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국민당 정부의 수도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지난 3개월 동안의 전투에서 입은 ‘피해’에 ‘복수’한다는 명목으로 극악무도한 행위를 벌이기 시작한다.”
『뚜이부치』 표지.
인간은 참 모질다. 인간은 선하기도 하지만 지독하게 악하기도 하다. 때론 누군가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질 만큼 윤리적이기도 하지만, 광기에 휩싸이면 잔인한 괴물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이런 광기의 모습을 한국현대사나 세계사를 찾아보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최덕현의 작품 『뚜이부치』(2023)는 인간이 자행했던 학살의 시간을 다룬다. 뚜이부치(对不起)는 중국어로 미안하다는 말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아주마 시로 소위(少尉)는 일본군으로 1937년 상하이와 난징에서 중국인을 공격한 장교이다. 직책이 장교이다 보니 부하들을 데리고 전쟁 속에서 부끄러운 짓을 자행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는 이런 전쟁이 못마땅하다. “살인과 방화, 약탈, 강간”(57)이 일상이 되어버린 전쟁이 곤혹스럽다. 전쟁 중에 “민간인 여자를 데려오면 집안일을 시킨다”(52)는 말을 믿고 아주마 시로 소위는 포로인 중국인 여성을 군부에 데려간다. 하지만 군부는 이 여성을 도구로 전락시키고 아주마 시로 소외는 그 사실을 모른다.
하지만 부끄러움도 전쟁에서는 아이러니하게 만든다. 난징시에 있는 일본군 위안소에 들른 아주마 시로 소위는 “난 이야기만 하고 갈 거야. 편하게 겉옷만 벗을 테니 안심하”(104)라며 그곳에 있는 여성의 이름을 물어본다. 하지만 자신이 군부에 데려온 민간인 여자가 그녀라는 사실을 알고 치욕을 느낀다. 그 후로 아주마 시로 소위는 그녀를 탈출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이 탈출은 실패하게 된다. 민간인 여성에게 ‘미안하다’는 소리 한번 못하고, 동료 군인들에게 짓밟히는 것을 막지 못한다. 전쟁이 가져다준 모순적이고 모욕적인 순간 중에 하나다. 그렇다면 아주마 시로 소위는 어떤 인물일까. 만화가 최덕현은 어떤 지점에서 이 인물에게 매력을 느꼈기에 그림으로 그리게 되었을까. 만화가가 정리한 아즈마 시로에 대해 잠시 적어보기로 하자.
| 이 작품의 주인공 아즈마 시로(1912.4.47~2006.1.3.)는 실존 인물로 난징 대학살 당시 일본 육군 제16사단 20연대 소속 병사로 민간인 학살에 가담했던 인물이다. 이 작품은 그의 이야기를 소재로 픽션으로 구성한 것이다.
| 이즈마 시로는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했을 때 6주 동안 30만명 이상의 중국 군인과 시민을 학살한 내용을 일기로 써 놓았다가 50년 후인 1987년 《아즈마 시로 일기》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냈다.
| 아즈마 시로의 전우는 책이 나온 지 6년 후인 1993년 일본 우익 세력의 조종에 의해 명예 훼손 등으로 아즈마 시로를 고소했다. 일본 재판소는 아즈마 시로의 패소를 확정했으며 그가 폭로한 역사적 진실을 부정했다.
난징 대학살 50주년 기념일인 1987년 12월 13일 아즈마는 종전 후 처음으로 난징을 방문, 난징 대학살 기념관 앞에서 무픞을 꿇고 학살 사건에 대해 사과했고, 그 후 여러 차례 방문하여 사과했으며 난징 대학살에 관한 진실을 증언했다. 그가 진심으로 사과하는 모습은 많은 중국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우리는 이 텍스트를 통해서 부끄러운 인간의 역사를 생각할 수 있다. 한반도 또한 일본의 식민지였고, 많은 조선 여성이 강제로 끌려가 일본군에 의해 원하지 않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조선인들만 순수했던 것은 아니다. 한국 또한 베트남 전쟁에서 학살을 자행하기도 했고, 제주 4・3 역시 자국민을 대상으로 잔인한 폭력을 행사한 아픈 학살의 모습이기도 하니 말이다. 어쩌면 ‘전쟁’이라는 광기가 인간을 괴물로 만드는지 모르겠다. 이러한 맥락에서 만화가 최덕현은 전쟁 중에 부끄러움을 느꼈던 한 일본군 장교를 그림으로써 괴물 같은 인간의 모습에 질문한 것으로 보인다.
『뚜이부치』 227쪽.
이 텍스트에서 중요하게 볼 만화적 형식은 ‘붉은색’이다. 학살의 순간에도, 피 흘리는 순간에도, 욱일기(旭日旗)가 보이는 장면에서도, 붉은색은 드러난다. 이런 연출로 인해 독자들로 하여금 인간의 폭력성을 드러내 보여준다. 끝으로 용서에 관해 물어야겠다. 용서는 무엇인가. 용서는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행위이겠다. 하지만 학살은 어떤 방식이든지 용서할 수 없다. 인간을 무참히 죽이는 행위를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학살자에게 부끄러움을 선사하기 위해 예술가들은 잊지 못하도록 부끄러운 과거를 멈추지 않고 기록한다. 이 작품은 이런 역할을 한다. 후대의 사람들에게 정의가 무엇인지 알려준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