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적 사랑의 원형적 생산력
『슈나의 여행』, 미야자키 하야오

1. 미야자키 하야오의 상징적인 죽음과 원초
미야자키 하야오가 지난 2023년에 우리에게 남긴 메시지를 기억하는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1), 우리네 현실에 모종의 영향력을 은밀히 드리우고 있는 이세계(異世界)의 존재감을 열어젖힌 질문이었다. 이 질문이 어떤 유언처럼 들리기까지도 하는 국면에서 그의 그림책 『슈나의 여행』2)이 한글로 번역되어 국내에 발간된 일은 큰 행복이다. 만화책으로 보아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이 1983년 作의 한글 번역본을 통해 그의 만화 인생 여행이 흘러나온 태초의 광경을 열어젖히는 작업이 어느 정도 가능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의 은퇴 작품으로 선언된 애니메이션 영화가 이미 세상에 발표된 후의 시점에서 그의 초기작에 속하는 만화책이 한국 독자들에게도 보편적 이해가 가능하게끔 도래한 현상은 여간 묘하지 않다. 마치 한 생명의 흐름을 함께 따라가다가 그 흐름이 뚝 끊어진 후에 그 생명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몸짓이 어떤 원형(圓形)을 빚는 듯해서 그렇다.
『슈나의 여행』이 시작하는 시공간적 배경도 거의 신화적 세계에 가까운 원형(原型)을 머금고 있다는 점은 그래서 흥미롭다.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난 듯한 작은 왕국”(6쪽)의 왕자로 설정된 만화 주인공 슈나가 “먼 옛날인지 혹은 먼 미래인지 알 수 없는/ 어느 까마득한 시대”(6쪽)에 산다는 설정은 이 만화가 다분히 원시적 시간을 전제한 세계임을 천명한다. 그 시간대가 까마득한 과거에 위치하는지 또는 아득한 미래에 위치하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은 『슈나의 여행』이 전개되는 시간적 바탕이 근대의 선형적 시간관(과거-현재-미래)보다 더 근원적이면서도 그 근대적 시간 모델로는 쉽사리 재단되지 못하는 보편적 시간성을 지녔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슈나의 여행』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 세계가 이루는 시간적 궤적 전체에 걸쳐 있는 작품일지도 모른다. 『슈나의 여행』이 그 만화/애니메이션 세계의 과거에만 머무르는 작품이 아니라 그 현재와 미래에까지 일정한 영향을 투사하고 있는 작품으로 보인다는 말이다.
이 판단이 아예 오판은 아닐 것이다. 책의 겉표지에 그려진 슈나와 야쿠르의 그림을 보고서 영화 《모노노케 히메》(1997)의 주인공 아시타카와 그의 영양을 연상했을 이들이 많을 터인바, 『슈나의 여행』 속 몇몇 설정과 적지 않은 그림들이 《모노노케 히메》에 나타난 여러 장면들과 상당히 겹치기 때문이다. 비단 《모노노케 히메》뿐만 아니라 미야자키 하야오의 다른 영화들도 중요하게 인식하는 자연의 존재감이 『슈나의 여행』 속에서 산뜻한 정감과 고유한 질감을 드러내는 수채화에 담겨 아름답게 펼쳐지는 것은 덤이다.
이러한 양상들을 두루 고려해 보았을 때, 『슈나의 여행』이 품은 변별적 화술의 의미를 분석하고, 그것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들, 특히 《모노노케 히메》에 대해 점유하는 영향력을 조명하는 일은 여러모로 유익한 작업이 될 것이다. 이 작업을 통해 미야자키 하야오의 허다한 작품들이 뿌리내리고 있는 근원적 토양의 특질을 살펴봄으로써 그 작품들이 이루는 내력을 한층 유기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유기체는 자연을 이루는 주된 요소요, 그 자체가 하나의 자연이기도 하다.
