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영국의 철학자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는 세 가지 직군으로 현대사회를 진단한다. 관리자(Manager), 미학자(Aesthete), 그리고 심리치료사(Therapist)가 그것이다. 그에 따르면 효율성이 중시되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영역은 이러한 외부의 전문가에 의해 관리된다. 개인의 내밀한 고민이나 심리적 문제는 이제 가까운 관계들을 통해 함께 고민되고 해소될 영역이 아니라, 심리치료사처럼 그 사람의 일상과 거리를 둔 전문가에 의해 일방적으로 관리되고 치료되어야 할 영역이 되었다.
<펀치드렁커드>(이하 <펀치>)의 주인공 ‘도민수’는 매킨타이어의 진단에 정확히 부합하는 인물이다. 그는 정신건강 유튜브를 통해 불특정 다수의 시청자들에게 위로와 도움을 주는 정신과 의사이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기대하고 막상 병원을 찾아온 환자들은 도민수가 자신에게 전혀 공감해주지 않고 기계적으로 뻔한 말만 한다며 실망한다. 그에게 있어 ‘타자’는 ‘환자’가 되어 효율적으로 관리되어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고, 도민수 자신은 누구의 도움 없이도 그것을 잘 해낼 수 있는 치료 기계가 된다.
<펀치>는 그런 도민수가 병원 환자들과 야유회를 떠났다가 갑작스러운 폭설에 의해 휴게소에 고립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이 휴게소에는 도민수를 포함한 병원 측 인물들을 비롯해 우연히 머물고 있던 일반 시민들까지 여러 인물들이 함께 발이 묶이게 된다. 제한된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여러 군상들의 모습은 <오징어게임>이나 <기생충>처럼 한국사회의 우화적 축소판이라 할 만하다. 다만 앞의 작품들이 돈이나 생존, 계층을 둘러싼 갈등의 구도를 표방했다면, <펀치>는 정신질환을 중심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 정상과 비정상의 구도로 갈등이 진행된다.
이러한 구도를 갖춘 작품들이 흔히 그렇듯이, <펀치> 또한 장애인에 대한 비장애인의 혐오와 편견으로 시작하여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적절한가?’, ‘비장애인에게는 과연 장애가 없는가?’하는 질문들을 던진다. 누군가에겐 식상한 주제의식이라서, 혹은 장애나 장애인이 내 실생활과는 동떨어진 영역이라서 별 감흥이 없을 수 있다. 하지만 <펀치>는 이 질문들을 2020년대 한국 사회와 맞닿아 있는 캐릭터와 대사로 풀어냄으로써 강력한 실제성을 발휘한다. “요즘 정신병자들 범죄 뉴스가 좀 많아?” 같은 대사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기시감을 느끼겠지만, 가장 눈여겨보게 되는 지점은 SNS, 커뮤니티 같은 인터넷 매체와의 연결고리이다.
작품에서 인터넷 사용이 힘든 환자 일부를 제외한 청년 이하의 인물들을 장애 여부를 막론하고 모두 크고 작은 정도로 인터넷과의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크게는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낸 커뮤니티 중독의 남성부터, 좀 더 작게는 SNS로 불특정 다수와 성적인 관계를 맺는 여성, 자신이 웹툰의 주인공처럼 이세계에 전생한 캐릭터라고 생각하는 고등학생 등이 있다. 이를 보며 알 수 있듯 인터넷은 자아를 현실로부터 도피시키는 자아 분열의 수단으로 작동한다. 주인공 도민수 또한 “여러분 곁에 있는 정신과 전문의”라고 소개하는 유튜브 속의 자아와, “저는 사람이 싫습니다”라며 고통도 인내도 홀로 해소하려는 현실의 자아로 분열돼있다.
