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색을 찾아 헤매는, 『빨개져버린』 사춘기
『빨개져버린』, 아하

그래픽노블 『빨개져버린』은 사춘기 청소년의 욕망과 불안을 그린다. 눈병으로 안대를 쓰게 된 주인공은 주변의 특별한 관심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아간다. 독자는 그 과정을 따라가며 사춘기 감정을 공감하고 이해하게 된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국립어린이청소년도서관이 추천한 이 작품은 10대들의 내면을 세심하게 포착한다.
1. '중2병'이라는 프레임
‘중2병’은 1990년대 후반 일본에서 시작해 2010년대 한국에서는 인터넷 속어로 등장했다. 10대 청소년의 이해하기 어려운 행태를 ‘병’으로 낙인찍는 이 말은, 오늘날 반사회적 증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두엽 발달에 따른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청소년 정신과 전문의 김현수 교수는 청소년들의 허세와 짜증, 무기력 뒤에는 “외로워요, 도와주세요, 힘들어요”라는 신호가 있다고 말한다.1)
이러한 프레임은 청소년이 사회의 시선을 내면화하게 만든다. 나 또한 그 시절 ‘그 나이답지 않으려’ 애쓰며 끊임없는 자기검열에 시달렸다. 『빨개져버린』의 주인공은 바로 그 시기에 놓여 있다.
작품의 첫 장면은 엄마의 빨간 구두를 클로즈업한 큰 컷(P.9)이다. 주인공은 구두를 신은 엄마를 따라 현관을 나선다. 차 뒷좌석에 앉아 다른 차의 후미등을 바라보는 순간, 거친 선과 회색 수채화로 그려진 얼굴이 처음 드러난다. 어른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하는 혼란이 얼굴을 스친다. 주인공의 한쪽 눈에는 빨간색 색연필로 칠한 상처가 있다. 불규칙하고 모호한 선으로 이루어진 이 흔적은 사춘기 청소년의 심리와 시선을 보여준다. 의사는 이 상처가 혈관이 터진 ‘일시적 현상’이라고 말한다. 바로 이 순간부터 주인공의 사춘기가 시작된다.

[그림1] 아하, 『빨개져버린』, 아름드리미디어, 2024. P.9-14
출처: 교보문고 미리보기
2. 타인의 시선이 만든 특별함
매체 속 ‘중2병’ 인물들은 자신을 특별하게 드러내려는 욕망으로 안대나 붕대를 착용한다. 의사는 안대를 ‘신경 쓰이면’ 쓰라고 권한다. 주인공은 남들과 다른 모습이 두려워 망설이다가 결국 안대를 착용한다. 그러자 주변에서 예상치 못한 반응이 이어진다. 친구들의 호기심, 선생님의 연민, 심지어 버스 기사와 분식집 아주머니까지 관심을 보인다. 주인공은 안대가 오히려 자신을 특별하게 만든다는 사실에 놀란다. 안대 덕분에 체육 시간에 혼자 앉아 있을 수 있고 선배들의 시선도 끈다. 거울 속 낯선 자기 모습이 점점 멋있어 보이지만, 이는 곧 사라질 불안정한 자존감일 뿐이다.

[그림2] 아하, 『빨개져버린』, 아름드리미디어, 2024. P.42-43
출처: 길벗어린이 보도자료
작가는 칸 배치로 이러한 허상을 드러낸다. 아빠와 선생님의 관심을 대비하여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P.38-39). 아빠는 등을 돌리고 있고 선생님은 주인공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칸 배치는 주인공이 아빠를 마주 보게 하고 선생님과는 등지게 배치한다. 이는 관심과 교감 사이의 간극을 드러내는 장치다.
안대가 시야를 가리듯 화면 구성과 연출이 이루어진다. 작품은 큰 판형에 한 페이지당 1~3컷만 배치한다. 컷 수가 다양하지 않아 일정하고 느린 속도감이 느껴진다. 때로는 양 페이지 전체를 하나의 컷으로 쓰기도 하는데, 이러한 대형 컷은 일러스트나 회화처럼 기능한다. 독자는 그 페이지에 오랫동안 머물며 주인공의 내면을 정적으로 느끼게 된다.

[그림3] 아하, 『빨개져버린』, 아름드리미디어, 2024. P.60-61
출처: 길벗어린이 보도자료
인물과 배경 묘사도 특징적이다. 어른들과 친구들은 수채화로, 주인공과 가장 가까운 친구만 선화로 묘사한다. 이를 통해 주인공의 좁은 친밀함이 시각화한다. 얼룩진 흑백 수채화와 거친 선은 불안정한 조화를 이루며 주인공의 정서와 작품 전체 분위기를 만든다. 이 수작업의 흔적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작품만의 독특한 질감으로 손끝에 남는다.
3. 불안 위로 쌓아가는 상처
‘눈의 상처’는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 아니다. 작가는 주인공이 상처를 스스로 확대하는 과정을 한 페이지에 압축해 보여준다(P.46-47). 연속된 프레임처럼 눈동자가 회전하는 순간이 그려진다. 상처가 붉게 번지는 순간, 주인공의 감정은 기쁨과 슬픔 사이에서 불분명해진다.
이 상처는 눈에만 머물지 않는다. 주인공은 수건을 적실 만큼 코피에 시달리기도 한다. 이비인후과에서 의사는 스스로 코를 파서 생긴 것이라 말하고, 주인공은 부끄러움에 자조한다. 이에 엄마는 “너 아프면 엄마도 힘들다”는 말만 남긴다. 그 뒤로 주인공은 코피를 흘리지 않는다.

