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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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이면서 동시에 역동적인 해녀의 일생을 담아낸, <그곳에서>

그곳에서(현홍아선, 한그루) 리뷰

2025-08-12 최기현

정적이면서 동시에 역동적인 해녀의 일생을 담아낸

그곳에서, 현홍아선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전지적 독자 시점>을 관람했다. 이 영화는 리뷰어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나는 동명의 웹툰 팬이라는 사실과 별개로 영화 속 화려한 CG와 배우들의 열연에 집중하며 2시간의 러닝타임 동안 나름 재미있게 관람했다. 영화와 웹툰, 더 나아가 웹소설의 서사·인물·연출 등의 차이를 나도 모르게 분석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영화의 연속된 장면, 웹툰의 정지된 장면, 아예 문장으로만 표현된 웹소설의 장면이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뒤엉켜 나만의 문법으로 재생되었다.

영화와 만화의 가장 큰 차이는 장면을 표현하는 형태와 소리의 존재 여부다. 영화는 연속적인 장면으로 서사를 전개하며, 그 과정에 소리가 포함되어 있다. 반면 만화는 연속된 장면의 한 부분을 포착하여 정지된 화면을 그리고, 거기에는 실체적인 소리가 없다. 영화와 비교할 때 연속된 장면과 실체적인 소리의 부재는 만화의 고유한 특성으로 재구성된다.

연속적인 움직임이 의도적으로, 다시 말해 작가에 의해 정지한 상태로 포착된 화면은 만화에서 칸과 또 다른 칸으로 구성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독자의 눈이 첫 번째 칸에서 두 번째 칸으로 넘어갈 때 머릿속에서는 상상력이 동원되어 정지된 장면이 추상적이지만 연속적인 움직임으로 전개된다. 프랑스의 만화 연구가 브누아 페터스는 유령칸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만화에서 실제로 그려져 있지 않은 칸, 즉 칸과 칸 사이의 빈 곳에 독자의 상상력·경험·인지가 자연스럽게 채워 넣는 존재하지 않는 칸을 말한다. 만화의 서사가 진행될 때 서로 다른 칸 사이에서 발생하는 시간·행동·감정의 변화를 독자가 무의식적으로 채워 넣는 과정이 수반되며,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지만, 유령과 같이 보이지 않는 어떤 칸이 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유령칸과 함께 작품에 등장인물의 말풍선이나 네모칸의 나레이션이 제시되면서, 소리 역시 독자의 상상력으로 구현된다. 만화는 영화에 비해 정적인 특성을 보이지만, 독자의 상상력이 결합하여 만화를 읽는 100명의 독자 머릿속에서는 100개의 연출이 펼쳐지고, 그 결과 어느 영화보다 역동적인 작품으로 재구성된다.

오늘 소개하는 현홍아선의 만화 <그곳에서>는 제주도 동복리 마을 해녀의 일생을 담아낸 그래픽노블이다. 1940년대에 태어나 죽을 때까지 해녀로 살아간 한 사람의 희로애락을 사진처럼 세밀하게 묘사했다. 만화이기 때문에 정지된 화면으로 서사가 진행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더 나아가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처음부터 끝까지 말풍선과 나레이션이 없다는 점이다. 즉 실체적인 소리는 물론이거니와 독자가 재구성할 수 있는 소리마저 아예 사라진 셈이다. 서사든 인물의 대화든 언어적으로 설명하는 도구(말풍선, 나레이션 등)가 없어서, 독자가 이 만화를 읽기 위해 상상력을 동원해야 하며 다른 만화보다 더 적극적으로 상상력을 사용하여 개입해야 한다. 그렇기에 독자가 처한 환경과 그동안의 경험에 따라 이 작품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장점이 있기도 한다. 소리를 의도적으로 제거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해녀의 삶은 여기에서 독자에 의해 주목받는다.


작가는 연필과 찰필을 사용하여 사실적이면서도 거친 질감의 드로잉으로 해녀의 삶을 표현했다. 사람의 얼굴을 묘사할 때도 면적을 세부적으로 나누어 명도를 세밀하게 구분해 그렸는데, 이러한 연출은 작품 전반에 흐르는 정적인 느낌과 소박함을 한층 강화한다. 급격한 장면 전환이나 과도한 동적 연출은 없다. 동적인 효과를 내는 동작선, , 땀을 나타내는 기호도 없다. 간혹 숨을 내뿜는 물방울이 묘사될 뿐이다. 연속적인 장면을 정지된 화면으로 포착하여 사진처럼 묘사했기 때문에 정적인 분위기가 기저에 깔려 있다. 이는 해녀의 하루가 바다와 육지, 물질과 휴식 사이를 오가는 반복적 패턴임을 효과적으로 보여주며, 급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멈추지 않는 해녀의 시간 감각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한다.

어두운 바닷속 심연 깊은 곳까지 내려갔다가 올라오는 장면은 화려한 색채나 세련된 펜 터치 대신 목탄의 거친 입자감과 연필의 소박한 농담으로 표현되어 해녀의 역동적인 생명력을 드러낸다. 제목을 <그곳에서>로 지은 데에도 의미가 있다. ‘그곳은 특정한 장소를 가리키며, ‘그곳에서만 가능한 삶이 지속된다. 제주는 다양한 이미지를 환기하게 시킨다. 서울에 사는 사람들에게 제주는 여행지 또는 휴가지로 여겨진다. 그곳은 일상에서 벗어나 기분을 환기할 수 있는 일종의 판타지 공간이다. 반면 해녀에게 제주, 구체적으로 동복리와 바다는 타지 사람들이 느끼듯 편안한 휴식의 장소가 아니다. 그곳은 해녀에게 삶의 터전이자 동시에 다른 곳으로 벗어나지 못하는 제약의 공간일 뿐이다.

특히 바다는 해녀에게 생계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언제든 생명을 위협하는 곳이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양가적 공간이다. 사랑하는 이를 바다에서 잃었을 때, 그 공간은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은 곳일 것이다. 그러나 슬픔을 딛고 다시 바다로 물질하러 나가는 모습에서 독자는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을 느낀다. 단순히 경제적 필요 때문만은 아니다. 해녀들에게 바다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담아냈는지는 모르지만, 출산이 임박한 상황에서도 물질을 하는 해녀의 삶은 당당하면서도 애처롭다.

해녀는 정적이면서도 역동적으로 삶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동시에 제약을 받으며 그곳에서살아간다. 작가는 정지된 화면으로 그 지점을 포착하고, 소리를 의도적으로 제거해 해녀의 삶을 주목하게 만든다. 그리고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당신의 일상 <그곳>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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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현

문화예술 분야에서 일하며 퇴근 후에 만화를 읽고 글을 씁니다. 공연, 전시를 관람하는 것과 만화 정책에 관심이 많습니다. 최근 글로는 <만화산업 중장기 계획(5차)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과제들>(2022 대한민국 만화평론공모전 우수상),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