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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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사소한 타임슬립, <이발소 밑 게임가게>

이발소 밑 게임가게(하일권, 네이버웹툰) 리뷰

2025-06-08 구자준

이토록 사소한 타임슬립

『이발소 밑 게임가게』, 하일권

시간의 틈새를 엿보는 것은 언제나 나/우리의 삶이 지닌 가능성에 관해 묻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지금껏 겪지 못한 다른 시간으로, 혹은 무심결에 지나쳐버린 과거의 어느 한순간으로 향했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가깝거나 먼 과거를 왕복하며, 우리는 어느덧 우리와 멀어진 시간과 기억들 사이를 잇는 마음의 길을 새롭게 만든다. 말하자면 타임슬립은 지금은 지워진 다양한 시간과 기억을 지금 여기로 소환하는 장치로서 기능하는 장르이기도 하다.

그러나 시간의 미끄러짐을 통해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일조차, 이제는 익숙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진부하기까지 한 장르적 관습이 되었다. 완전히 새로운 삶을 약속하는 회빙환과 같은 모티프가 일상화된 요즘, 타임슬립에 관한 관심은 예전보다 주춤한 것처럼 보인다. 단지 과거를 살짝 비트는 것을 넘어, <재벌집 막내아들>처럼 과거로 돌아가 존재하는 모든 가능성을 독점하는 것이 지금의 독자와 관객에게는 더 매력적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다시 1990년대로의 타임슬립을 시작하는 <이발소 밑 게임가게>의 설정은 오히려 새롭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사실 1990년대 역시 최근의 다양한 문화적 재현에서 빈번하게 소환되는 시기이다. 30·40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신세대의 공간이자 현재 한국 사회의 가장 가까운 기원인 동시에, IMF로부터 자유롭거나 아직 IMF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 순진함이 남아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타임슬립을 소재로 하는 무수한 작품에서 인물들은 유년기의 1990년대로 돌아가 곧 닥칠 가족과 친구의 비극을 막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이발소 밑 게임가게>는 시간여행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객관적 조건을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신, 무수한 제약 속에서 만들어 낸 사소한 변화들이 지닌 의미가 무엇인가 성찰하는 데 집중한다. 타임슬립 소재를 활용한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이발소 밑 게임가게>의 주인공 도준은 가족과 친구의 비극을 막고 사회를 구원하기 위해 시간여행을 떠나지 않는다. 단지 자신이 왜, 어떻게 하다가 어린 시절의 친구 효주와 게임을 시작하고 그만두게 되었는지를 확인하고자 할 뿐이다.

슬럼프에 빠져 본가에 내려온 소설가 도준은 낡은 오락기에서 레트로 게임을 하다가 우연히 타임슬립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한다. 다만 도준에게 주어진 타임슬립의 기회는 제한적이며, 바꿀 수 있는 것도 많지 않다. 어떤 시간과 장소로 돌아갈지조차 알 수 없으며, 과거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 역시 고작 10분에 불과하다. 도준은 새로운 게임팩을 사고, 효주와 함께했던 플레이스타를 왜 그만두게 되었는지 확인하고, 효주를 모욕한 친구에게 주먹을 날린다.

물론 그 모든 일을 겪고 나서도 지금의 도준과 효주의 처지가 바뀌지는 않는다. 도준은 여전히 슬럼프에 빠진 소설가이고, 효주 역시 공황 증세로 인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오래된 게임 가게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사랑한 그 시간들을 다시 기억했다는 것,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 자체이기도 하다. 게임만 하며 무의미하게 보낸 줄 알았던 유년기의 시간들이, 친구들과 함께 두근거리는 모험의 세계로 떠난 시간으로 새롭게 기억된다. 기억의 재구성이야말로 이들에게 다시 일어날 힘을 주는 사소하지만 중요한 변화다.


물론 게임의 즐거움과 가치를 단지 과거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작품 속 현재(2010년대 초반) 시점에서도 게임은 여전한 매력으로, 우리를 새로운 모험으로 이끈다. <이발소 밑 게임가게>는 타임슬립과 함께 도준의 동생 미소가 플레이스타에 입문하며 레트로 게임에 빠지는 과정을 교차하여 보여주면서, 무언가에 대한 기억을 더듬는 일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과도 그렇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게임은 1990년대와 2010년대의 나, 그리고 현재의 나와 주변 사람들을 연결하는 매개이기도 하다.

이처럼 <이발소 밑 게임가게>는 앞만 보고 나아가다가 넘어진 사람들이 다시 서로를 다독이며 살아가는 하일권 특유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무채색의 공간 속에서 게임을 통해 처음 찬란한 무지갯빛을 마주한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하일권은 우리가 잠시 옆으로 눈을 돌렸을 때 얼마나 아름다운 세계의 풍경을 목격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1화의 무지개(가독성을 위해 이미지를 90도 회전하여 수록함)

7화에서 처음 도준이 오락기를 통해 타임슬립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독자들은 장르의 변화에 놀라워하며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궁금해했다. 하일권은 독자들의 기대를 충분히 충족시키면서도 장르의 공식에 먹히지 않는 이야기로, 멀어진 두 시간을 잇는 장르 본원의 의미를 충실하게 살려낸다. 게임에 몰두했던 유년기의 시간이 어린 시기의 의미 없는 기억으로 치부되는 대신, 단순할지언정 나와 우리에게 앞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는 용기와 기쁨을 가르쳐주었던 시간으로 새롭게 의미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껏 우리가 지나친 시간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야말로, 이토록 사소한 타임슬립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진정한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필진이미지

구자준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박사수료. 웹툰과 웹소설, TV 드라마를 보고 연구한다. 「‘식민지 로맨스’의 네이션과 젠더 –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중심으로」, 「책빙의물과 게임방송물 웹소설의 자기반영성 연구 -『전지적 독자 시점』과 『납골당의 어린 왕자』를 중심으로」 등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는 『김칸비』(만화웹툰작가평론선), 『흙흙청춘』(공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