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께끼 소년 서동> 리뷰

1,400년 전 역사의 틈을 채운 상상력
김한조 작가는 2023년작 <일어나요 강귀찬>에서 급변하는 만화 시장 속 고군분투하는 중견 만화가의 ‘밥벌이 생존기’를 개그 만화로 풀어냈다. 나이가 들어가는 일은 자연스러운 변화지만, 도태된다는 두려움에 압박감으로 다가온다. 창작의 고통까지 더해져 피할 수도, 즐길 수도 없는 상황이 되면 웃음조차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런데도 ‘어른이들에게 바치는 위로와 응원의 시’는 묵직했고, 강귀찬이 자신의 방향과 속도를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작가와의 내적 친밀감 덕분인지 신작 출간 소식이 반가웠다. 이번에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향가로 꼽히는 ‘서동요’에서 출발한 역사 판타지 만화 <수수께끼 소년 서동>으로 돌아왔다. 전 2권이 동시에 출간되었으며, ‘서동요’를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했다. 어린이 만화로 분류되지만 온 가족이 함께 즐기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전 연령 콘텐츠다. 국적 불문의 판타지가 범람하는 요즘, 새로운 ‘서동요’의 등장은 주목할 만하다.
이야기의 씨앗, 서동요(薯童謠)
한 번쯤 들어봤을 만큼 유명한 신라 향가 ‘서동요’는, 서동이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를 얻기 위해 노래를 지어 퍼뜨린 내용으로 알려져 있다. 노랫말 속 선화공주는 외간 남자와 밤마다 어울려 노는 부정한 여인으로 묘사되어 진평왕의 눈 밖에 나 왕실에서 쫓겨난다.
이후 선화공주는 서동과 혼인해 왕비가 되고, 서동은 백제 무왕이 되어 왕자가 태어난다는 해피엔딩은 서동의 음모를 로맨티시스트의 계략처럼 포장된다. 그러나 그는 일종의 가짜뉴스 생산자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작중 서동은 의뭉스러운 인물로, 선화공주는 담대하고 현명한 여성으로 묘사된다.
작가는 ‘서동요’의 여러 버전 중 “선화공주는 남몰래 짝 맞춰 두고 맛둥(서동, 백제 무왕) 방을 밤에 몰래 알을 안고 놀러 간대요.”라는 부분에서 모티브를 얻은 듯하다. 여기서 ‘맛둥’이란 마를 파는 소년이라는 뜻으로 ‘참마 서’자를 써서 서동(薯童)으로도 불린다. 하지만 <수수께끼 소년 서동>의 ‘서동’은 서쪽에서 온 아이(西童)라는 뜻이며, 노랫말 중 ‘알’을 의미한다. ‘알’은 태생을 알 수 없는 축구공만 한 ‘안구’로 형상화된다. 이 ‘안구’는 본 것에 따라 형태를 바꾸는 능력을 발휘해, 때때로 선화공주에게 필요한 것으로 변해 그녀와 운명적으로 얽힌다. 당시 신라 왕실은 덕만공주(선덕여왕)가 왕위에 오르는 문제로 갈등하던 시기다. 선화공주는 덕만공주의 이복 여동생으로 친동생 가온 왕자가 있었다. 동생이 신라 왕권을 둘러싼 후계자 갈등의 중심에 서게 되면서 선화공주는 혼란에 휘말리지 않았을까? 선화공주는 가온 왕자가 권력에 희생될까 봐 움직이고 서동(안구)은 선화공주 일행에 합류한다. 작가는 서동(안구)의 이야기를 통해 서동(백제 무왕)이 선화공주에게 접근해 거짓된 내용을 노래로 퍼뜨린 과정을 역사적 맥락에 기반해 설득력 있게 재구성한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으러 떠나는 여행
기억을 잃으면 자신이 누구인지 인식할 수도 정의할 수 없다. 서동(안구)이 의문스러운 태생, 기이한 능력을 갖춘 존재로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태생에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않았다. 눈앞에 닥친 과제를 운명처럼 받아들였고, 기억을 잃고 나서야 자신의 존재를 궁금해한다. 그가 깨어나는 시점이 인공지능, 빅데이터, 가상현실 등 다양한 기술이 융합된 4차 산업 혁명의 시대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의 변신은 어디까지 어떻게 구현될까?
서동(안구)은 21세기 소년 민수가 친구들과 산에 갔다가 발견한, 신라와 백제 양식이 혼합된 고분 속에서 발견된다. 고분 내부에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서동(안구)의 석상은 민수와 눈이 마주치자 마법에서 풀려난 듯 인간으로 변하지만 모든 기억이 사라진 상태다. ‘기억상실’은 흔한 서사 장치이며, 보통은 기시감이나 과거를 아는 인물과의 만남을 통해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러나 1,400년이 흐른 지금, 서동(안구)을 기억하는 사람도, 그에 관련된 기록도 찾을 수 없다.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기억을 찾아야만 하는 서동(안구). 그는 자신의 기억을 어떻게 다시 찾을까?
고대사 자료가 부족한 픽션 사극의 경우 SF 판타지적 요소가 적절하게 필요하다. 동물, 인간, 사물 등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는데, 서동(안구)의 변화무쌍한 능력 자체가 기억을 찾는 서사 전략이다. 예컨대 과거에는 적과 맞서기 위해 호랑이로 변했다면 스마트폰으로 정보를 수집한다. 서동(안구)은 인터넷으로 수집한 단서를 바탕으로 자신의 뿌리인 신라의 수도 경주로 향하지만, 그곳에는 당시의 건물과 사람 대신 유물과 잔해만이 남아 있다. 서동(안구)이 먼지 같은 흔적으로 기억을 찾는 장면은 상상 이상으로 아름답고 웅장하다. 여정에 동참한 민수네와 김진석 박사도 마침내 서동(안구)의 과거를 ‘목격’한다. 여행이 결국 나를 찾아 떠나는 것이라면, 서동(안구)은 자신이 누구인지 인식하는 데 성공하고, 민수네와 김진석 박사 역시 그와의 동행을 통해 ‘수수께끼 소년’에 관한 궁금증을 속 시원하게 해소한다.
어린이 만화의 다양성
인기 유튜버 ‘흔한 남매’의 IP를 활용한 ‘흔한 남매’ 시리즈는 일상, 과학 탐험, 고전 읽기 등 다양한 주제로 기획되어 어린이 만화 부문 베스트셀러 순위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흔한 남매’의 강점은 어린이 독자가 친숙한 캐릭터와 함께 자연스럽게 지식을 습득하고 다양한 간접 체험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어린이 만화가 지식을 운반하는 매개체를 넘어 어린이 독자가 겪어보지 못한 모험에 동행해 어린이의 삶에 영감을 주는 것도 긍정적이고 하나의 IP가 가진 확장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와 비슷한 기획물이 반복 생산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는 독자에게 선택의 폭을 좁히는 결과를 낳지 않을까. 어린이 독자는 자신의 눈높이에 맞는 콘텐츠를 더 많이 원하며, 필요로 한다. 히트작의 등장과 비례해 다양한 창작자의 작품들도 꾸준히 확장되고 유지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수수께끼 소년 서동>을 만나서 몹시 반가웠다. 고대 경주와 서동의 기억을 여행하며 고대와 현대를 아우르는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고 유려하게 담아낸, 매우 신선한 체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