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초기화
글자확대
글자축소

몇 개의 목소리를 낼 줄 아시나요?, <웰다잉 프로젝트>

웰다잉 프로젝트(봉봉, 씨네21북스) 리뷰

2025-07-17 김선준

몇 개의 목소리를 낼 줄 아시나요?

웰다잉 프로젝트, 봉봉

우리는 인터넷이 다양성의 활로가 될 것이라 기대했다. 다른 계층, 다른 시공간과의 연결을 통해 타자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더 커질 줄 알았다. 정보가 더 이상 권력과 결착하지 않고 모든 사람에게 허용됨으로써 주체적인 수용과 판단이 가능해질 것으 생각했다. 2010년대 들어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인터넷과 정보의 문턱은 더 낮아지고 확장성은 극대화되었다. 그렇다면 2020년대의 허리를 지나는 지금, 우리는 정말 그러한 방향성으로 잘 나아가고 있는 걸까? 목소리들의 스펙트럼이 사라지고 오로지 두 개의 커다란 목소리만이 남았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우리는 다시 전체주의와 이념 대립의 망령에 사로잡히거나, 그에 대한 두려움에 떨어야 하는 걸까?

20세기의 세계대전과 전체주의, 홀로코스트를 직접 경험했던 철학자 레비나스는 이와 같은 문제를 자아의 동일성타자성의 개념으로 진단하고 답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가 전개한 타자 철학에 의하면 타자는 나로 환원될 수 없는 절대적 타자이자 내가 지배할 수 없는 무한한 존재이다. 그런 타자를 자아의 동일성으로 환원하고 지배하려 할 때 다양한 목소리는 소거되고 전체주의의 한 목소리, 혹은 이념 대립의 두 목소리만 남게 된다. 봉봉 작가의 단편집 웰다잉 프로젝트속 여섯 단편은 타자의 수많은 목소리가 자아로 환원되는 과정을 다양한 소재와 장르로 다루고 있다. 우리는 이 작품들에서 어떤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까.

세 번째 단편 <붉은 여왕>은 전체주의적 목소리를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다. <붉은 여왕>은 유전자 조작으로 모든 사람이 같은 외모를 갖게 된 근미래를 다룬다. 세상은 이 기술을 통해 외면의 아름다움에 집착하지 않고 내면의 아름다움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유토피아가 되었다. 하지만 주인공 매트는 유전자 조작 시술의 실패로 평범하지 않은외모를 가졌고, 사람들의 차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라진 기술인 성형 수술을 시도한다. 이 외모 교정 기술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으면서 사람들 사이에선 다시 외면의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이 생겨난다. 일평생 평범함만을 갖기 위해 살아왔던 매트는 아름다움을 갖게 된 사람들 사이에서 아름다움도, 평범함도 갖지 못한다. 매트는 영원한 궁극의 아름다움을 실현할 기술을 완성하며 결국 모든 사람이 똑같이 아름다워져 다시 모두가 평범해지는 세상을 만들고 만다.

인간은 남들과 같아지길 원할까, 달라지길 원할까. 좋아 보이는 것은 따라 해서 동일해지고 싶기도 하고, 또 남들과의 차이가 손쉽게 차별로 이어질까 두렵기도 하다. 그렇다고 남들과 같아지자니 자신이 평범해져서 무의미한 존재가 되어버릴까 두렵다. 두 두려움 사이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과 같아지기 위해, 동시에 달라지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좀 더 근원적인 욕구, 생존과 안전의 욕구를 기준으로 보면 인간은 대체로 같아지는 방향을 따르는 듯하다. 평범함에서 벗어나 아름다움을 추구하던 <붉은 여왕> 속 사람들이 결국 ‘평범한 아름다움’에 안착했던 것처럼, 차이와 다양성의 출현은 다시 동일성으로의 회귀에 묻힌다. <붉은 여왕>에서 핵심적 은유로 사용되는 ‘달리기’로 표현하자면, “결승선 없는 달리기”(124쪽)보단 “달릴 필요가 없”는 상태(130쪽)에 정주하는 것이다. 동일성 안에서 달리지 않는 인간, 변화할 줄 모르는 인간에게 타자의 무한성과 목소리는 상실된다.