2. 부드러운 트라이앵글: 내레이션, 인물형, 이미지
『슈나의 여행』은 자타를 위한 사랑을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능동적 노력이 자연의 무한한 생산력에 맞먹는 것임을 부드럽게 이야기하는 만화다. 이 부드러운 느낌은 전지적 서술자 시점에서 제시되는 내레이션에 힘입은 바가 적지 않다. 작중의 심정과 상황을 적실하고도 잔잔하게 전달하는 내레이션은 그 적당한 문장 길이가 한낱 가벼움으로 느껴지지 않는 데다가 시적 정서로 표현될 만한 평온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에 일조한다. 이 안정적 내레이션은 그림이 그려진 장면 속에 그대로 첨부됨으로써 그 그림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녹아들고 있다.
부드러움은 인물형과 이미지의 차원에서도 빚어진다. 슈나는 장차 자신이 다스릴 왕국이 자리 잡은 척박한 골짜기에서 고된 생활을 영위하는 백성들을 평안하게 해주고픈 완만(婉娩)한 심성의 소유자다. 그런 그는 “황금빛 곡물이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풍요로운 땅”(18쪽)이 있다고 전해지는 머나먼 서쪽으로 여행을 떠나게 된다. 바닷물처럼 일렁이는 곡식들의 움직임이 황금빛 광택의 유연한 흐름을 연상시키는바, 일국의 왕자로서 누릴 수 있었을 각종 윤택함을 과감히 포기하고서 험난한 모험을 택한 그의 여정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쫓아가는 방법을 택하는 것도 해롭지는 않을 듯하다. 그 순차적 궤적을 따라가 보자.
3. 내면적 결단의 외로움과 외부적 맥락의 필연성
슈나의 여행이 경솔한 충동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님은 명약관화하다. 미래의 군주로서의 그가 백성들의 기아와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방책에 지극한 관심을 두고 있음이 절절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절절함은 그의 내면에서 신중하게 이루어지는 결단의 진정성으로부터 솟아나는 바가 크다. 오롯이 혼자서 고민하거나 애쓰는 슈나의 모습을 담은 그림도 그의 외로움을 도드라지게 부각하는 효과를 낸다. 국가 통치권 승계의 중책을 맡은 왕족의 핏줄이 출가하는 것을 만류하려는 슈나의 아버지와 장로들의 염려도 슈나의 선한 고집을 꺾지는 못한다.
반면에 《모노노케 히메》는 『슈나의 여행』의 이러한 설정들을 일정 수준 이어받으면서도 그 설정들을 보다 개연성 있게끔 보강하는 전략을 펼친 듯하다. 『슈나의 여행』에서 슈나의 결단이 한 늙은 여행자와의 만남을 계기로 삼아 고독하게 이루어진 양상을 보인다면, 《모노노케 히메》에서 에미시 부족의 차기 족장인 아시타카가 마을을 떠나게 된 원인은 외부의 통제 불가능한 충격에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아시타카는 재앙신이 된 멧돼지의 공격으로 인해 그의 오른쪽 팔에 부패를 증식시키는 치명타가 각인되고 만다. 아시타카 쪽이 건강과 생사를 운명짓는, 보다 현실적이고 필사적인 사정을 안고 있는 셈이다.
아시타카가 그 저주받은 상처를 해결해야 하는 절박한 운명을 품고 있다 보니, 그가 마을을 떠나기 전에 자신의 상투를 칼로 자르는 장면에서 마을의 남자 어른들은 그저 안타까워하며 눈물을 흘릴 뿐이다. 슈나의 아버지와 장로들도 슈나의 떠남을 “안타까워하”(20쪽)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그들이 그 떠남을 “둥지/ 밖으로/ 떠날/ 때가 된/ 젊은이를/ 그 누가/ 막을 수/ 있”(21쪽)겠느냐는 심정으로 그저 체념하는 모습은 아시타카의 경우와는 분명 구별된다. 심지어 양자가 어두운 새벽에 떠나는 장면조차도 서로 다르다. 슈나가 왕국을 떠나는 장면이 담긴 그림은 야쿠르를 탄 그의 뒷모습에만 집중된 반면에 아시타카가 부족의 마을을 떠나는 씬에서는 그의 여동생인 카야가 몰래 그를 배웅하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이상의 과정을 통해 살펴본 차이점들은 《모노노케 히메》의 서사적 흐름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준다. 《모노노케 히메》는 주인공이 자신의 생명을 구제하기 위해 떠날 수밖에 없는 필연적 맥락들을 보충함으로써, 『슈나의 여행』의 플롯이 뚜렷한 개연성을 확보하지는 못했다고 지적받을 수 있는 어떤 한계를 해소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4. 의존적 소비의 폭압과 자족적 생산의 상생
슈나는 고단한 발걸음을 쉬지 않은 끝에 “황폐한 평야에 자리 잡은 도시”(46쪽)에 이른다. 그 도시는, 그가 살던 소박하지만 평화로웠던 자연과 달리, 화려하지만 끔찍한 곳임이 곧바로 드러난다. “이 도시에서/ 주로/ 거래되는/ 상품은/ 인간이었”(49쪽)기 때문이다. 인신매매가 자행되는 이 잔인한 거래 현장은 물건뿐만 아니라 인간조차도 상품으로 손쉽게 전락해버리고 마는 우리의 경제적 풍토를 되돌아보게 한다. 경제 활동에서, 또 자연 안에서 완벽한 소비자인 인간은 필연적으로 외부의 다른 대상을 소비할 수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났지 않은가.
