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에 완성이 있을까
'나기'는 정상적이고 일반적인 삶을 살기 위해 늘 주변의 눈치를 보며 스스로를 단속하던 사람인데, 한순간 한계에 몰려 과호흡을 겪는 것을 계기로 변화를 작정한다. 갑작스레 퇴직을 결심한 뒤 물건도 관계도 처분하고 도심의 번듯한 투룸(2LDK)에서 교외의 단칸방으로 이사한다. 새벽 4시라도 일어나 매일 한 시간씩 강박적으로 펴던 지독한 곱슬머리도 타고난 그대로 내버려두기로 한다. 이사한 곳에서 엉뚱하지만 친절한 이웃들을 만나며, 그럴싸하지만 허울뿐이었던 자리에 겪어보지 못한 일들이 들어차기 시작한다.
여기까지만 쓴다면 느긋하면서도 의욕적인 힐링물의 전형처럼 보인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기의 휴식>(코나리 미사토)은 그렇게 보송보송한 작품이 못 된다. 나기는 퇴사 후의 멋진 삶을 기대하며 써 내려가려던 버킷리스트에 하루 종일 아무것도 채워 넣지 못해 패닉에 빠지고, 모험하듯 용기를 쥐어짜 다가간 신비로운 이웃 남자 '곤'과 그저 문란한 시간을 보내며 주변의 걱정을 산다. 작품이 그리는 모든 순간이 줄곧 그런 식이다. 사소한 일 하나하나에 용기를 내고 그로 인해 찾아온 변화가 보상이라도 되는 듯 기뻐하지만, 몇 페이지 지나지 않아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잘못 계산된 채솟값에 난생처음 항의한 네게 의외로 직원이 친절했다고 해서 세상 모든 일이 정말로 친절할 줄 아냐고,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힐링'을 기대했던 건 나기만이 아니라 휴식이란 제목에 모여든 독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귀여운 그림체에 어울리지 않는 냉정할 정도로 현실적인 태도에 배신이라도 당한 듯 어안이 벙벙해지고 만다.
긍정적인 사람이라면 <나기의 휴식>을 읽고 좋은 쪽으로 결론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좋은 일 뒤에 반드시 좋지 않거나 나쁜 일이 오고 그 패턴이 반복된다는 건, 부정적인 일 뒤에 긍정적인 일이 일어나는 것도 틀림없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물의 반이 남은 컵을 두고 논하는 심리테스트처럼, 작품이 그려내는 구불구불한 사건의 연속은 읽는 이에 따라 좋게도 나쁘게도 읽힐 수 있다. 물론 나의 경우 언제나 물이 반'밖에' 안 남았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나처럼 타고 나길 부정적인 사람이 아닐지라도, 절실히 쉼을 찾아 <나기의 휴식>을 찾은 독자라면 지금은 한껏 갈증이 난 상태가 아닐까. 너무 목이 말라서 순순히 기분 좋은 격려를 꺼내 들길 기대했다면 역시 이 작품은 조금 짜증스러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구태여 이렇게 리뷰를 쓰고 있는 것은 그럼에도 <나기의 휴식>의 그 순순하지 않은 방식이 주는 독특한 위로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나기뿐만 아니라 작품에 나오는 인물들 모두가 어딘가 좀 이상하다. 서로에겐 정상적이고 멋있기까지 한 인물들이 들춰보면 하나같이 어딘가 잘못되어 있다. 타고난 사교성으로 완벽한 사내 인기남인 나기의 전 연인 '신지'는 사실 나기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잃어버릴 만큼 주변에 맞출 줄밖에 모르는 사람이다. 나기와 문란한 시간을 보냈던 이웃 남자 곤도 누군가를 애착하는 마음 자체를 이해하지 못해 나기를 좋아하는 자신을 뒤늦게야 깨달을 정도로 감정에 서툴다. 실패한 인생을 받아들이지 못해 자신의 꿈을 나기를 통해 이루려는 나기의 엄마 유우도, 명문대를 나왔지만 자신이 없어 다단계 팔찌에 의지하는 구직자 이치카와도 마찬가지다. 다들 따져보면 멀쩡하다 말하기 어렵고 그 허점과 약점들이 쉽게 변할 것 같지도 않다. 그게 위로가 되었다고 말하면 나 역시 멀쩡한 인간은 아니라는 건데, 그게 그렇게 위로가 되었다.
근래 원하든 원치 않든 휴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뭔가를 할 수 없는 상태라는 것을 뭔가를 할 수 없게 되고서야 깨달았고, 깨닫고 나니 정말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서 괜찮아지라는 말을 듣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 만화 한 편을 볼 때도 내심 회복 같은 게 나올까 봐 벌벌 떨었다. 대개 이야기라는 건 사건을 완성하며 마무리되고 마니까. 같은 자리에서 환부를 확인해 놓고 나만 두고 눈 깜짝할 새 회복의 나라에 도착하는 이야기들이 매정하게 느껴졌다. 과잉 해석이고 피해망상이란 걸 알면서도 그랬다.
<나기의 휴식>을 읽는 동안은 이야기에 마음 놓고 머물 수 있었다. 엉망진창으로 헤매고 망치는 인물들을 보며 밀려드는 위로가 있었다. 특정 인물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어떤 면모에서 내가 읽혔다. 바보가 나만은 아니었다는 빤한 사실도 위로가 되었지만, 가장 위로가 된 사실은 따로 있었다. 어쩌자고 그러는 건가 싶을 정도로 대단히 망가뜨린 뒤에도 날들은 이어지고, 사건은 계속되고, 사람들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렇게 새로 시작되는 날에도 또 다른 무언가를 망치고 만다는 것. 하염없이 이어지는 사실의 연쇄가 그렇게 위로가 되었다. 결국 아무 회복도 변화도 없는 채로 이야기가 끝난다 해도 좋을 만큼. 찬찬하지만 선명하게 스며오는 위로였다.
모든 휴식이 반드시 교훈을 동반하는 건 아니지만, <나기의 휴식>은 작은 깨달음을 주었다. 그동안 내가 이야기가 주는 '진짜' 회복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으며, 글쓰기 역시 언제나 나아지기 위해서 써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기의 휴식>을 절반 넘게 읽을 때까지도 나는 이런 착각된 회복과 성장이 아닌 '진짜'가 있을 거라고, 그게 이 이야기의 종착점일 거라고 무의식중에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야기를 보는 내내 무언가를 막연히 기다리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나기의 휴식>이 여태껏 보여준 '현실'적인 태도를 떠올린다면 그런 근사한 종착지는 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이 만화를 읽는 동안은 그 냉정한 사실이 절망스레 들리지 않는다는 게 신기하다.
참고로 현실에 근사한 종착지가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는 근거는, 각자의 삶을 참고하면 될 것 같다. 적어도 나는 물이 늘 반'밖에' 남지 않는 사람이어서 멀리 갈 것 없이 이곳 디지털만화규장각에 써왔던 리뷰들이 말해준다. 지난 계절이 지치고 힘들었단 글을 벌써 몇 번째 쓰고 있는지. 이쯤 되면 내 직업이 규장각에 리뷰를 빙자한 낙심 일기 쓰는 사람인가 싶어 환멸감이 들 정도다. 정말 징글징글하다.
그러니 회복도 완성도 없이 이 글은 여기서 마치겠다. 어설프지만 그런 인생이 있듯 그런 글도 있다는 것을, 이번 휴식을 통해 배웠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