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에서도 플롯의 마법이 발휘되기 시작한다.
* 이 리뷰에는 <천국대마경>의 핵심 스포일러가 최소화돼 있지만, 조금의 스포일러도 원치 않는 분은 꼭 만화를 먼저 보시길 권합니다.
벽으로 둘러싸인 폐쇄된 공간에서 바깥의 세상을 꿈꾸는 이야기는 <진격의 거인>을 통해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졌다. 그 폐쇄된 공간 안에서 바깥은 위험하다 믿으며 양육되는 아이들의 모습은 <약속의 네버랜드>에서 이미 보았다. 괴상한 크리처들과 특수한 능력을 가진 주인공(집단)의 구도는 근 수십 년간의 소년만화에서 빠뜨리기 힘든 소재가 되었으며, 황폐해진 세계에서 유토피아를 찾아간다는 여로형 서사의 포스트 아포칼립스 또한 만화와 영화 등에서 계속해서 재생산되는 장르이다.
<천국대마경>의 세계관과 설정을 평가한다면, 이처럼 앞서 성공한 작품들의 연장선에 있는 ‘무난한’ 작품 정도로 여겨질지 모르겠다. 혹자는 이렇게 세계관과 복선이 치밀한 작품의 경우 결말까지 봐야만 적확한 평을 내릴 수 있으리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현재까지 반 남짓이나 진행되었을, ‘무난한 정도’일지 모를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년만화를 리뷰해야겠다는 결심이 선 이유는, 이 작품만의 독특한 매력과 강점이 세계관에 있지 않아서이다. <천국대마경>의 진정한 매력은 그 세계관을 시공간적으로 해체하고 조립하는 솜씨, 즉 ‘플롯’에 있다.
<천국대마경>의 작가 이시구로 마사카즈는 이미 그 전작들에서 플롯을 다루는 솜씨를 선보인 바 있다. 이시구로의 초기작이자 대표작 <그래도 마을은 돌아간다>(2005-2016)는 옴니버스식으로 진행되는 일상 코미디물이지만, 종종 각화의 시간 배열을 바꾸는 플롯을 사용함으로써 긴장을 형성하고 복선을 회수하는 기능으로 작동시켰다. 한 권짜리 작품집으로 나온 <외천루>(2008-2011)로 가면 플롯은 기능적으로만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서사 전체를 쥐고 흔들게 된다. 난삽하게 흩어져 있던 각각의 단편이 후반부로 갈수록 하나의 서사, 하나의 주제로 모아지며 강한 임팩트를 주는 방식이다.
하지만 <외천루>에서의 플롯은 반전을 위한 반전, 플롯을 위한 플롯이라는 점에서 다소 설익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반면 <천국대마경>에 이르면 이시구로 마사카즈가 플롯을 유용하는 방식이 훨씬 능수능란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장편의 긴 호흡과 폭넓은 시공간 배경, 다양한 인물의 등장에도 불구하고 <천국대마경>에서의 플롯은 서사와 따로 놀지 않고 자연스럽게 해체와 조합을 반복한다. 초반부에선 ‘천국’과 ‘마경’이라는 두 개의 공간, 두 개의 서사가 ‘교차’되는 다소 독특한 플롯 정도로만 인식되지만, 극이 진행되며 복선을 회수할수록 ‘교차’가 아닌 서사의 ‘중첩’을 엿보게 되는 것이다.
이 독특한 플롯으로 인해 <천국대마경>은 다른 만화들과 확연한 차별점들을 갖게 된다. 일반적인 반전 만화의 경우 초반부에 복선을 충분히 뿌려놓고 중반부에 그것을 숙성시킨 후 후반부에 복선을 회수하며 반전을 선사한다. 하지만 <천국대마경>은 복선이 깔리고 회수되는 시점을 가까운 곳에 위치시키거나, 심지어 핵심적인 반전을 알고 나면 이미 앞에서 복선들을 회수했음을 깨닫고 앞으로 돌아가 반전의 여운을 더 강하게 느끼도록 구성돼 있다.