이 만화 속에서 그런 타자 의존적 소비는 폭력적 억압의 성격을 드러낸다. 그런 폭력성은 생명과 인권과 인정(人情)을 거의 메마른 상태에 이르게 한다. 슈나는 인신매매가 이루어지는 황야 속 도시에서 곡식더미를 발견하지만, 그 곡식은 “전부 탈곡되어 죽어 있는 상태였다.”(51쪽) 인신매매 행위가 이루어지는 그 자체가 인권의 파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황에서 테아와 그녀의 여동생을 왕족이라고 소개하면서 슈나에게 판매하려던 상인은 테아가 반항하자 그녀를 폭행하기까지 한다. 게다가 인신매매단에 인간을 팔아넘기는 인간 사냥꾼도 슈나에게 “매매범이 사냥감을 사서/ 어디로 데려가든/ 우리가 알 게 뭐냐?”(51쪽)라고 차갑게 대꾸할 뿐이다. 인권 논의의 법리적 영역을 넘어 타인의 고통에 관한 최소한의 인간적 관심과 윤리적 양심마저 잃어버린 악마성이 냉혹하게 표출되는 장면이다. 슈나는 어두운 지옥에 가까운 “이런 곳에 내가 찾는 씨앗이/ 있을 리 없”(50쪽)다고 단념해 버린다.
그렇다면, 도대체 생명의 씨앗은 어디에 있는가? 그 잔인한 도시를 나온 슈나가 모닥불을 쬐다가 우연히 만나게 된 한 노인은 이 의문에 대해 예상하지도 못했던 도움을 준다. 그 노인이 황금빛 씨앗의 출처에 관한 더 자세한 정보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비록 노인이 플롯의 전개를 위해 작위적으로 배치된 인물이라는 느낌을 지우기는 어렵지만, 그 대사만큼은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큰 힌트로 작용하기 때문에 다소 긴 지면을 할애하더라도 노인과 슈나가 주고받는 대화 전체를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다.
「서쪽으로 계속 나아가다 보면
대지가 절벽이 되어 끝나는 곳이 있다네.
그 앞에 달이 태어나서 다시 죽으러 가는
신인神人의 땅이 있어.」
「신인……?」
「일찍이 사람은 황금빛 씨앗을 가지고 있었지.
스스로 수확하고 스스로 씨를 뿌려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왔지만,
지금 그 씨앗은 신인들만 가지고 있어.
사람은 신인에게 인간을 팔아서
죽은 알곡을 받게 됐지.」
「신인은 사람이 접근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아.
