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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어진 사람들, <아무렇지 않다>

아무렇지 않다(최다혜, 씨네21북스) 리뷰

2025-09-08 박근형

기울어진 사람들, <아무렇지 않다>

『아무렇지 않다』, 최다혜

최다혜 작가의 <아무렇지 않다>를 떠올린 건, 1회 군산 초단편 문학상 수상 작품집에 실린 소설 <땅의 주인>을 읽던 중이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서핑을 배우고 있었다. “다리를 세우는 일은 중력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몇 번 넘어진 뒤에 깨달았다.(...) ‘다리는 땅을 향해야 일어설 수 있구나.’하고 깨달았다. 나무판과 붙어 있는 발에서 마찰이 느껴졌다. 내가 누르는 만큼 나무판도 나를 밀어냈다, 마치 원래 한 몸이었던 것처럼.” <땅의 주인>을 읽기 직전에 <아무렇지 않다>를 읽었는데, 그때 나는 등장인물들이 묘하게 기울어져 있다라고 느꼈다. 생각해 보면, 파도를 타기 위해서는 먼저 중력을 거슬러 서프보드를 딛고 일어서야 한다. 이때 발은 보드를 밟고 서는 느낌보다는 보드와 바다를 밀어내는 느낌에 가깝다. 그렇다고 우뚝 일어섰다가는 금세 넘어지기 십상이므로, 무릎을 굽히고 몸을 기울여 무게중심을 잡아야 한다. 결국 기울어짐은 삶의 질곡이라는 파도에 대항하는 자세인 것은 아닐까.

형태적 유사성에 기반한 과잉 해석일 수도 있지만, <아무렇지 않다>에는 불안정한 사선과 사선으로 만들어진 이차 프레임, 그리고 비스듬히 올려다보는 불안정한 구도의 인물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대학교 시간 강사 은영의 에피소드에는 격자무늬 문과 창문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그녀가 마치 감금된 것처럼 보이게 한다. 생활고 때문에 그림을 계속 그려야 할지 고민하는 화가 지은의 장면에서는 고민이 깊어질수록 바닥의 보도블록 무늬가 복잡해진다. 또 한 가지 눈에 띄는 점은 홈통이 있으면서도 없다라는 것이다. , 홈통은 기호적으로는 존재하지만, 시각적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홈통이 극단적으로 축소되어 있다. 칸 내부의 여백 또한 흰 공백 없이 색으로 채워져 있다. 여백을 메운 색과 붓 터치는 여운을 남기는 '' 공간이 아니라, 인물 뒤에 색지를 댄 것과 같은 평면적인 배경으로 인식된다.

요컨대 <아무렇지 않다>의 모든 페이지는 무언가로 가득 차 있으며 불안정한 각도의 이미지는 긴장과 불안을 유도한다. 이는 만화 속 인물인 김지현, 강은영, 이지은이 살아가는 세계를 숨 막히고 불안한 곳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이 놓인 생존 조건이 끊임없이 긴장과 불안을 유발하므로, <아무렇지 않다>도 이러한 방식으로 그려져야 했을 것이다.

다시 <땅의 주인>으로 돌아가 보면, 인류에 의해 방사능에 오염된 지구는 불모지가 되었다. 인간은 대류권보다 높은 대기에서 유영하며 살아가고, 중력을 거슬러 걷고 발을 디디며 흔적을 남기는 감각을 잃어버렸다. 공중에서 유영하는 그들의 삶은 양수를 헤엄치는 태아 같기도 하고, 직립 보행하는 인간에서 바다를 유영하는 원시 생물로 퇴행한 것 같기도 하다. <땅의 주인> 속 식민화된 지구와 <아무렇지 않다>의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관습적인 저작재산권 양도 계약 서류를 들고 옷 쇼핑을 하는 지현의 모습을 통해, ‘저작재산권카드쇼핑백일이 언제 끊길지 모르니 들어왔을 때 해둬야 하는상황 앞에서 같은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같아진다. 지은이 경제적 어려움으로 물감을 선뜻 사지 못하고 내려놓을 때, 물감은 3,500원짜리 편의점 도시락이나 850원짜리 컵라면과 같은 것으로 치환된다. 이들의 선택인 척 위장하지만, 정체성을 소비와 함께 저울에 올리는 것은 결국 자본이다. 인류의 수탈로 지구가 불모지가 되는 미래가 충분히 예견되는 것처럼, 자본이 인간의 존엄을 결정짓는 세계에서 그녀들이 겪는 불행 또한 우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

불행에는 중력이 있다. 사소하든 거대하든, 불행은 사람을 자기 연민이라는 욕망의 늪으로 끌어당긴다. 자기 연민이 주는 위안의 인력은 너무나 강력해서 그 늪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다. 그러나 불행의 중력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 않다>의 주인공들은 아무렇지 않게내일을 살아가기 위해 뜀박질을 준비한다. 지현, 은영, 지은에게는 용기가 있다. 그 용기는 고용 환경이 불안정한 프리랜서라도 불합리한 계약은 하지 않겠다는 지현의 선언이자, 어제까지 구두를 신었어도 오늘은 운동화를 신고 아르바이트 전선에 뛰어들 수 있는 은영의 각오이며, 다양한 수상 이력이 있음에도 경제 활동을 하지 않으면 '' 또는 '공백'으로 간주하는 현실에서 다음으로 나아가려는 지현의 다짐이기도 하다. 한때는 아무렇지 않다라는 말이 울음을 삼키고 있는지, 무릎에 묻은 흙먼지를 털고 하는 말인지 궁금했으나 이제는 궁금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들이 그 말조차 뒤로한 채 어떤 모습으로든 묵묵히 나아가고 있음을 알기에.

문득 몇 년 전, 서핑을 처음 배웠을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운동에 영 소질 없는 나에게 강사는 몇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파도가 오면 몸을 세우지 말고, 낮게 숙일 것. 두려워 말고 시선은 멀리 둘 것. 그 조언대로 했더니 파도가 나를 해변으로 실어 보내는 환희를 몇 번이고 경험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강사는 보드를 탈 수 있는 파도와 없는 파도가 있음을 알려주었다. 지현과 은영, 지은도 보드를 탈 수 없는 파도를 만난 것은 아닐까. 날이 좀 괜찮아지면 그들도 다시 파도를 찾아가리라. 은영의 에피소드에서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시간 강사직에서 해고되지만, 다음 날 바로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기 위해 집을 나선다. 나는 그녀의 말풍선(“, 바로 출발하겠습니다”)에서 빛무리를 보았다. 비록 향하는것과 향해야만 하는것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으나, 그 차이를 포착하는 것만큼 말풍선 뒤에 햇빛을 그려 넣은 마음과 빛무리를 읽을 수 있는 마음 또한 중요하다고 믿는다. 파도에 고꾸라지는 모습이나 파도를 멋지게 타는 모습이 그녀들의 전부는 아니다. 중요한 것은 아무렇지 않게다시 보드를 밀고 나아가는 모습을 곁에서 응원하는 일이다. 그들의 건투를 빈다. READY, SET, GO.

필진이미지

박근형

2017 디지털만화규장각 신인만화평론 공모전 가작 수상
2021 제4회 혼불의 메아리 공모전 대상 수상
2024 대한민국만화평론공모전 최우수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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