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도의 삶은 한 여성의 삶
△ <호도> 표지
최근에 인천 중구청 근처에 있는 작은 서점인 문학소매점에 들러 마영신 작가의 〈호도〉(2024, 송송책방)를 추천받아 읽게 되었다. 만화가 마영신은 〈아티스트〉와 〈엄마들〉 그리고 〈남동공단〉 등으로 독자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은 친숙한 작가여서 그의 새로운 신작을 읽을 수 있다는 마음에 기분이 들떴다. 무엇보다도 작품 제목이 무슨 이유로 ‘호도’인지가 궁금했다.
텍스트에는 “호수 한가운데 있는 섬”이라고 적고 있는데, 홀로 놓인 섬이라고 생각하니 쓸쓸한 감정이 잔잔한 파도처럼 밀려왔다. 고독하고 적적하고 외로워 보이는 이 의미가 무엇인가 텍스트의 푸른색 표지와 어울려 우울한 기운을 자아내는 것 같기도 하다.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이런 분위기가 이 작품의 주인공 이름 자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만화 속 주인공인 ‘호도’의 삶을 정확히 알 수는 없을지라도, 순탄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작품을 만든 작가는 호수 한가운데 홀로 놓인 섬의 이미지를 통해 외롭고 높고 쓸쓸한 호도의 삶을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싶었을 것이다.
함께 만든 작품
〈호도〉는 만화가 마영신의 순수 작품은 아니다. 〈너의 인스타〉(2020, 송송책방)에서 반지수 작가가 그림을 그리고 마영신이 글을 담당했던 것처럼, 〈호도〉는 역으로 마영신이 그림과 글을 담당하고 연경 작가가 원안(原案)을 제공해 만들어진 텍스트로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 작품의 자기 고백적 성격은 마영신의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연경 작가의 흔적이 짙게 배어 있다.
만화가 마영신은 ‘되기(become)’의 방식으로 연경 작가의 사연과 사정을 귀담아듣는 과정을 통해 만화책 〈호도〉의 주인공이 되어 본 것이다. 마치 몰입해 연기하는 배우처럼, 작품을 그리는 동안만큼은 연경 작가가 되어 그녀의 삶을 만화의 형식으로 재현한 것이다.
이런 방식은 마영신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그는 과거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 기획한 ‘만화로 보는 민주화운동 세트’ 5·18 편에 참여하기도 했고, 416 세월호 참사 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이 제작한 〈금요일엔 돌아오렴〉(2015, 창비)에도 그림 작업을 위해 참여하기도 했으니, ‘되기’의 방식은 낯선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만화가 마영신이 공감하며 느끼고자 했던 〈호도〉의 삶은 무엇이고, ‘호도’는 어떤 삶을 견디며 살았었는지에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힘들고 괴로웠던 ‘호도’의 삶
△ 성인 <호도> 164쪽
송송출판사에서 지난달에 출간된 〈호도〉는 유년 시절과 이 시절을 힘겹게 통과한 성인 ‘호도’가 그림을 그리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유년 시절 호도는 왕따를 당한 학생이었다. 동네 아이들은, 학급 친구들은, 호도를 이유 없이 때렸다. 호도는 이유를 알고 싶었고,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괴롭힘은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호도는 이보다 더 심한 끔찍한 일을 겪기도 했다. 동네 형들로부터, 동네 아저씨들로부터, 성추행과 성폭행을 당했던 것이다. 이처럼 고통스러운 순간을 호도는 홀로 겪는다.
안타까운 것은 용기 내 가족들에게 말해도 믿어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서로를 이해하고 안아주고 곁에서 지켜주는 것이 가족의 역할이지만, 호도의 가족은 건강하지 않았다. 호도는 유년 시절 가족들에게 학대받으면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폭력을 가하는 사람도 폭력을 당하는 사람도 온전할 수 없다. 그러니 온전한 가족의 모습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연애도 순탄하지 않았다.
호도의 옛 애인은 이별 후, 동의 없이 찍은 성관계 영상을 유포한다고 협박하기도 했고, 낙태(임신 중지)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소문을 퍼트려 호도를 힘들게 만들었다. 어쩔 수 없이 임신 중지를 해야 할 일이 생기더라도, 낙태에 대한 편견이 우리 사회에 지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한 여성이 낙태했다는 소문은 호도에게 정신적 충격을 가져다줄 수밖에 없다. 이처럼 호도의 삶은 고통스러웠다. 삶 자체에 대해 회의를 느끼며 여러 번 자신을 몸을 자해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필연인지도 모른다.
그때부터 나는 나쁜 일이 언제 터질지 몰라
불행한 일에 대비해야 하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나는 매일 나쁜 일을 기다리며
나를 파괴하는 놀이를 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숨통이 트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이 세계에 잘 섞이지 못한 나는
귀신과 다를 게 없구나
만약에 이 끈을 끊으면 저주 받은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나서……
[유년 시절의 <호도>112~114쪽]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호도의 고통만을 전시하지는 않는다. 주인공 호도는 힘든 과정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기 위해 애쓴다. 싸움이 잦고 서로를 믿어주지 못했던 가족을 등지고 독립해 자신만의 공간을 찾으러 떠난다.
