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슬픔
“세계는 아무래도 지금 매우 위험한 방향으로 가고 있는 듯하다.”(타카하시 신, 『세계의 끝에선 너와 둘이서(최종병기그녀 외전집)』, 금정 옮김, 대원씨아이, 2006, 22쪽.) 이 위험한 탈선에 전쟁도 한몫하고 있다. 2022년에 발발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은 전쟁이 단지 역사 교과서 속의 화석으로만 박제돼 있는 사건이 아님을 충격적으로 보여주었고, 여전히 보여주고 있다. 비단 우크라이나 내전뿐만이 아니다.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2003년 이라크 전쟁은 21세기 초반을 큰 혼란에 빠뜨렸지 않았던가. 심지어 최근에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고조되고 있는 전쟁의 기운까지 떠올려볼 때, 21세기가 ‘전쟁의 시대’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부분마저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인류의 역사 전체가 전쟁의 역사 아닐까? 그 어느 국가나 시대의 역사를 공부하든 전쟁 하나쯤은 꼭 다루어지지 않던가? 이언 모리스가 인류의 역사에서 평화를 이루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 전쟁이었다고 확언(이언 모리스, 『전쟁의 역설』, 김필규 옮김, 지식의날개, 2022, 12쪽 참고.) 하는 만큼, 전쟁은 우리네 일상에 침투한 ‘환경’이라 일컬어도 과장은 아닐 터이다. 당장 대한민국만 해도 북한과의 ‘휴전’ 상황에 놓여 있지 않은가?
그러나 휴전이라고 해서 단순히 휴전은 아니지 않은가. 북한의 끊임없는 위협과 도발, 그것들이 형성하는 사회적 혼란 자체가 개인의 내면에도 성가신 스트레스를 일으키지 않는가. 미국과 소련의 대치 분위기가 지구를 장악했던 때를 ‘냉전’ 시대라고 명명하는 것을 기억하자. 그런 의미에서 전쟁은 무기들의 물리력으로만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들 간의 미시적 관계에서 일어나는 전략적 상황들 자체를 전쟁이라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바가바드 기타』에서는 자아의 내면을 성찰하는 작업이 커다란 전쟁에 비유되기도 한다.
이 모든 사정을 고려할 때, 타카하시 신의 만화 『최종병기그녀』(필자 주 : 타카하시 신의 『최종병기그녀』 시리즈는 대원씨아이 출판사에 의해 외전집까지 포함하여 국내에서 8권의 단행본으로 출판된 바 있다. 그 단행본들이 발행된 연도가 조금씩 다르다. 그러므로 이하 이 글에서 각 단행본에서 내용을 인용할 때는 각주에 그 단행본들의 서지 사항을 별도로 밝히기로 하고, 단행본들 전체를 하나의 연속된 시리즈로서 뭉뚱그려 언급할 때는 권호를 표기하지 않고 ‘『최종병기그녀』’라 명명하기로 한다.)를 다시 톺아 읽는 작업은 각별할 수 있다. 『최종병기그녀』는 고등학생 커플 치세와 슈지의 알콩달콩하면서도 비극적인 사랑을 다룬다. 무뚝뚝한 남고생 슈지는 어수룩하고 마음 순한 여고생 치세와 사귄다. 그렇게 서로 사랑하고 있던 중, 일본은 전쟁에 빠지게 된다. 슈지는 폭격을 피하던 중에 치세가 일본 군대의 ‘최종병기’로 기계화되어버린 비밀을 우연히 목격하게 된다. 그 이후, 둘의 관계는 복잡미묘한 방향으로 빠져 버린다.
