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꺼비집>: 아이들의 밀실 스릴러
<두꺼비집>의 도입부는 비를 피하러 들어간 산속의 집에서 어느 부부가 귀신을 목격하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장면이 전환되며 누군가의 신고에 의해 찾아 온 경찰에게 보육원의 원장이 “보육원을 나간 아이들”을 설명한다. 아이들은 총 5명으로 우택과 장미는 고등학생, 고흐와 바닐라, 캐러멜은 초등학생처럼 보인다. 이들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피해 도망 다니면서 “안전하게 먹고 잘 수 있는 집”을 찾는다. 그리고 초반에 나온 산속의 집을 발견한다.

산속에 덩그러니 놓인 이상한 집, 위화감을 불러 일으켰지만 5명의 아이에게는 비를 피할 곳이 필요했다. 새벽에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두드리지만 반응이 없다. 사람이 없다는 확신 하, 창문을 깼지만 뒤쪽에 시멘트가 두껍게 발려 있어 출입이 불가하다. 이때 이상행동을 보이던 캐러멜이 갑자기 땅을 파더니 열쇠가 나오고, 일행은 집에 들어간다. 정원은 전혀 관리되지 않는 듯보였으나 실내는 깔끔한 집, 일행의 뒤에서 서 있다 갑자기 사라지는 귀신, 빈방에서 나는 덜컹 소리, 얼굴에 빨간 무언가가 묻어 있는 성모 마리아상 등은 이 집에 모종의 사연이 있을 것만 같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 집의 현관문은 닫히면 자동으로 잠기는데, 열쇠가 있어야만 안에서도 밖에서도 출입이 가능하다. 열쇠가 없으면 그대로 집에 갇히는 환경, 완벽한 밀실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쩌다 집에 갇히게 되는 걸까. 안에서 어떤 일이 펼쳐질 것이며, 무사히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두꺼비집> 특유의 딱딱하고 각진 인물 작화는 마네킹처럼 보여 기괴함은 배가 된다. 또한 귀신과 악마가 튀어나오며 빙의, 폴터가이스트 현상 등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이 모든 게 도입부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한눈에 장르 파악이 가능한 작화, 연출과 장치들을 이렇게 자연스럽게 담아낸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스스로 걸어 들어간 밀실
파국의 원인을 단 하나로 꼽을 수 있을까. 아닐 테다. 파국이란 몇 개의 우연으로 인한 균열,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선택과 행동 등이 겹쳐 만들어진 최악의 상황일 것이다. 웹툰 <두꺼비집>은 아이들이 ‘산속의 집’에 갇히게 되면서 겪는 기현상을 주된 서사로 하는데, 각 주인공의 과거가 구체적으로 등장하고 밀실에서의 에피소드와 연결된다.
클리셰라 할 수도 있지만 궁금증을 유발하는 스릴러의 연출이 빼곡한 작품이기에 매 회차 색다른 긴장감을 전하는 게 <두꺼비집>의 묘미이다. 이에 줄거리에 대한 설명보다도 주인공이 미성년인 ‘아이들’이기에 생긴 특이점과 시사점에 대해 말하고 싶다. 앞서 언급한 갑자기 사라지는 귀신, 빈방에서 나는 덜컹 소리, 얼굴에 빨간 무언가가 묻어 있는 성모 마리아상 등이 모두 전체 서사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요소들이기 때문에 자칫 스포일러가 될까 조심스러운 면도 있다.
미성숙한 아이들의 스릴러
나름의 사정이 있었지만 결국 “보육원을 나간 아이들”은 산속의 집이라는 밀실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 경계심은 경험의 총량과 비례하기 마련이라 비가 내리고 배가 고픈 상황에서 모처럼 찾은 집을 외면하긴 어려웠을 테다. ‘아이 같다’는 표현이 있다. 좋은 것에 온전히 기뻐할 줄 아는 순수함, 세상 물정에 어둡고 시야가 좁다는 어리석음의 의미가 혼용되어 쓰이는 줄로 안다.