사실 도민수의 이러한 분열은 그의 공황장애에서 기인한다. 매킨타이어의 진단처럼 오늘날 심리치료사는 환자(내담자)와의 거리를 확보한 채 환자의 문제를 해결해야 할 전문가인데, 치료사 자신이 질환을 갖게 되면서 ‘의사’라는 정체성이 혼란스러워진 것이다. ‘환자’로서의 정체성을 받아들일 수 없던 도민수는 아무에게도 공황에 대한 사실을 밝히지 않은 채 과량의 알콜과 약으로 현실도피한다. 그러던 중 중반부에 이르면 비장애인 집단 쪽에서 핵심적인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때 어떤 선택을 하며 내뱉은 도민수의 대사는 그의 분열되고 불안한 정체성에 변화가 생겼음을 암시한다.
“제가 늘 입버릇처럼 환자분들께 말씀 드리는 게 있습니다. 낫기 위해선 나아져야 한다고. 그렇기에 전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아직은 자신을 직접적으로 환자에 등치시키진 않지만, 적어도 자신을 ‘나아져야 할 존재’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기점으로 도민수는 처음으로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말을 하게 되고, 더 나아가 모든 사람 앞에서 자신에게 공황이 있음을 힘겹게나마 고백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한 명의 내적 변화와 그 선택은 도민수 한 명의 나아짐에 그치지 않는다. 환자들에게 정죄와 혐오, 무관심으로 선을 그으며 자신(우리)은 치료가 불필요한 정상이라고 믿어왔던 일반 시민들은 그러한 믿음과 방어기제를 조금씩 벗겨내며 자신과 타인에게 점점 솔직해져 간다.
개인적으로는 도민수의 변화를 기점으로 중·후반부 인물들의 내적·외적 변화 과정에서 서사가 빈약한 점이 아쉽긴 했다. 고태호의 전작 <당신의 과녁>에서도 폭풍 같은 전반부가 지나간 후에 중반부는 서사보다 캐릭터들의 휴머니즘에 집중한 측면이 있었는데, 그럼에도 <당신의 과녁>은 전반부에 형성된 거대한 긴장이 결말까지 꺼지지 않고 유지된 반면 <펀치>의 후반부는 서사와 긴장이 함께 사그라든 감이 없지 않다. 도민수가 시민 한 명, 한 명을 만나 전하게 되는 메시지도 전반부에 전달해온 메시지에서 크게 새로울 것은 없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 중·후반부가 특별한 이유가 있다면, 첫 번째로 도민수의 메시지가 학습을 통한 기계적인 메시지가 아닌 경험을 통한 진심 어린 메시지라는 점이다. 도민수는 시민들 자신은 모르고 있던 병리적 증상들에서 자신의 병리적 증상을 발견하곤 자신의 삶을 기초로 메시지를 전한다. 의사와 환자, 상담자와 내담자의 관계가 아닌, 환자 대 환자의 관계로 다가가기 때문에 시민들은 그의 메시지에 마음을 열게 된다. 더 특별한 점은, 후반부에 이르러 아픔을 공유하고 메시지를 전하며 변화를 이끌어내는 역할이 환자와 시민들 상호간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전문가를 찾아가 일방적으로 치료받아야 할 영역이 일상의 삶과 이웃과의 관계로 돌아와, 매킨타이어 식으로 말하면 ‘공동선을 추구하는 공동체주의’로 나아간 것이다.
지막으로는, 이러한 치유와 회복의 확장성이 작품 속 인물들을 넘어 독자들의 삶에 가닿았다는 점이 특별했다. <펀치>의 댓글들에선 작품 속 메시지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며 그들의 변화가 아닌 나의 변화로 가져오려는 반응들을 엿볼 수 있다. 이는 앞서 SNS나 커뮤니티 같은 10~30대 독자 대상 현실 밀착형 캐릭터·대사 덕분이기도 하겠고, 한편으로는 오늘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얼마나 숨기고 왜곡시킨 채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방증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실제로는 <펀치>의 등장인물처럼 며칠만에 병리적 증상이 회복되긴 불가능에 가깝고, 웹툰 한 작품을 본다고 해서 실제적인 삶이 변화하길 기대하는 것도 쉽지 않다. 하지만 일시적인 즐거움이나 힐링의 도구로 소비되는 웹툰이 아닌 <펀치드렁커드>가 보여준 시의성과 쌍방향 소통성이라는 웹툰의 강점이 계속해서 활용된다면, 나는, 우리는 분명 더 나아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