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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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성, 돌탑, 눈사람

충사(글, 그림 우루시바라 유키 / 대원씨아이 출판) 리뷰

2024-06-07 주다빈

모래성, 돌탑, 눈사람

  세상에 사람이 만든 것을 제외하고 반으로 딱 나눠질 수 있는 게 있을까? 앞과 뒤, 빛과 어둠, 어제와 오늘. 이 모든 것들은 인간의 편의를 위해서 이름 붙여지고 나눠지고 분류된 것들이다. 없던 것에서 생긴 것으로 넘어오는 삶의 가장 태초의 단계에 우리는 인간, 포유강 영장목 사람상과 사람과 사람속에 속하는 동물의 유전형질을 갖게 되면서 이 지구상 최강의 동물로 군림하게 됐다. 우리는 모든 세상을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고, 인간의 머리로 생각한다. "내 맘이지!"하는 유아적 사고로 100년 남짓한 세월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가 본 것, 느낀 것, 알고 있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니라 맞는 것이란 생각으로 그 삶을 꽉 채운다.

  물론 그런 이들만 있는 것도 아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책 제목을 떠올려보자. '참을 수 없는'이란 수식에서 어쩐지 경멸과 분노, 수치심과 같은 감정이 전해온다. 한편 '가볍다'는 것은 '존재'와 떨어질 수 없는 '존재''존재'로 만들어주는 성질처럼 느껴진다. 개인이 보고 느끼는 것을 격정으로 거부하고 의심하는 삶도 있을 것이다. 양극의 삶 모두 불행한 삶이다. 그런데 이 두 삶은 서로 다른 선물 상자에 포장되어 하루만에 우리 집 앞으로 배송되지 않는다. 이미 모두 아시겠지만, 이 두 삶을 양극단으로 하여 펼쳐진 스펙트럼 위를 우리는 부유하고 있다.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들께 시간을 낭비하게 하여 죄송하지만 그래서 삶은 그저 늘 불행할 뿐이다.

  얼마 전 끔찍한 독서 수준을 개선하기 위해 들어간 도서 판매 사이트의 베스트 셀러 차트에서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라는 책을 보았다. 그래서였는지 서점에 쇼펜하우어 책이 원래 이렇게 많았나 싶을 정도로 쇼펜하우어의 이름을 단 책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읽어도 아마 절대 그가 한 말을 온전히 소화할 수는 없을 테고 뭐라도 책을 읽고자 했던 마음에 상처만 입을 게 뻔하기 때문에 구매하진 않았지만, 이것만큼은 알고 있었다. 그도 산다는 걸 괴로운 것으로 생각했다는 점. 여기서 더 이야기를 꺼내면 내 밑천이 다 드러날 테니 분명하지 않은 것에 대해선 말을 줄여야 할 것 같다. 나는 전자보다는 후자의 삶에 더 가까운 사람인데 짧은 삶 동안 다수가 정의한 행복을 좇아 열심히 나아갔다고 자부한다. 그러다 최근 들어서 나는 행복을 좇은 것이 아니라 앞서가는 사람들의 등을 쫓았단 생각이 들었다. 나는 천천히 트랙을 따라 걸어가고 있다. 이대로 조금씩 트랙의 바깥쪽으로 벗어난다는 사명을 가슴에 품고.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고등학생 시절 교과서에 실린 김수영의 <>. 당시에 시를 분석하며 ''은 어떤 고통에도 꺾이지 않는 유연함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땐 이 내용은 단지 문제의 정답에 지나지 않았다. 매번 담이 오는 어깨를 주무르다가 문뜩 너무 힘을 바짝 준 채로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닌가 싶어졌다. 조금은 유연해지고, 조금은 너그럽게 살면 어떨까 싶었다. 그리고 오늘 이런 생각을 삶의 깊은 곳에까지 내재화한 듯한 우루시바라 유키 작가의 충사를 소개한다. 충사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존재 '레벌'가 존재하는 세계의 벌레잡이 '충사' 깅코가 만나게 된 인물들의 문제를 벌레를 잡음으로써 해결해 가는 옴니버스 형식의 만화이다. 깅코는 벌레로 갑작스러운 질병을 얻게 된 사람들을 치료해 주면서도 벌레를 '해충'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존재할 뿐이란 가치관으로 바라본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작가의 삶에 대한 통찰은 2'비가 온다, 무지개가 뜬다.' 편에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다고 생각한다. 깅코는 여느 때처럼 방랑하던 중 자신의 몸체만 한 독을 맨 남성을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는 무지개에 홀려 비만 오면 무지개를 좇던 아버지가 일종의 상사병으로 병상에 눕자 코로(虹郞) ( : 무지개 (홍)자에 사내 (랑)자를 쓰는 이름이다)라는 이름의 숙명을 느끼며 아버지께 마지막으로라도 무지개를 보여드리겠단 명분으로 무지개를 좇고 있었다. 이야기를 들은 깅코는 남자가 쫓는 것이 일반적인 무지개가 아니라 벌레인 무지개 뱀임을 알아차리고 남자의 모험(?)에 합류한다.

  함께 비가 오는 들을 달려 무지개를 찾으며 깅코는 마침내 대대로 마을의 다리를 만들어오던 집안에서 태어난 코로가 나무다리를 만드는 것에 전혀 재능이 없는 자신의 상황에 무력감을 느끼고는 자신의 쓸모를 찾고 있다는 진짜 방랑의 이유를 알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둘은 무지개를 만나게 된다. 코로는 아버지가 느꼈던 것과 동일한 황홀경에 빠져들게 되었으나 깅코 덕에 그 경계에서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깅코는 코로와의 연이 끊어져 버렸지만 '물살이 거칠기로 유명한 강에 물이 불어나면 다리의 판자 이음새를 떼어 물이 흘러가는 대로 둥둥 떠다니게 했다가 물이 빠지면 원상태로 돌려놓는흐름이 다리'가 생겼다는 소식만을 듣게 된다.

  가끔 우리는 모두 사라질 걸 알면서도 왜 모래성을, 돌탑을, 눈사람을 만들까 하고 생각한다. 이런 것들은 어쩌면 사라지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우리는 어쩌면 그저 우리가 존재하는 이 순간의 흐름대로 흘러가기 위해 이 지구에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내 인생이 정말 왜 이런지 모르겠어.'란 말이 절로 나올 만큼 인생이 힘들 때, 예쁘고 다정하고 고운 말로 건네는 위로보다 원래 힘든 거란 말이 위로될 때가 있다. 내가 느끼는 고통의 무게가 아무것도 아닌 게 되고 나의 잘못이나 나의 못남이 원인이 아니라 그저 지금 힘든 시간의 흐름 속에 있을 뿐이기 때문이라는 의미니까. 여기에 나온 이유 외에도 존재의 중심, 마음의 거리, 소속감과 같은 무형의 가치에 상처 입는다. 충사에는 이러한 가치를 유형의 형태로 그려내며 우리에게 텔레파시를 보내는 작품이 10권 안에 빼곡히 들어가 있다. 개인적으로 1권의 '부드러운 뿔'을 좋아한다.

  우리는 어쩌면 깨지고 바스러지고 잊혀지고 사라지기 위해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필진이미지

주다빈

만화평론가
2020 만화·웹툰 평론 공모전 신인부문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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