그런데 생각해 보라. 가족을 등지고 홀로 서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만만치 않다. 하지만 호도는 용기를 낸다. 자신을 온전히 응시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일어서려고 한다. 하지만 이 과정은 지난 한 반복의 연속이었다. 굳은 마음은 금방 시들해지고, 시들해진 이후에는 다시 마음을 잡기가 쉽지 않다. 늘 제자리다.
오빠는 나를 위해 계속 애썼다
하지만 나는 좋아지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난 죽어가고 있었다
거미 없는 거미줄에 걸려
영원히 이렇게 살아야만 할 것 같았다.
거미야, 어디 갔니? 차라리 죽여주라.
하얗게 비어 있는 스케치북이 보였다.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마저 안 그리면
죽음 외엔 다른 게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매일 미친 듯이 그림만 그렸다.
일어나면 그림 생각만 하고
자기 전에도 내일 그릴 그림 생각뿐이었다.
[성인 시절의 <호도> 124~125쪽]
그래서 호도는 “어쩌면 지독히 괴롭고 열악한 상황에서 그림이 더 잘 나왔던 거 같다”며 스스로를 옳지 않은 방향으로 몰아세우고 끝내는 “나는 불행해야 더 그림을” 잘 그릴 수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어찌 ‘고통’의 흔적만이 예술의 소재가 될 수 있겠는가. 예술은 고통도 기쁨도 슬픔도 웃음도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호도는 자신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으며 그림 작업을 이어나간다.
힘들고 괴로웠던 ‘가영’이의 삶
오랜만에 호도와 학창시절 함께 지냈던 친구 가영이에게 연락이 온다. 가영이는 과거 호두가 낙태 소문에 힘들어했을 때, 마음속 깊이 공감해주지 못했던 친구이다. 낙태로 인해 한 여성이 겪어야 했던 왜곡된 시선에 대해서 함께 나누지 못했다. 그런 가영이가 낙태할 수밖에 없었다고 오랜만에 호도에게 연락을 해온 것이다.
가영이의 경우 ‘직접’ 낙태를 겪게 되었으니, 과거 호도의 처지와 상황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 이후로 호도와 가영이는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호도 역시 친동생의 남자친구에게 성폭행당한 사실로 인해 괴로워했던 터라, 가영이의 상처와 아픔을 나누려고 한다.
△ 성인 시절의 〈호도〉 137쪽.
그러다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듣는다. 가영이가 자살했다는 것이다. 호도는 말한다. “만약 내가 그때 그냥 넘기지 않았으면…”이라고 말이다. 여기서 ‘그때’는 가영이가 임신 중지로 인해 힘들어했을 때,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못한 호도 자신의 모습을 말한다. 누구보다도 힘겹게 삶을 살았던 호도 역시 타인의 아픔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것이다.
그때 호도는 비로소 자신의 고통만이 중요했을 뿐, 겉모습만 보고 타인의 고통에 외면한 자신을 온전히 쳐다보게 된다. 집안도 좋을 뿐만 아니라, 자신보다 잘살고, 좋은 학교에 진학한 가영이를 오랜 시간 ‘질투’했다는 사실도 받아들이게 된다.
호도는 가영이의 소식을 듣고 가슴 아파하다가 쓰러진다. 그러던 어느 날, 식물이 죽은 화분에서 새로운 싹이 돋아나는 것을 목격한다. 이 광경을 쳐다보고 나서 호도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 아마도 이것은 식물의 삶과 죽음을 통해, 인간의 행보를 점친 것일 테다.
그래서 호도는 고통 속에서도, 모든 것이 황폐해진 순간에도, ‘씨앗’이 싹 틀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응시하며 다시 일어나 자신이 가장 잘하고 즐거워하는 그림을 그린다. 이 장면을 끝으로 이 만화는 끝이 난다.
웹툰에서 책으로 변신한 〈호도〉
마영신이 만화를 그리고 원안을 제공한 언경의 텍스트 〈호도〉는 카카오웹툰에서 2023년 2월 2일부터 2023년 8월 10일까지 웹툰으로 먼저 선보인 이후, 송송출판사에서 지난달에 출간된 텍스트이다. 지금 현재는 웹툰으로 볼 수는 없다. 책에서는 유년 시절 호도의 이야기와 성인이 된 호도의 이야기가 시간 순서대로 나열되지 않고, 분리된 채 묶여 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유년 시절의 ‘호도’와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된 지금, 이 순간의 ‘호도’를 구분하고 싶었을 것으로 추측해 본다. 무엇보다도 이 텍스트는 가난에 대해서, 가정폭력에 대해서, 성폭력에 대해서, 올바르지 못한 성문화에 대해서, ‘호도’라는 한 개인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다만, 주의할 것이 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여러 시간이 중첩되어 있다는 점을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여러 인물이 겹치지 않는 혼란을 피할 수 있다. 독자들에게 이 텍스트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