그렇다면 아이와 어른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아이는 한창 배우는 단계이며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칭찬받는 시기이므로, 주어진 일을 잘하는 것, 조금 더 고민하여 묻고 싶은 걸 묻는 것조차도 성과가 된다. 주변의 상황에 적응하는 데 무게를 두고, 적절한 통제와 규제를 비롯한 훈육을 받게 되면서 사회적 규율과 가치를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역할이 늘어난다. 익혔다면 활용할 줄 알아야 하고, 주어진 일 이상의 것들을 해내야만 성과가 된다. 타인을 포함한 주변의 상황을 아우르며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가치를 찾을 줄 알아야 하며, 내재한 사회적 규율과 가치에 따라 참을 땐 참고 견딜 땐 견디는 성숙함을 가져야 한다. 아이는 세상의 기준을 온전히 자신에게만 두는 반면, 어른은 세상의 기준을 이해함과 동시에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역량을 함양해야 한다. 나이를 먹고 성인이 된 어른에게 ‘아이 같다’는 말이 욕처럼 들리는 이유란 덜 성숙했다는 말로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두꺼비집>의 주인공인 “아이들”에게 주어진 별도의 사연은 세상의 기준을 온전히 자신에게만 둔 자기합리화의 결정체처럼 읽힌다. 가장 먼저 사연이 소개되는 캐러멜은 귀신을 보는 소년이다. 가문 대대로 귀신을 보거나 씌는 영적 체질을 타고났지만 캐러멜은 귀신과 사람을 구분하지 못하고, 본인에게 닥친 사고와 불행을 명확하게 인지할 능력이 없다. 좋은 건 좋고, 모르는 건 여전히 모르는 자신의 입장에서 주변을 보니, 주변은 온통 이해할 수 없는 것투성이다. 초상집에서 웃고 떠드는 아이는 의도가 없을 테다. 단지 이해하지 못했기에 당장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개인적인 고통의 확대 해석
나름의 아픔 없는 사람이 있을까. 아픔의 기준은 주관적이라 절대적인 불행은 없겠지만, <두꺼비집>의 등장인물들은 그 ‘주관’적인 고통에 초점을 맞춘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이해는 덮어둔 채 스스로의 염원과 고통만을 조명하니 기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파국의 원인은 다양하다. 그러나 거기서 본인의 행동과 선택을 쏙 빼면 성찰은 제 기능을 할 수 없다. 성장이란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일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두꺼비집>의 주인공이 미숙한 아이들이라는 점을 비롯하여 이들 주변 어른마저도 포용력이 부재하다는 점은 불편함의 강도를 높인다.

과오를 잊지 않고 가슴에 새기며 더 나은 삶을 사는 모습을 보이는 게 거의 모든 서사가 성장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리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 과오를 시간으로 무마하고 본성을 외면하지 못한 채, 다시 또 같은 선택을 하면서 막장을 보게 된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변화는 실패하고, 그렇기 때문에 똑같은 불행을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다. 개인적인 고통을 확대하여 해석하며 물고 늘어진다면 그 결말은 파국뿐이다. 타인의 고통을 들여다 보며 상황을 이해하는 시도는 파국을 피할 유일한 방법이다. 협력은 의존이 아닌, 본인과 타인의 입장을 구분하면서 포용할 때 비로소 가능하다.
<두꺼비집>은 고통을 확대 해석하는 편협한 개인들이 모이면 어떤 파국이 생기는지 집요하게 묻는 스릴러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의 과거사가 어느 정도 풀렸고, 다시금 수수께끼의 집에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한 시점인 현재, 완결까지는 아직 제법 남은 듯 보인다. 특정 장소를 무대로 공멸할지, 협력을 통해 성장하여 고난을 헤쳐 나갈지 이들의 행보가 궁금하다. 귀신도, 악마도 나오고, 그보다 더한 사람도 나오는 스릴러 <두꺼비집>의 결말을 함께 들여다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