그 땅에 가서 돌아온 이는 아무도 없어.」
(62쪽)
“신인神人”은 문자 그대로 이 만화의 신화적 세계관을 상기시킨다. 그런 신인이 사는 “서쪽”이 “황금빛 씨앗”으로 표상되는 생명력의 근원을 품은 원형적 시공간이라는 점은 더욱 명확해진 격이다. 그런 서쪽 앞에서 달은 왜 태어나서 다시 죽는 과정을 반복하는 것일까? 달은 일정한 주기로 자신의 형태를 반복적으로 변화시키면서도 끝내 처음의 형태로 되돌아가 다시 그런 변화를 무한히 되풀이하는 신화적 형태이다.3) 그 드라마틱한 변화는 한 형태의 탄생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이전 형태의 죽음을 내포한다. 이러한 신화형태론적 맥락에서 탄생과 사멸을 끝없이 반복하는 달의 생리를 이해해볼 수 있다. 또한, 달의 이 순환적 리듬은 《모노노케 히메》에서 사슴신이 달밤에 데이다라봇치로 변신하는 양면성을 갖춘 캐릭터로 설정된 것에도 상당한 영향을 준 요소로 보인다.
더 중요한 점은 인류가 이전에는 황금빛 씨앗을 소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도 “스스로 수확하고 스스로 씨를 뿌려/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왔”다고 이야기되는데, 이는 인간이 그 어떠한 외부적 타력에 의지하지 않고도 자신의 힘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노력을 통해 자족적 생활을 꾸려 나갈 수 있음을 시사한다. “신인에게 인간을 팔아서/ 죽은 알곡을 받게 됐”던 비참한 타락상이나 도시에서 성사됐던 인신매매의 폭력성과는 매우 다른 긍정적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자발적 실천이 단단한 생산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희망이 은근하지만 또렷하게 새어 나오는 부분이다.
슈나가 도달한 신인의 땅은 그런 생산성의 궁극을 자랑한다. 인간의 대지가 끝나는 절벽 아래에 있는 신인의 땅은 거친 바다 위에 자리를 잡은 섬인데, 그 바다는 “다양한 생물로 가득 차 있”(91쪽)다. 그 생물들이 “오래전에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종족”(91쪽)이라는 사실은 시원의 자연계에서 서로 다른 온갖 생명체가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섬 전체에 생명의 기운이 흘러넘치고 있”(92쪽)듯이, 그 섬을 알록달록하게 꾸미고 있는 울창한 원시림도 슈나가 “아아, 이토록 풍족하고/ 평화로운 세상이 또 있을까.”(95쪽)라고 절로 감탄하도록 만들 정도로 완미한 세계이다. “이곳에는 위협하는 존재도,/ 위협당하는 존재도 없”(96쪽)다는 점에서 신인의 섬은 그 자체로 이상향에 값한다. 수직적 계급에 따라 군림하거나 억압하는 그 어떠한 차별적 기제도 없이 모든 존재가 동등하게 상생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 평등한 공생의 양태는 신인의 세계에서 만물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이 잘 드러나는 아래의 장면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슈나의 손이 이삭에 닿자마자
거인들이 몸을 비틀면서, 우는 것인지 애원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로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슈나의 머릿속에서
「그만둬. 그만둬.」 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슈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삭을 잡아 뜯었다.
그 순간, 슈나의 몸에
강렬한 충격이 가해졌고,
날카로운 통증이
가슴을 할퀴었다.
(113~114쪽)
위의 인용문은 삼라만상의 상호성과 유관성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녹색의 거인들이 입에서 황금빛 씨앗을 뿜어내는 광경을 숨어서 지켜보던 슈나가 곡물의 이삭을 건드리자 녹색 거인들은 매우 고통스러운 반응을 보인다. 이 반응은 슈나의 행동이 녹색 거인들에게 분명한 영향력을 가하였음을 증거한다. 물론, 그 역도 성립한다. 슈나는 녹색 거인들의 마음속 호소를 자신의 머릿속으로 선명히 듣는 데다가, 이삭을 뜯어버린 자기 행동의 결과로서 격심한 고통을 느낀다. 이 상호성과 유관성은 우주 만물이 서로 연관되어 있는 만큼,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할 필요성이 있음을 에둘러 말해주는 듯하다. 결국에는 황금빛 씨앗을 획득하는 데에 성공한 슈나는 “끔찍한 통증에 시달리면서/ 어두운 바다로 뛰어들”(115쪽)고 만다.