[그림4] 아하, 『빨개져버린』, 아름드리미디어, 2024. P.52-53
출처: 길벗어린이 홈페이지
작품 속 주인공은 엄마의 얼굴 대신 뒷모습을 바라본다. 책임감이 가득한 엄마를 쫓으며 고통을 스스로 감내해야 한다고 여긴다. 상처는 자기혐오와 스트레스가 신체로 드러난 결과이며, 이러한 신체 증상은 청소년기의 고립을 강조한다.
발달심리학자 에릭슨(Erik H. Erikson)은 사춘기를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본격화하는 시기로 보았다. 이를 극복하지 못하면 자기혐오와 불안정성이 심화한다.2) 작품 속 주인공은 상처를 통해 자신의 몸과 심리를 알아가지만, 뚜렷한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채 혼란을 키운다. 에릭슨은 정체성이 사회적 지지 속에서 형성된다고 했으나3), 병원의 기계적인 ‘진단’은 청소년에 대한 이해보다는 표면적인 관찰에 그친다. 결국, 주인공은 외부의 도움 없이 불안 속에 방치된다.
눈의 상처가 회복돼도 주인공은 안대를 벗지 않는다. 특별함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불안은 검은색으로 묘사되는데, 낯선 또래들 역시 새까만 실루엣으로 그려진다. 안대가 이 불안의 색으로 더럽혀지는 순간, 억눌린 불안이 폭발한다. 주인공은 눈을 보려는 친구에게 짜증을 내며 먼저 공격한다. 이는 주인공에게 내재한 불안이 자기 파괴적 행동으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주인공은 아직 이 불안을 다스릴 줄 모른다. 에릭슨의 발달론은 인간을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으로 본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정체성은 완결된 상태가 아니다. 불안을 겪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형성 중인 ‘상태’이다4).
4. 투명함의 재발견
주인공은 불안이 폭발한 이후 안대를 벗는다. 깨끗한 두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순간, 새삼스럽게 눈물의 ‘투명함’을 깨닫는다. 울어서 눈이 붉어지는 현상은 외부나 타의가 아닌 내면에서 비롯되는 감정이다. 작품은 자아의 색을 특정한 하나로 규정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 자아의 색을 모든 색을 품을 수 있는 ‘투명함’이라고 말한다. 투명은 회색 세계에 스며들면서도, 그 안에서 언제든 자신의 색을 드러낼 가능성이 된다. 작품의 결말은 정체성이 자기 감정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과정에서 형성됨을 보여준다.

[그림5] 아하, 『빨개져버린』, 아름드리미디어, 2024. P.94-95
출처: 길벗어린이 보도자료
결말의 한 장면은 ‘성장’의 의미를 함축한다(P.104-105). 앞 장에서 주인공은 문을 열고 들어가고 있다. 다음 장에는 주인공이 이미 교실 안에 앉아 있는 모습이 그려진다. 두 페이지를 함께 보면, 주인공은 자신이 앉아 있는 교실을 밖에서 바라보고 있다. 그러면서 그 안으로 들어가려 한다. 사춘기는 자신이 ‘세상의 주인공일 수 없음’을 확인하는 동시에, ‘자신의 이야기에서는 주인공일 수 있음’을 깨닫는 순간이다.
『빨개져버린』은 화면의 질감, 칸 배치와 연출, 색채 대비 등 다양한 시각적 장치로 사춘기의 복잡한 감정을 묘사한다. 중간중간 담담하게 표현된 재치 있는 장면들은 사회의 시선을 예리하게 꼬집으며 서사를 환기한다. 단순한 그림체와 짧은 서사는 다소 미숙한 구성과 표현을 보이는데, 오히려 그 점이 주제와 맞물린다. 그 결과, 사춘기의 불안과 흔들림을 진실되게 전달한다. 이 작품의 가장 큰 의의는 사춘기를 ‘병’으로 규정하는 사회적 시선에 맞서, 판타지나 이상화 없이 청소년의 현실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그 시기를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으로 바라보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청소년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는가, 그리고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있는가? 독자는 『빨개져버린』을 통해 자신과 또래의 불안이 고립된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작품은 자신의 치부마저 사랑할 수 있는 자기 발견의 과정을 새롭게 바라보도록 이끈다.
1) 정시행, 「심란한 요즘 중2병,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요」, 조선일보, 2024.02.03.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4/02/03/A3LQRTFFFZC6TK3X2EDEBRZKOA/
2) 박아청, 「에릭슨의 인간형성론의 발달이론적 구조에 관한 일고찰」, 『사회과학논총』 26권 2호, 2007,pp.146.
3) 박아청, 앞의 책, pp.159-160.
4) 박아청, 앞의 책, pp.151-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