여섯 번째 단편 <신은 변기> 또한 멈춰 선 인간들의 전체주의적 면모를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인간을 한 곳으로 환원시키는 존재는 변기이다. 어떤 것도 삼켜내는 변기는 한 마을에서 신이 되고 종교를 만들어내며 마을에 울타리를 두른다. 이 폐쇄성 안에서 다른 목소리는 변기의 물을 내리듯 사라져야 할 대상이 된다. 변기는 움직일 수 없는 사물이다. 결말의 한 노숙자가 보여주듯, 변기는 용변을 볼 때 잠시 접촉하는 대상일 뿐 우리는 변기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고정된 외물에 정체성을 의탁하고 타자성을 환원한 결과, 하나의 목소리를 내려던 결과는 신도들이 결국 그러했듯이 스스로를 무화시키는 결말로밖에 이어질 수 없다.

반면, 멈춰서서 자신의 목소리를 잃은 인간들 대신 끊임없이 움직이며 힘을 부풀리는 것이 있다. 먼저 자본이 그러하다. <신은 변기>에서 첫 번째 살인이 벌어진 이유도 돈 때문이었고, 교주의 딸이 아버지를 변기에 빠뜨리고 자신이 교주가 되려는 이유 또한 돈 때문이다. <붉은 여왕>의 마지막 장면 또한 인조 육체 절찬리 판매 중!”이라는 광고로 끝을 맺는다. 인간이 잃어버린 실존적 의미, 타자성은 자본의 지배력과 무한성에 잠식된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두 번째 단편 <웰다잉 프로젝트>이다. ‘웰다잉 프로젝트는 선발된 세 명의 사람이 스스로 원하는 모습으로 죽을 수 있게 돕는 리얼리티쇼이다. 이 쇼의 본질은 인간이나 죽음이 아니라 자본 그 자체이다. 한 사람이 자신이 원하던 것을 충분히 누리고 죽는 데에 얼마나 많은 돈이 드는지 보여줄 뿐 아니라, 그 과정을 지켜보는 시청자들의 욕망을 추동하고 해소하기 위해 광고들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자본과 더불어 지배력과 무한성을 지닌 또 하나의 움직임은 정보의 움직임이다. 네 번째 단편 <마지막 비행>은 동영상 크리에이터 청년 세 명이 영상 조회수를 위해 시내버스를 탈취하고 승객들을 납치해 국회의사당으로 향하는 상황을 다룬다. 기시감이 드는 상황이긴 하지만, <마지막 비행>이 집중하는 지점은 배경이나 인물, 서사가 아니다. 그 상황이 어떤 식으로 끝없는 정보들을 양산해내는지, 그 정보들이 어떤 과정을 거치며 오해를 낳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떠한지에 집중한다. 예를 들어 주동자 세 사람이 아무 의미 없이 고른 8015번 버스에 지나가는 택시 기사가 광복절의 815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이, 한 크리에이터의 방송을 통해 확장되고 뉴스를 통해 확정된다. 주동자들이 사건을 벌인 원인으로 청년 예산 감축이 거론되면서 시장 후보는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들기도 한다.

정보가 수많은 시청자와 미디어들을 거치며 부여받는 의미는 본래의 의미를 초과한다. ‘자유정의정도의 단어밖에 쓸 줄 모르던 주동자들이 자신들에 대해 떠드는 미디어를 접하고 나선 투사’, ‘투쟁’, ‘해시태그 8015’로 정보와 의미를 넓힌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처럼 현대사회의 과잉된 정보들은 주체성을 잃은 수용자들을 거치며 과잉된 의미, 잘못된 해석으로 몸집을 부풀리고 운동에너지를 유지한다. 마치 사상자를 발생시키고도 멈출 수 없는 버스처럼. 166쪽부터 169쪽에 걸친 페이지 연출은 끝내 그 정보와 의미, 해석 들에 짓눌리고 휩쓸리는 정보 생산자/진실 당사자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다행히도 후반부에서 주동자들과 버스 승객들은 마음을 모으며 버스를 멈추고 진실을 드러내기로 한다. 다만 승객 중 귀를 막고 계속해서 핸드폰과 유튜브만 보던 한 사람, 정보에 부여된 의미와 해석, 그리고 이념에 경도된 한 사람에 의해 버스는 다시 움직인다. ‘마지막 비행을 향해서.

