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의 뿌리
맑스 뿐만 아니라 들뢰즈, 가타리, 프롬 등 수 많은 철학자가 자본주의를 비판했으며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은 분명히 그만큼이나 존재하지만, 사실 이즘(ism)이 존재하는 어떤 국가든 간에 문제는 존재할 수 있다. 국가는 우리가 속해 있다고 인식하는 단체 중 가장 큰 단체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국가 단위로 세계가 운영되는 지금 지구촌은 아직 먼 말처럼 느껴진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 국가 단위의 가스라이팅에서 개인이 찾을 수 있는 정체성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더 넓은 단체에 헌신할 때 개인은 더 큰 사명감을 갖게 되지만, 그만큼 단체가 클수록 개인의 헌신은 공허하다. 거대한 단체에게 개인이라는 톱니바퀴는 언제나 대체 가능하기에 그만큼 개인을 소모적이고 비인격적으로 대할 가능성이 크다.
펠릭스 가타리는 그런 면에서 국가는 반생산적이며 억압의 기계로써 주체를 방해한다고 설명한다. 국가는 그 자체로 예속적 집단으로 주체가 추구해야 할 궁극적 의미에 접근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러한 국가에 헌신한다는 것은 주체가 자신의 정체성을 국가에게 맡겨 스스로를 사회적 신체인 ‘소키우스Socius’로 구성하는 것이다. 이때 주체의 내적 갈등은 소키우스로서 부여된 역할과 자신의 주체적 역할을 끊임없이 수정하는 유목민적 정체성, ‘노마드Nomad적 역할’ 사이의 길항으로 나타난다. 이 끊임없는 갈등은 무척이나 무겁고 어려워 보이지만 <정보전사 202>(이하 <202>)와 함께라면 충분히 재미있게 이 갈등을 이해할 수 있다.
<정보전사 202>는 북한에서 내려온 남파공작원 리영희가 자본주의에 빠져들어 살다가 북한 수뇌부에 복수하려는 전 공작원들과 맞서 싸워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게 되는 이야기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각 인물들의 사상이 아니라 그 특정 사상이 주입당한 대상들이다. 주요하게 다뤄지는 인물들은 사상적 속내를 남에게 털어놓거나 회상을 통하는 등 여러 방식을 통해서 드러낸다. 이 사상적 속내가 바로 그 인물이 살고 있는 사회의 이데올로기를 여실 없이 드러내기에 작품은 그 개그 코드에 직조하듯 숨겨진 사상 코드를 찾는 재미뿐만 아니라 사상이 주입된 자들의 내적 긴장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예를 들어, 리영희가 ‘키요’로 활동할 때 남파공작원처럼 흉내 내는 것은 자신의 소키우스를 노마드적 주체에 잘 녹여낸 예시 중 하나다. 육체적인 전투력은 갖추어졌으나 사상이 무장되지 못한 상태에서 대한민국에 남파된 간첩 리영희는 부상으로 인해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다시 현장에서 뛰고자 하는 국정원 블랙 요원 최민수와 강연에서 엮이게 된다. 리영희와 최민수 모두 국가를 위한 조직에 소속되어 있지만 둘의 사상은 사뭇 다르다. 북한의 사상을 따르기보단 남리숙의 인정을 원한다는 점에서 리영희의 세뇌는 사상적 세뇌와는 다르다.
리영희의 인정 욕구는 행동의 원동력이다. 특이한 점은 리영희의 인정 욕구가 남리숙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대중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대중에게 널리 자신을 알리는 인터넷 방송은 리영희에게 자신의 주체성을 명확히 할 수 있는 안성맞춤의 직종이다. 인정 욕구의 주요 대상이 남리숙임에도 리영희가 주체성을 잃지 않았던 것은 의존 대상이 하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후에 최민수에게도 인정받고 싶어하지만, 그것이 의존이 아니라는 점에서 모든 하나의 대상에 매몰되지 않는 리영희의 욕구는 주체를 건강하게 만든다. 다시 말하면 진정한 주체성의 형성은 하나에 집착하지 않는 방향성, 고정되지 않는 형태로 나타나는 뿌리인 것이다.
그에 비해 최민수는 세뇌를 받지 않고서도 국가에 맹목적인 경향이 있는데 이는 이전 국정원이었던 아버지에 대한 감정뿐만 아니라 자신의 정체성 그 자체를 국가에게 맡긴 것이기도 하다. 즉, 개인의 주체적 역할로 보자면 리영희가 최민수보다 주체적인 삶을 살고 있다. 사회주의에서 살다온 리영희의 삶이 자유주의에서 사는 최민수의 삶보다 자유롭다는 아이러니를 고려할 때 노마드적 주체성은 사상에 따른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달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정원의 사상에 매몰된 최민수는 리영희를 같은 주체가 아닌 이용의 대상으로 보고 명령한다는 점에서 남리숙과 비슷한데, 리영희와 함께 작전을 수행하며 리영희를 존중하고 놔주는 방향으로 노선을 전환한다. 이 과정은 최민수가 스스로 바뀐 것이 아니라 리영희가 최민수에게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노마드적 주체가 소키우스를 바꿀 수 있는 영향력을 시사한다.
두 인물 뿐만 아니라 리동일과 차가윤과 같은 인물 또한 남리숙과 차병준과 같은 주요 인물의 인정 욕구로 인해 비뚤어진 인물로 등장한다. 더 나아가 강경주 또한 사상에 매몰되어 자신의 사상을 대중에게 강요하는 위험한 인물로 그려진다. 흥미로운 전개는 상대를 조종하는 지배자적 역할로 등장하는 북한의 남리숙과 남한의 강경주가 최민수와 리영희에 의해 지배자의 역할을 그만둔다는 점이다. 양측 사상의 대표적인 인물들이 최민수와 리영희라는 각 소속원에 의해 사상의 강요를 포기하는 점은 인간성이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야 하는 지점을 만들어준다. 개인은 사상 밑에서 비호받아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상 밑에서 돌아다녀야 하는 존재임을 깨달은 것이다. 사상은 그저 바탕일 뿐 개인의 세부사항을 결정할 권리가 없다. 대신 개인은 그 사상 위에서 뛰어놀 권리가 있는 만큼 자신이 정하는 사항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사회 속에서 개인의 역할은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다. 또한 그런 과정은 중요하다. 서로에게 영향을 받는 것은 전제되어야 한다. 흔들리며 꽃이 피듯 리영희가 주변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은 남리숙과 최민수 등의 인물에게 영향을 받으면서도 본인의 주체성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전보다 훨씬 정보가 다양해지고 은밀하게 들어오는 인터넷 사회에서 사상은 공기 중 습기처럼 스며든다. 인터넷 유목민적 주체인 우리는 어디에 뿌리를 내려야 하는가. 어떤 사상에 의해 은밀하게 영향을 받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한 영향 속에서 우리는 리영희처럼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