『최종병기그녀』가 전쟁을 다룬 만화로서 예리한 지점은 전쟁이 지닌 어떤 역설을 짚었다는 데에 있다. 전쟁은 역설적이다. 파괴하면서도 생산하기 때문이다. 이때, 파괴는 물리적 파괴요, 생산은 감정적 생산이다. 모든 것을 화마와 폭발 속에서 ‘파괴’해버리는 전쟁의 폭력 속에서도, 오히려 그런 폭력이 벌어지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감정이 흘러나온다.” (타카하시 신, 『최종병기그녀6』, 김정은 옮김, 대원씨아이, 2003, 273쪽.) 『최종병기그녀』는 파괴와 생산 중에서도 후자에 더 집중하는 경향이 짙다. 선하고 약한 여고생에 불과했던 치세가 일본군에 의해 “사신(死神)”(타카하시 신, 『최종병기그녀4』, 김정은 옮김, 대원씨아이, 2002, 127쪽.)으로 개조당하면서 치세와 슈지가 겪는 내면적 동요는 풍부하면서도 섬세하게 다루어진다. 사실, 이 만화의 거의 절반 이상이 (비록 그 이유가 명확히 밝혀지지는 않지만) 치세가 “‘불행한’ 생명체”(타카하시 신, 『최종병기그녀7』, 김정은 옮김, 대원씨아이, 2003, 227쪽.)가 되어버린 현실에 대한 감정의 혼란을 보여주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고 보아도 과장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 감정들이 흘러드는 곳은 결국 처연한 “슬픔”(타카하시 신, 『최종병기그녀6』, 김정은 옮김, 대원씨아이, 2003, 273쪽.)이다. 전쟁은 “마음 속 깊은 곳을 슬프고도 고통스럽게 한다.”(위의 책, 278쪽.) “살고 싶다”(타카하시 신, 『최종병기그녀2』, 김정은 옮김, 대원씨아이, 2001, 185쪽.)고 반복적으로 호소하면서도 전쟁터에서 “저를 죽여… 주세요.”(위의 책, 178쪽.)라고 말하는 치세의 부탁은 그녀의 괴로움의 크기를 짐작하게 한다. “가장 상처받은 사람은 치세”(타카하시 신, 『최종병기그녀1』, 김정은 옮김, 대원씨아이, 2001, 79쪽.)인 것이다. 치세가 그런 사람임을 알아보는 이는 슈지이다. 그렇다면 슈지에게는 어떤 고민이 있을까?
슈지는 자신 “안의 성(性)과 사랑, 동경심과 상심”(타카하시 신, 『최종병기그녀5』, 김정은 옮김, 대원씨아이, 2002, 231쪽.)을 격렬하게 앓는다. 청소년들의 사랑을 다룬 순정만화로서도 『최종병기그녀』를 눈여겨볼 지점이 바로 이 지점이다. 이 만화에서 미성년자들의 사랑이나 성관계를 오락물로 소비하게끔 유도하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종병기그녀』는 남녀의 육체적 관계를 곧바로 시각적 쾌락으로 즐기게끔 이끄는 단순 외설 만화로부터 구분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사춘기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루는 과정에서 성에 대한 미성년자의 호기심과 갈망이 그 과정의 부분으로서 상당히 자연스레 녹아드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들의 성관계는 전쟁과 같은 극한 상황 속에서 서로의 사랑을 어떻게든 확인하고 공유하기 위한 궁여지책이었을지도 모른다.
끝내 그 둘의 여린 알몸을 감싸고 있는 것은 커다란 슬픔이다. 슈지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안타까워한다. “분명 나와 치세의 마음 속을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 크기나 아픔, 또는 안타까움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타카하시 신, 『최종병기그녀3』, 김정은 옮김, 대원씨아이, 2001, 52쪽.) 괴물 병기로 개조되어버린 한 소녀. 그 소녀의 운명을 슬퍼하는 한 소년. 이 어리디어린 아이들의 슬픔에 감응하는 슬픔, 『최종병기그녀』는 그런 것을 민감하게 벼리는 데에 특화된 병기이다. 이 병기가 세계를 위태로운 쪽으로 탈선시키는 전쟁에 대항할 수 있는 최종병기임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