5. 사랑의 회복력과 그 무한성
한편, 이 만화는 테아의 여행이요, 그녀의 기다림이 담긴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다. 테아는 황야 속 도시에서 처음 등장하여 슈나와 만난 이후, 그의 마음을 동요시킬 뿐만 아니라, 그와의 관계를 어떤 방식으로든 이어가는 동반자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만화의 마지막 장에 해당하는 6장의 제목이 ‘테아’로 붙여진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점들을 숙고해 보았을 때, 이 만화를 테아의 관점에서 다시 감상하는 일도 상당히 유의미하리라고 생각한다.
슈나의 선한 심성과 막상막하를 이룰 정도로 테아가 보여주는 용기는 정의롭고 꼿꼿하다. 그 용기는 도덕적 자발성을 주된 속성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테아는 슈나에게 판매되면 더 안전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음에도 자신을 구매하는 대가로 그의 총을 상인에게 넘기면 그의 존위가 위험해질 것이라고 충고하면서 상인의 말이 거짓말임을 스스로 밝힌다. 그녀의 이러한 행동은 그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의로운 양심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그녀가 슈나를 향해 “당신에게 물건처럼 팔리고 싶지도 않”(56쪽)다고 말하는 것에서 그녀의 강직한 자존심도 동시에 드러난다.
이처럼 자발성은 인간 실존의 능동적 “선택”(63쪽)을 통해 실현되는바, 그 실존적 주체로서의 인간은 매 순간 자신의 선택을 스스로 결정지음으로써 무한히 열린 미래로 자유롭게 나아간다. 인신매매단의 차를 공격하여 붙잡힌 사람들을 구하는 데에 성공한 슈나는 그(녀)들에게 “평생 쫓기는 신세가 되더라도/ 자유를 원하는 자는/ 밖으로 나오”(68쪽)라고 말한다. 그(녀)들에게 일종의 선택권이 부여된 셈인데, 그중에서 슈나를 믿고 차에서 내린 이들은 테아와 그녀의 여동생뿐이다. 테아 자매의 이 선택은 퍽 묵중하다. 자유를 향한 인간의 근원적 향수와 슈나에 대한 그녀(들)의 믿음이 함께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믿음을 굳게 지키면서 북쪽 마을에서 슈나의 귀환을 기다리던 테아는 어느 날 그토록 학수고대하던 슈나와 재회하게 된다. 그러나 “슈나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기억도, 말도, 이름도, 감정조차도…….”(123쪽) 그가 이렇게 심각한 폐인이 되어버린 구체적 원인이 만화 속에서 드러나지는 않는다. 이쯤에서 이 만화를 직접 창조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말을 들어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는 “이 이야기의 토대가 된 것은 티베트의 민담인 「개가 된 왕자」”(150쪽)라고 밝히면서 그 민담의 줄거리를 “곡식이 나지 않는 어느 가난한 나라의 왕자가 백성들의 삶을 염려하여, 고된 여행 끝에 뱀왕이 가지고 있던 보리를 훔칩니다. 그로 인해 마법에 걸려 개가 됐으나, 한 여인의 사랑으로 본모습을 되찾아 마침내 고국으로 보리를 가져간다는 내용”(150쪽)으로 요약하고 있다. 민담은 설화에 속한다. 설화는 원형적(原型的) 구전 서사 문학이다. 뱀은 달의 종교형태론적 속성을 지닌 동물이다.4) 민담 속의 왕자가 그런 뱀의 마법으로 인해 개로 변화하게 된 현상은 그 자체로 삶과 죽음의 동시적 발생을 함축한다. 그 변화 이전에 그 왕자가 인간으로서 살았던 삶과 보유하였던 기억은 전부 사멸한 격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호 텍스트성을 염두에 두면, 신인의 대지에서 황금빛 곡물을 움켜쥐었던 슈나가 자신의 거의 모든 것을 망각해버린 현상을 어느 정도 납득해 볼 수 있다.
