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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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티켓을 예약하고 들어선 공연장에서, 윤재안 작가의 <포피스(poppies)>

책을 본 순간 ‘아, 이 책 꼭 읽어야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2024-01-23 주다빈

그러니까, 라는 책을 본 순간 ‘아, 이 책 꼭 읽어야겠는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리되지 않은 펜선이 주는 느낌과 빈티지 패션, 그리고 낮은 채도의 색감들. 개인적으로 이러한 것과 평생에 추억이란 것도 없었겠으나 괜한 향수를 자극하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다홍색의 표지에 그려진 원영이 마치 나와 눈이 핑!하고 마주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매번 읽어야지 하고 사들인 책들이 책꽂이며 이북 리더기며 켜켜이 쌓여만 있었던지라 혼자서 이 책을 읽기에 아주 완벽한 순간에 구매해서 읽어주겠다는 계획을 세웠었다. 그리고 리뷰 목록에서 이 책을 만났을 때는 괜히 마음을 졸였다. 이 책 리뷰는 꼭 쓰고 싶은데 다른 분에게 기회가 돌아갈까 봐서였다.. 그때 냉큼 쓰겠다고 말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때는 아직 어떤 준비가 되지 않았던 때였다. (물론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는 아직도 모른다. 그냥 마음가짐일 수도 있다) 그리고 11월 초, 다시 열심히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감사하게도 목록에 남겨진 를 보고 역시 운명이란 생각을 했다.


 

“캐릭터가 잘 보여야 그 인물들이 뭉쳤을 때의 사운드를 상상할 수 있을 테니까요.”_인터뷰 중 42p


윤재안 작가가 말한 것처럼 에서는 캐릭터의 개성이 두드러진다. 그들의 서로 다른 성향과 성격 덕에 이야기는 아주 부드럽게 전진한다. 덕분에 이야기의 말미엔 ‘벌써 종착점이라고?’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말투나 태도가 드러나는 한 컷으로 완벽하게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는데, 그들이 앞으로 발매될 앨범에 수록될 곡과 그 순서를 정하는 방식은 특히나 개개의 성향을 잘 보여주는 컷들이다. 자기애가 강하고 저돌적인 성향을 보인 원영과 찬영은 꽤 닮아있는 캐릭터인데 동갑인 데다가 고등학생 때부터 오랜 시간을 함께해왔다. 칸 안에서 큰 목소리를 가진 두 인물인 만큼 스토리 전개상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만화를 보면 두 인물이 아주 다른 캐릭터처럼 느껴지게 된다. 독자는 루미큐브를 하는 컷의 흐름으로 두 인물을 처음 대면하게 되는데 둘의 태도가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게임이 막혀있던 원영은 이기기 위해 억지를 부리다가 순간의 이벤트로 분위기를 바꾸며 내기를 무마한다. 즉흥적이고 임기응변에 능한 캐릭터인 원영에 찬영이 꽤 휘둘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타이틀곡의 작곡가를 정할 때는 계획적이고 단호한 태도로 자신이 짠판으로 원영을 끌어들이기도도 한다. 한편 팀의 메인 기타를 맡은 현재는 가장 어리지만 곡 작업에 능하고 노련한 성격으로 비치지만 팀의 리더인 지원과의 대화에서는 아직 사회생활에 미숙한 그 나이대의 아이 같은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팀의 리더이자 베이스 기타를 맡은 지원은 자신이 맡은 악기처럼 묵직하게 팀을 받쳐주면서 각각의 소리가 서로 잘 어울릴 수 있도록 중간 역할을 해내는 꽤 어른스러운 인물이다. 이 네 명의 캐릭터를 놓고 봤을 때 Poppies라는 밴드는 익살스러운 보컬이 있는 꽤 키치한 밴드일 거란 생각이 든다. 소리가 없는 게 밴드 만화의 모순이라던 윤재안 작가는 캐릭터성을 두드러지게 보여주면서 자신이 생각했던 크랙을 훌쩍 뛰어넘었다.


“그래서인지 제 만화에서 영화 연출이 느껴진다는 이야기를 간혹 듣습니다.”_인터뷰 중 40p


현실의 컷에서 순식간에 또 다른 공간의 컷으로 독자를 던지는데 어떤 설명도 없이 작동하는지라 간혹 현실과 생각의 공간이 헷갈리기도 한다. 그만큼 두 공간은 종잇장의 앞면과 뒷면처럼 서로의 등을 딱 맞대고 있다. 생각의 공간이라 칭한 데에는 이 공간이 현재는 아니나 과거일 때도 있고 미래 어쩌면 상상으로 끝날 공간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면 전환이 기가 막힌 부분은 찬영과 원영이 작곡가를 정하기 위해 같이 음악을 듣는 컷에서 시작한다. 음악을 듣던 둘은 어느새 다음 컷에서 연습실에서의 녹음하고 있고 정신을 차려보면 무대에서 공연하는 장면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마지막엔 미래의 공연 모습을 담은 컷으로 넘어간다. 마치 시간 위에서 스케이트라도 타듯이 빠르고 부드럽게 넘나드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컷들의 연결은 제일 앞서 등장했던 원영과 찬영의 내기부터 작곡가 선택의 문제까지 일순간에 해결하며 깔끔하게 만화를 매듭짓는다. 영화 연출이 느껴진다는 누군가의 이야기에 ‘맞네!’ 하며 한칸 한칸을 되짚어 읽었고 칸과 칸의 연결을 돌아보았다. 그러면 이 연출이 가진 매력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인터뷰에서 윤재안 작가가 밴드 JUDY AND MARY의 Fresh라는 히트곡 컴필레이션을 추천했기에 글을 쓰면서 플레이리스트에 있는 곡을 전부 들었다. 콘트라스트가 강한 영상과 시원하고 맑은 고음으로 악기의 소리 사이를 뚫고 나오는 여성 보컬의 노래를 들으면서 34~35p를 보자면 어느새 홍대의 어떤 지하 공연장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 든다. 조금은 갑갑한 공기와 후끈한 열기 그리고 공간 가득 소리를 채우는 앰프의 진동이 살갗으로 전해진다. 들어본 적 없는 그들의 다음 앨범을 기대하게 하는 매력적인 캐릭터와 연출의 작품이었다.


필진이미지

주다빈

만화평론가
2020 만화·웹툰 평론 공모전 신인부문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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