레비나스는 타인을 해석하려는 시도를 두고 타인을 지배하려는 욕망의 표현이라고 분석했다. 현대에 우리가 접하는 정보란 사실 대부분이 타인에 대한 정보이다. 우리는 그것을 끊임없이 해석함으로써 타자를 자신의 인식 체계 안으로 환원시키고 지배하려 한다. <마지막 비행> 속에 등장하는 온갖 해석과 의미 부여는 모두 자신의 가치관, 이익, 정치적 신념에 맞게 왜곡된 것들이다. 이를 가장 잘 활용하는 영역이 정치다. 정치는 다른 모든 영역에 목소리를 내며 어떤 정보든 정치적인 정보로 환원할 수 있는 특성이 있다. 오늘날의 정치적 양극화는 정보량의 증가와 궤를 같이한다. 정치인과 뉴스, 유튜버들은 정보를 이념으로 탈바꿈하고 양극단으로 밀어붙이며 그 과정에서 여러 종류의 이득을 본다. 선명하고 즉각적인 이득이 있는 한 그들은 버스처럼 멈추지 않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희생되는 것은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 평범한 소시민들이다.

레비나스는 우리에게 해석이 아닌 책임을 요구한다. 타자는 절대 로 환원될 수 없음을 인정하고, 그들은 우리가 지배할 수 없는 무한한 존재임을 깨닫고, 그들의 맨얼굴을 직시하여 그에 대한 도덕적 책임과 한계를 깨달으라는 것이다. 첫 번째 단편 <ANA>와 다섯 번째 단편 <햄스터가 손톱을 먹었다>는 희미하나마 우리에게 그 방향성을 알려준다. <ANA>의 핵심 소재 아나는 인공 자궁 기술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 기술을 통해 처음으로 태어난 아기 아나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녀는 아기 때부터 대중의 큰 사랑을 받으며 인공 자궁의 상징이자 프로파간다의 천사로서 인공 자궁 기술을 홍보하고 그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바꿔놓는다. 하지만 기술에 얽힌 각종 음모가 드러나면서 아나는 자본주의의 인형’, ‘메디테크의 창녀로 전락한다. 정작 아나 본인에게는 기술이나 음모에 대해 자기 의견을 표현할 기회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는다. 결국 아나가 테러의 희생양으로 죽고 난 뒤에도 그녀는 또다시 우리는 아나를 통해 여기에 있다”(37)는 구호 속으로 들어가 상징으로서의 삶을 이어간다. 작품의 첫 장면과 결말을 장식하는 질문 인공 자궁에 찬성하십니까, 반대하십니까?”라는 이분법적 틀 안에서 개인의 삶은 하나의 입장이나 상징을 넘어서지 못한다. 그래서 아나는 마지막에 이르러 자신의 목소리를 낸다. “나는 아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단편집에서 유일하게 명확한 해피엔딩을 표방하는 <햄스터가 손톱을 먹었다> 또한 그 결론이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던 주인공은 자신과 똑같은 존재를 만들어내 자신이 할 일을 대신하도록 만든다. 하지만 오히려 그를 통해 자신의 부족함만을 확인하고 그와 갈등을 빚고 만다. 타자를 자신에게 투사하여 자신에 대한 혐오를 타자에 대한 혐오로 치환시킨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타자의 얼굴이자 자신의 얼굴을 보며 책임을 배우고 사랑을 느끼게 된다. 자기혐오가 타자 혐오로 치환될 수 있다면, 타자에 대한 사랑 또한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치환될 수 있다. 우리는 수많은 얼굴을 보고 수많은 정보를 수용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사실 우리가 인식하고 확인하는 것은 자신의 얼굴, 나에 대한 정보일 뿐인지도 모른다. 타자를 끝내 나에게 환원시키지 않고, 나와 다른 대상인 채로 그 얼굴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제야 우리는 진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필진이미지

김선준

만화평론가
2022 대한민국만화평론공모전 신인상 수상
2024 대한민국만화평론공모전 우수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