테아는 그렇게 피폐해진 슈나를 외면하지 않는다. 그녀는 슈나로부터 과거에 입었던 도움을 잊지 않고 지극정성으로 갚는다. 이 정성은 사랑 없이는 불가능할 터이다. 테아의 이 결초보은은 배은망덕이 팽배하는 인면수심의 서글픈 세태를 되돌아보게끔 한다. 그녀는 돌봄의 애정을 실천하는 맥락에서 슈나의 섭식을 위해 농사에도 부지런히 힘쓴다. 그녀의 자상한 보살핌과 꾸준한 노고 덕분에 “작물이 노랗게 익어서/ 서서히 결실을 맺듯이 슈나도 회복되어”(141쪽) 가고, 마침내 슈나는 기억과 언어와 건강을 완전히 되찾아 테아의 평생 반려자가 된다. 이 두 남녀의 힘찬 포옹은 사랑의 결합을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풍경이요, 강인해 보이기만 했던 테아가 처음으로 보이는 눈물은 그 사랑의 진정성을 확인시키는 샘물이라 표현될 만하다.
결혼을 이룬 지모신(地母神)은 새 생명을 낳는 근원적 토양이다.5) 푸른 빛깔로 소생하는 들판 위에서 테아의 누이동생은 온몸으로 기쁨을 표출한다. 그 장면은 마치 생명의 축제, 그 자체를 체화한 것 같은 인상을 주기에 족하다.
파릇파릇한 싹을 보면서
테아의 어린 여동생이 소리 높여 웃었다.
인간 사냥꾼이 고국을 불태운 뒤로
단 한 번도 웃지 않던 아이가
지금은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고 있다.
(130쪽)
슈나의 회복이 자연의 리듬에 따라 이루어졌듯이, 시적 정조를 물씬 풍기는 위 인용문에서 테아의 여동생도 자연의 순환적 율려를 그대로 체현한 듯한 웃음소리와 독무를 선보이고 있다. 그녀가 ‘어린’ 인물임은 또 다른 특기 사항이다. 다시 갓 태어난 자연의 청순한 상태가 어린아이의 천진난만한 순수성을 담뿍 머금은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 해맑은 동심은 인간 사냥꾼의 방화 때문에 큰 아픔을 겪었던 쓰라린 과거를 단번에 일소시키는 활달한 에너지를 내뿜는다. 그 건재한 힘은 그 어떠한 고갈 상태에도 도달하지 않으리라.
6. 자연이 ‘그대’에게
그럼에도 “슈나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149쪽) 그에게 황금빛 씨앗의 절반을 가지고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임무가 남았기 때문이다. 왜 미야자키 하야오는 모든 일이 마무리된 듯한 행복한 분위기를 기껏 형성한 뒤에 굳이 열린 결말로 작품을 끝맺었을까? 그 이유는 완성된 결말을 짓는 일이 이 만화에는 그리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만화는 어떤 결과를 확정하는 것보다 우리 모두가 자발적 동기에 따라 자신만의 선택을 적극적으로 결단하여 노력해 나가는 자세를 더 역설하는 텍스트다. 그런 태도가 아무것도 미리 정해지지 않은 미래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는 사랑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 점을 재차 피력하는 듯이 “그 여정은 언젠가/ 또 다른 이야기가 되어/ 길이 전해질 것”(149쪽)을 예언하는데, 이 예언은 그 이후로 숱한 지브리 영화들의 제작으로 실현되었다. 하지만 그 영화들이 『슈나의 여행』을 완성한 것은 결코 아니다. 『슈나의 여행』은 그것을 접한 이들의 마음속에서 완결되지 않고 끝없이 이루어져 나갈 흐름을 발산하기 때문이다. 그 영속적 흐름의 이미지는 원환의 리듬과 협화음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만유가 조화롭게 공생하는 무궁한 시적 세계, 그 세계가 바로 자연일 것이다. 그 자연 속에서 미야자키 하야오는 자꾸만 이런 메시지를 읊조리는 듯하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라고.
1) 이 글에서 단행본을 표기할 때는 겹낫표(『 』)를, 80분 이상의 장편 영화를 표기할 때는 겹화살괄호(《 》)를 사용하였다.
2) 이 글에서 별다른 표기가 없는 한, 괄호 안에 쪽수만 기입된 것은 모두 미야자키 하야오, 『슈나의 여행』, 이상은 옮김, 학산문화사, 2025로부터 인용된 것이다.
3) 미르치아 엘리아데, 『종교사 개론』, 이재실 옮김, 까치, 1993, 153~154쪽 참고.
4) 위의 책, 162~163쪽 참고.
5) 위의 책, 229~230쪽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