하는 또 다른 인물들의 실패는 그들이 정면을 응시하는 컷을 통해 종종 드러난다. ‘정면을 바라봄’을 통해 독자는, 우디의 경우 자신이 있어야 할 곳과 자아상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을, 조던의 경우에는 모성 상실과 부성의 실패를 통해 형성된 불확실하고 거친 자아가 강화되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이에 더하여, 조앤의 챕터에서는 그녀의 ‘응시’를 통해 조앤뿐만 아니라 ‘독자’ 역시 함께 실패를 경험한다. 다른 백인 등장인물의 챕터에서 (등장인물에 의해서는 무의식적으로, 작가에 의해서는 의도적으로) 음소거된 소수 인종의 문제는 조앤의 챕터에서 민낯으로 드러나는데, 조앤의 실패는 그녀를 타자로 배제시키고 스스로도 타자화하는 다수 집단에서 유래하는 일상적이고 구조적인 실패다. 조앤의 챕터에서 서사를 파악하는 데 있어 역사적 컨텍스트를 배제할 수 없기에, 그녀의 반복적인 직시는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닌 만화라는 매체 너머, 같은 컨텍스트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독자를 응시하는 것으로 다가오고, 마찬가지로 그녀를 직시해야 하는 독자로써는 의식적으로 사회적 이슈를 환기할 수밖에 없는 식으로 영향을 미친다.
대상과의 관계에서 실패한다는 것은 대상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러스티 브라운>은 조던 린트가 갓 태어나 부모를 인식하는 장면을 제외하면, 벤데이닷(Ben-Day dot)을 이용하여 ‘알 수 없음’을 시각적으로 분명히 드러내는데, 등장인물이 파악하고자 하는 대상을 이해할 수 없거나, ‘우리’에서 대상이 심리적으로 분리될 때 그것은 망점으로 이미지화된다. 인간의 인지 능력에 의해 색점은 특정 대상으로 인식되기는 하지만, 이 이미지는 등장인물은 해당 대상을 이해할 수 없거나, 괴리감을 느끼면서 ‘나’와 분리되는 타자화를 겪는 과정을 드러낸다. 우디 브라운의 경우 그 대상은 자기 자신과 젊은 날에 만났던 밤색 머리카락의 여성, 조앤 콜의 경우 인종차별적 집단(타인)으로 대변되는 폭력적인 사회다. 벤데이닷은 자기를 넘어 어떻게든 관계를 구성해 보려고 하지만, 타자를 견딜 수 없어 분열하며 파편화되는 인식으로부터 유발되는 소외-자기 자신으로부터든, 사회로부터든-를 시각화한다. 웨어는 이러한 인물들의 “내면의 혼란과 갈등”이야말로 “이야기가 다루어야 하는 것”이며,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이야기의 목적임을 밝힌다(3).
종교적 의미를 배제한 구원의 사전적 의미가 고통과 악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면, 러스티 브라운의 인물들은 제각기 실패를 거듭하며 조각난 스스로를 구원하고자 애쓰고 있다. 아마도 현실의 우리가 그러하듯, 대다수는 원하는 지점에 영원히 닿지 못할 것이다. 다만 <러스티 브라운>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삶의 진실은 성공보다는 무수한 실패의 중첩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 진실이란 인간은 나약하고 결핍투성이라는 것. 불확실한 경험과 기억을 토대로 형성된 ‘나’라는 존재 역시 불확실하며, 그럼에도 우리는 자아를 넘어서 존재할 수 없으므로 그 불확실성 안에 갇혀있고, 타인 또한 그렇다는 것이다, 이해의 확장은 진실 이후에 비롯한다. 고래만이 깊은 곳까지 가서 헤엄칠 수 있듯, ‘나’에 대한 실패를 많이 해본 사람만이 크리스 웨어가 <러스티 브라운>의 메시지로 언급한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 안에 살려고 노력하는 것”(“to understand and inhabit people who are not me”)(4) -혹은 그것이 거창하다면, 지미 코리건이 그토록 원했던 “그저 남들과 잘 어울렸으면”- 이라는 지점에 가장 가까이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러스티 브라운>은 The End가 아닌 INTERMISSION으로 마무리된다. <러스티 브라운>이 18년간의 작업 끝에 완성되었으므로, 나머지 등장인물의 챕터를 담은 다음 이야기가 출간되는 것도 10년-20년이 소요될지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의 애독자로서 나의 일은 다음 작품을 기다리며 끊임없이 실패하며 살아가는 일일 것이다. 부디 그를 읽을 때에는 지금보다 명민한 패자가 되어있을 수만 있다면 좋겠다.
(1) Chris Ware — Charting the journey of Rusty Brown, 20 years in the making.(2019년 9월 26일). WEPRESENT. https://wepresent.wetransfer.com/stories/chris-ware-rusty-brown/
(2) Art21. (2017년 8월 5일). Chris Ware: Someone I'm Not[영상]. 유튜브. https://youtu.be/i2UkIPm2s20?si=tEH2qE6OYU0QnjYJ
(3) Art21. (2023년 3월 21일). Chris Ware in "Chicago" - Season 8[영상]. 유튜브. https://youtu.be/I2qQgFM66lw?si=r0uprCZLrVyXdQfl
(4) Chris Ware — Charting the journey of Rusty Brown, 20 years in the making.(2019년 9월 26일). WEPRESENT. https://wepresent.wetransfer.com/stories/chris-ware-rusty-bro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