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미래의 지구, 가을과 겨울은 사라졌고 해수면은 지속적으로 상승 중이다. 이로 인해 한반도는 고도에 따라 지역별로 고립되고 문명은 일정 부분 후퇴했다. 웹툰 ‘물위의 우리’가 그리는 묵시록의 세계이다. 작품 속 한반도는 잠실, 관악산, 북한산, 남산으로 구성된 서울 동맹과 강원도, 남부연합으로 분열되었다. 이 세 세력간 갈등을 주축으로 잠실 출신인 ‘한호주’, ‘한별’ 부녀와 그들의 고향인 양지, 그리고 잠실 및 그 외 지역의 인물들이 서로 얽혀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아포칼립스 또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는 본질적으로 당대의 집단적 불안과 두려움을 담아내기 용이하다. 핵 군비 경쟁과 펜데믹 창궐, AI의 진격 등은 이 장르에서 소재의 요람이 되거나 메타포의 대상이 되어왔다. 어느 정도의 유행과 흐름도 있었다. (좀비 아포칼립스는 스테디셀러다) 그리고 이 묵시록의 세계를 비주얼로 구현하는데 성공해 온 쪽은 자본의 세례를 받은 헐리웃이었다. 우리는 주로 그들의 작품을 통해 멸망의 과정 또는 멸망 후의 세계를 목도해 왔는데, 그러므로 우리에겐 그들이 창조한 멸망의 스펙터클이 잔상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적지 않은 한국 웹툰들이 이 장르에 주목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북미의 어느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재앙이 아닌 한국, 한국인의 맥락과 텍스트에서 멸망의 세계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물위의 우리’는 실제 한반도 지리적 위치와 특성을 적극 활용한다. 중앙통제력을 가진 국가의 붕괴상황에서 지역 단위로 이합 집산하여 세력화되고 서로 반목하는 집단의 이야기는 의도했건 그렇지 않건 한국인의 무의식에 자리한 어떤 갈등 양상을 연상시킨다.
장르적 측면에서 또 하나 덧붙일 수 있는 이야기는 장르 복합성에 관해서이다. 연재 초, 한호주 부녀의 양지마을 적응기가 일상드라마로 전개되리라 예상했던 독자들은 이윽고 베일을 벗은 세계의 잔혹함과 마주하게 된다. 세계가 그 어두운 실체를 드러내는 과정은 다분히 스릴러적이고 이 세계 안에서 서로 아귀다툼하는 인물들의 대결은 때론 캐릭터성을 극대화한 방식의 능력자 배틀물적인 액션을 취하기도 한다. (관악산, 북한산이나 남부연합의 주요캐릭터들은 코스츔이나 기믹을 통해서 캐릭터성을 극대화한다) 양지에서 아이들의 일상은 디테일보다는 카툰적인 작화로 묘사하는데 파스텔톤의 배경 색감은 일상의 평화로운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연출한다. 반면, 세계의 실체를 다루는 배경은 사실적인 묘사와 어두운 톤을 지향하고 있다. 다양한 장르적 장치와 두 가지 톤의 분위기가 공존한다는 것은 양날의 검이다. 장르 믹스는 핵심 주제로의 몰입이나 작품 전체 분위기의 일관성 구축에 불리한 측면이 있음에도 작품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하거나 극의 긴장을 적절한 완급으로 조정하는데 유리하다. 이것이 장르의 믹스를 선택한 작품이 일반적으로 전략하는 바 이겠지만 ‘물위의 우리’는 조금 다른 결과를 추가로 의도한다. ‘한별’을 포함한 아이들이 세계의 비극과 마주하는 순간 이야기는 결국 한편의 잔혹동화로 수렴된다. 한별에게 세계의 실체를 동화로 설명하고자 하는 삼촌들의 선의가 무색하게 세계의 비극은 그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한별이 주로 등장하는 연재 분에서 소제목을 한별의 동화적 스케치로 표현한 것은 이야기가 한편의 잔혹동화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장치처럼 보인다.
영화 ‘워터월드’(‘95년)와 애니메이션 ‘미래소년 코난’ (‘78년)이 등장한지 3~40년의 시간이 지났다. 그간 아포칼립스 소재로는 비주류라 할 수 있을 ’물 위에 갇힌 인류‘라는 설정은 이제 이 장르의 트렌디(?)한 소재가 될 가능성이 생겼다. 노벨 화학상 수상자 파울 크뤼천(Paul J. Crutzen)은 지구의 지질학적 연대 상, 현재를 ’인간활동‘에 의한 기후변화와 대량 멸절의 시대, 즉 인류세(Anthropocene)로 규정할 것을 제안했다. 여기서 인간 활동이란 화석연료의 사용, 핵실험, 방사선과 플라스틱 배출 등을 의미한다. ’물위의 우리‘속 ’우리‘뿐 아니라 ’우리(독자)‘도 잔혹동화의 배경이 되는 인류세를 지금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