여기서 이시구로 마사카즈의 역량이 더욱 돋보이는 지점은 반전의 ‘충격’이 아니라 반전의 ‘여운’에 집중하게 한다는 것이다. <천국대마경>에서의 반전은 작가라면 응당 가질 만한 “이건 예상 못 했지? 나 대단하지?” 식의 허영심을 거의 부리지 않는다. 그런 허영이 느껴진다고 격하될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시구로가 <천국대마경>에서 선택한 반전 연출은 반전의 ‘충격’이라는 휘발적인 감정으로 작가를 찬양하게만 하지는 않는다. 그 대신 작가의 의도를 따라 작품 속 인물들의 감정과 선택, 변화와 그 속에서 흘러간 시간에 집중하게 한다.
이러한 차별화는 만화를 읽는 방식에도 다른 가능성을 제시한다. 1화부터 순서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게임북을 보는 것처럼 복선의 연결고리, 각 인물의 서사를 따라 만화의 초·중·후반부를 넘나들며 읽게 되는 것이다. 다만 가벼운 마음으로 만화를 즐기고 싶은 독자에게 이렇게 플롯을 해체하며 읽는다는 것은 여간 피곤한 일이 아니다. 이러한 ‘이성적 읽기’는 하나의 방법론으로 제시될 순 있을지언정 예술을 감상하는 최고의 방법이라곤 할 수 없다. 하지만 이시구로 마사카즈는 이 복잡성의 문제를 <그래도 마을은 돌아간다>에서 보여준 그의 장기, 소소한 일상과 웃음으로 돌파한다. ‘천국’이든 ‘마경’이든 수수께끼로 둘러싸인 긴장의 공간이지만, 각각을 활주하는 인물들의 소박하고 매력적인 캐릭터, 그리고 그들 간의 케미스트리는 독자로 하여금 딱히 머리 쓸 필요 없이 서사를 따라가게 한다. 가끔 피식거리고 가끔 심각해지다 보면 어느새 진실을 마주한 채 충격과 감동을 받게 되는 것이다. 부조리한 사회에 각 개인의 작은 악함이 일면 기여했다 하더라도, 동시에 그들에게 그만큼의 작은 선함이 있고 거기에 희망이 있다는 따뜻함이 <천국대마경>을 계속해서 읽게 하는 힘이다.
물론, 진입장벽은 분명히 있다. 등장인물이 많은데 초반까지는 주인공이 누군지 조차 불분명하기 때문에, 비중 있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놓치고 지나가게 되는 경우도 있다. 한국 독자로서 일본식 이름들을 기억하기 더 어렵다는 아쉬움도 있었다. 그럼에도 <천국대마경>은 만화의 새로운 가능성과 완성도를 보여줬다는 말로 마무리하고 싶다. 만화는 영화·애니메이션과 달리 서사의 속도와 순서를 독자가 통제할 수 있다. 한 화를 보더라도 끝까지 갔다가 초반부는 이전 화로 돌아오고, 누군가 빌려 가는 바람에 한 권을 건너뛰기도 하는 식으로 만화 독자들은 자신만의 플롯으로 만화의 서사를 해체하고 이해해 왔다. <천국대마경>은 그러한 만화 플롯의 가능성을 완성도 높게 보여줄 뿐 아니라 새로운 읽기 방식마저 추동하고 있다. ‘연재’라는 방식으로 인해 대부분의 만화가 서사의 얼개 정도만 짜놓거나 후반부는 생각해 놓지도 않고 연재를 시작했다가 용두사미로 끝나는 경우를 많이 봐왔다. 어쩌면 완성 후 작품을 내놓는 소설·영화 등과 달리 오랜 연재를 통해 작품을 완성해 가는 방식이 만화의 질적 하락의 가장 큰 요인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어떤 만화가는 이미 완성시킨 서사를 가지고 플롯이라는 마법을 부려 세상에 선보인다. <천국대마경>이 결말까지 그 마법 같은 힘을 유지하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