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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얽힌 세계, <무사만리행>

동양과 서양, 주인공과 황제, 두 사람이 얽혀 있는 세계 속 이야기

2024-02-10 수차미


| 두 사람이 얽힌 세계, <무사만리행>

<무사만리행>은 멸망한 나라의 검사 ‘나루’가 서역의 로마국에 노예로 팔려간 뒤의 이야기를 다룬다. 나라가 멸망하던 틈에 배신자가 서역에 팔아넘긴 공주를, 자신이 지켜주겠노라고 다짐했던 공주를 찾아 서역에 팔려가는 게 작품의 주된 줄거리다. 플롯으로만 보면 먼치킨물, 혹은 용자물처럼 보이지만 무엇보다 이 만화에서 구미를 끄는 대목은 주인공의 적대자다. 자신이 헤라클레스의 현신이라고 주장하는 콤모두스 황제가 너무 강해서 주인공이 대체 어떻게 이길지를 모르겠다는 게 주된 이유이다. 소위 고전 플롯에 해당하는 ‘선한 주인공’과 ‘한없이 사악한 적’을 대비한 듯한 이 작품은 다양한 변주가 이루어지는 현대 용자물 사이에서 가장 정석적인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첫 번째, 주인공은 무척 강하다. 두 번째, 마지막에 도달하게 될 적도 강하다. 세 번째, 주인공은 자신이 구해야 할 무언가가 있고 이게 곧 삶의 목표와 연결된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가 고전 플롯과 모든 면에서 다르다. 

우선 현대적 용자물의 변형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생각해보자. 아마도 <죠죠의 기묘한 모험>의 1~3부일 것이다(이하 자세한 제목은 생략한다). <죠죠>의 1부와 2부는 죠죠 가문과 디오의 악연이 얽힌 과정을 그리며 3부는 죠죠가 ‘마왕’이 된 디오를 상대하는 이야기다. 이중 3부는 초대 죠죠의 손자와 초대 죠죠의 몸을 차지한 디오의 싸움을 그리는데, 그는 작품의 후반까지 줄곧 얼굴이 가려진 채로 등장한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디오는 죠죠의 혈통을 멀리서 보고 느낄 수 있는 염사까지 사용하면서 소위 ‘마왕성에 앉아 주인공 일행을 지켜보는’ 클리셰를 성실히 수행한다. 무엇보다 실제로 디오는 마왕성에 앉아 자신이 직간접적으로 힘을 부여한 부하들을 내세우며, 종국에는 자신이 직접 나서 죠죠를 상대한다. 그러나 <죠죠>가 그냥저냥한 왕도물로 취급되지 않았던 건, 디오는 마왕이 아니었고 오히려 죠죠와 같은 힘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주인공과 완벽한 버디물을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앞서 나는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가 모두 다르다고 말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두 사람을 어울리게 하고 나머지 모두를 바꾸는 게 이런 용자물의 변형 판본이다. 디오가 죠죠 가문의 몸뚱이에 눌러앉은 흡혈귀인 이상 두 사람은 혈연으로 얽혀있고, 또 그런 악연으로 맺어져 있다. 이와 유사하게 <무사만리행>은 나루의 강함에 첫눈에 반한 황제가 그가 자신을 ‘쓰러트려 주기를’ 바란다는 메인 플롯으로 진행되어, 종국에는 황제 본인이 검투 경기에 나선다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킨다. <죠죠>가 혈연을 악연으로 내세운다면 <무사만리행>은 무협에서 말하는 ‘기연’을 이용하는데, 가령 작품의 전개는 이렇다. 황제는 나루에게 반해 나루가 자신의 대적자가 되도록 여러 시련을 부여한다. 이 과정에서 나루와 황제는 서로 간에 얼굴을 맞대지는 않지만, 은연중에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면서 어떤 대결이 될 것인지를 줄곧 생각한다. 이런 과정이 작품 전반에 펼쳐지면서 두 사람은 서로를 성장시키는 짝꿍이 된다. 

한편으로는 작품에서 흥미로워할 만한 부분은 ‘악인’의 성격이다. 황제는 빼도 박도 못할 악역이라는 점에서 주인공을 위한 목석 1쯤으로 취급되어야 마땅하지만, 특유의 캐릭터성 덕분에 독자들 사이에서 장난스러운 지지를 받는 중이다. 작품에서 황제의 역할이 종국에는 나루에 의해 격파되어야 할 마지막 시련이 될 것임을 고려하면, 이와 같은 평가는 ‘이미 정해진 결말’에 대한 판단이 전제된 것으로 보인다. 어떤 전개가 되더라도 악은 선에 의해 격파된다는 믿음이 여기에 있다-따라서 우리가 작품에 대해 물을 수 있는 사실 하나는 얽힘이 아닐까 한다. 브뤼노 라투르는 자신의 객체 지향 철학을 다루면서 양자 세계의 얽힘 개념을 가져온 바 있다. 크게 볼 때 얽힘은 두 세계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서로 간에 영향을 주는 상태에 있으며, 어느 한 쪽이 변하면 다른 한쪽도 자연스레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나루와 황제의 싸움이 단순한 선과 악의 대결일 수만은 없다는 점은 자명해 보인다. 


필진이미지

수차미

< 만화평론가> 
* 2019 만화영상진흥원 만화평론상 신인 부분 
* 2019 한국예총 평론상 영화 부문
* 2020 서울시립대 영화평론 공모전 대학원생 부문
* 2024 부산일보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
* 저서 『안녕하세요 오즈 야스지로』,『포스트 시대의 영화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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