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만능주의 시대, 인간에 대한 예의, <명품관의 진상>
『명품관의 진상』, 소리쳐

‘회귀, 빙의, 환생’ 등 현실 도피적 판타지물의 수요는 여전히 높지만, 최근에는 부동산, 주식, 직장, 연애 등 현 세태를 극사실적으로 묘사한 하이퍼리얼리즘 작품도 영역을 넓히는 중이다. 하이퍼리얼리즘은 Hyper(과도한)+Realism(현실성)이 결합한 단어지만, 일부 작품은 현실 묘사를 ‘고자극’으로 곡해해 현실을 왜곡한다. 그런 이유로 현실고증에 공들인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발견하면 무척 반갑다. 그 세계를 경험하지 않고도 진실에 가깝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리쳐 작가의 <명품관의 진상>은 국내 최고 명품관에 입점한 명품브랜드 ‘빗사’의 매니저 ‘오진상’이 진상 손님에 대처하는 과정을 그린 실제 사연 기반 하이퍼리얼리즘 오피스드라마다. ‘진상’은 지방의 토산물이나 진귀한 물품을 왕에게 바치는 ‘진상(進上)’에서 유래된 단어로 본인이 윗사람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요즘엔 ‘손님은 왕이다.’라는 말처럼 소비자란 이유로 판매자에게 군림하려는 진상 손님을 가리키는 말로 통용된다. 소리쳐 작가는 인터뷰에서 현직 명품관 매니저의 자문을 구해 에피소드를 구성했다고 밝힌 바 있다. 드라마에서 봤던 원색적인 진상 손님만 나오진 않을까 보기 전부터 피로함이 느껴졌지만, 걱정이 무색하게 모든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진상 손님 유형은 어느 하나 겹치지 않았고 그 해결책도 허를 찔렀다.
‘오진상’과 진상 손님들
현대인에게 옷은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가치를 증명하는 수단으로 소비되며, 어떤 브랜드 제품을 입느냐가 한 사람의 취향과 경제력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값비싼 명품을 소비하는 건 부자의 특권이었으나 요즘엔 생일 선물이나 나를 위한 ‘플렉스’로 소비될 만큼 대중화되었다. 설정상 톱 클래스 브랜드는 아닌 ‘빗사’ 매장엔 부유한 손님은 물론 다양한 계층의 손님이 방문한다. 스트레스를 쇼핑으로 푸는 CEO 손님, 지인 앞에서 명품을 사고 몰래 환불하러 오는 손님, 해외직구 사이트 장바구니에 담은 옷을 실제 착용하러 온 손님, 시장 조사하러 온 패션디자인과 대학생들, 지하철 실버 택배 종사자 등 매장을 방문하는 목적은 천차만별이다. 그 외 뉴스에 이따금 등장하는 매장 털이범, 짝퉁 제조업자, 공갈·협박범 등 빌런들도 드나들어 혼란한 상황이 벌어진다.
‘빗사’의 신입 판매원 ‘서민이’가 경험 부족으로 좌충우돌하며 성장하는 캐릭터라면, 6년 차 판매원 ‘도라서’는 부정적인 경험이 편견으로 남아 헛다리를 짚는 헛똑똑이다. 반면 10년 차 매니저 오진상은 그동안의 경험에서 비롯된 노련함으로 어떤 유형의 문제건 가장 현명한 방법으로 해결하는 완성형 캐릭터다. <명품관의 진상>은 바로 오진상의 이야기다. 오진상의 진상 손님 대처 노하우는 단순한 문제 해결을 넘어 주변 사람, 심지어 진상 손님의 마음마저 움직이는 특별함이 있다.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도록, 태도가 기분을 바꾸도록
매출에 민감한 명품관에서 구매력이 약한 손님은 홀대당한다는 통념이 있지만 오진상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친절하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오진상의 친절함과 선한 영향력을 잘 설명한다. 취업 준비생으로 자존감이 바닥난 손님은 점원에게 무시당했다는 자격지심에 ‘살 것처럼’ 모든 종류의 옷을 꺼내게 만들어 골탕 먹인다. 오진상은 한바탕 분풀이를 하고 나가는 손님을 붙잡고 다른 옷을 추천받겠냐고 제안한다. 손님은 싫은 내색 하나 없이 미소를 띤 오진상의 태도가 진심일지 아닐지 궁금하다.
오진상은 자신의 추천으로 착장한 후 거울 앞에서 흡족해하는 손님에게 이런 말을 한다. “스타일이 달라지면 태도가 달라지고, 달라진 태도가 쌓여 미래가 달라지죠.” 진상 손님이 달라진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며 ‘고객님’이 되는 순간이다. 언제부턴가 인간관계에서 기분이 태도가 되지 말라는 말이 큰 공감을 얻었다. 이는 자신에게 사치는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오진상과 일맥상통한다. 손님의 자격지심(기분)은 갑질(태도)이 되었지만, 진상의 겸손한 태도는 분노를 미안함으로 바꿨다. 어떤 손님이건 존중하고 겸손하게 대처한 그의 태도가 손님의 기분을 바꾼 것이다.
이러한 오진상의 판매 철학은 ‘매출이 인격’이라는 명품관이라는 특수한 환경과 부딪칠 때가 있다. 젊고 출세욕 있는 도라서는 빠른 길을 돌아가는 오진상의 햇볕정책을 내심 답답해하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실리를 추구한다. 그는 어떤 손님이건 물건을 구매하도록 상황을 제어하고 매출이 늘면 성취감을 느낀다. 매출 부진이 곧 퇴출로 이어지는 세계관에서 도라서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지만, 오진상은 판매직이 단순히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손님을 돕는 일이라는 사명감을 품고 일해 도라서와 점점 멀어진다. 문득 행복과 감정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매출과 연결되는 것과 별개로 가식적이지 않은 친절함도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오진상이 추구하는 사명감은 회의가 드는 밥벌이에 지치지 않고 버틸 힘이 된다.
세상의 온기를 채워주는 친절함
우화는 동물이나 무생물을 의인화해 인간 세상을 풍자하고 교훈을 전달한다. <명품관의 진상>은 현대인에게 성공과 부의 상징과도 같은 명품관을 무대로 펼쳐지는 우화 만화다. 오진상이 지혜와 통찰력을 상징하는 올빼미로 분한 건 탁월했고, 그는 판매직 종사자의 이상향이다. 작품 속 명품 소비를 둘러싼 인간군상은 독자의 가치관과 상황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지만, 독자는 이데아적인 캐릭터 오진상을 통해 사람에 대한 예의를 생각하게 된다.
판매자가 소비자에게 친절한 건 당연한 걸까? 그렇다면 소비자가 판매자에게 예의 있게 행동하는 것도 당연하다. 본인의 상황에 따라 누구나 판매자가 될 수도 손님이 될 수 있다. 서로에게 불친절할 이유가 없다.
이제 <명품관의 진상>은 오진상의 내면 갈등으로 전환점을 맞았다. 오진상을 눈엣가시로 여기는 백화점 영업 팀장 ‘지규아’와 오진상을 시험하는 VIP 고객 ‘소피아’, 오진상에게 등을 돌린 도라서 등 이야기가 제법 남아있다. 흔들리는 오진상을 지지해 주는 서민이의 성장과 함께 오진상의 슬기로운 대처를 기대하며, 세상 모든 오진상을 응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