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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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頂上)에서 정상(正常) 바깥으로 향하는 <헬터 스켈터>의 도약에 대하여

헬터 스켈터(오카자키 쿄코, 고트) 리뷰

2025-09-05 김윤진

정상(頂上)에서 정상(正常) 바깥으로 향하는 <헬터 스켈터>의 도약에 대하여

『헬터 스켈터』, 오카자키 쿄코

 

일본의 만화가 오카자키 교코의 <헬터 스켈터(Helter Skelter)>1995년부터 1996년까지 연재된 작품으로, 2003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이듬해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 대상을 받았다. 일본에서 2012년에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으며, 국내에는 2020년에 정식 출간되었다. 제목인 헬터 스켈터는 혼란, 당황이라는 뜻이자 놀이공원의 나선형 미끄럼틀을 가리키는 단어로, 영국의 록 밴드 비틀즈가 1968년에 발매한 노래의 제목이기도 하다. 헤비메탈의 시초라고 알려져 있을 만큼 거칠고 난잡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이 노래는, 정상까지 올라간 뒤 바닥까지 추락하는 과정이 반복되며 경험하는 혼란스러움을 형상화한다. 이러한 정서는 교코의 만화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전신 성형으로 세간의 주목을 한 몸에 받는 스타가 된 리리코는, 시간이 갈수록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이 줄어들고 있음을 직감한다. 몸의 상태는 급격하게 나빠졌고, 약물은 더 이상 들지 않는다. 시간이 갈수록 그녀의 불안은 증폭될 따름이다.

뚱뚱하고 못생겼던 여자가 전신 성형 수술을 통해 미녀 스타로 거듭난다.’ 이러한 만화의 설정은 오늘날의 독자에겐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이는 국내에서 흥행에 성공했던 영화 <미녀는 괴로워>(2006)일본의 만화가 스즈키 유미코의 동명 만화가 원작인와 유사할 뿐 아니라 실제로도 관찰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선 전신까진 아니지만, 잇따르는 연예인의 성형 고백이나 대중들이 연예인의 과거 사진을 파헤치며 성형 부위를 추론하는 것이 단적인 예이다. 그렇다면 <헬터 스켈터>의 새로움은 무엇일까? 2020년대의 어느 날, 1990년대의 만화를 새롭다고 말하는 것은 어쩐지 이상하다. 그럼에도 굳이 말해보자면, 이 만화의 새로움은 결말에, 또는 결말로 향하는 방향에 있다. 리리코는 마지막까지 무대를 떠나지 않는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화제의 중심에 있는 리리코의 모습으로 시작한 만화는, 다른 의미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는 그녀의 모습으로 끝이 난다.

만화에는 누군가가 호랑이 형상의 무언가그것이라고 언급되는에게 머리를 뜯어먹히는 컷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이것은 아마도 리리코의 머릿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일 테다. 흥미로운 사실은 뜯어먹히는 머리에도 그것과 동일한 줄무늬가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언뜻 보면 뜯어 먹히는 쪽과 뜯어 먹는 쪽이 마치 하나로 연결된 것처럼 보인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이 착각이 아님을 알게 된다. 이 몸들은 두 개의 팔과 두 개의 발만을 가지고 있다. 뒤로 뻗어 있는 사람의 팔은 마치 그것의 것처럼 보이고, 발목이 잘린 듯 보이는 그것대신 사람의 두 발은 온전하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의 몸이다. 두 개의 팔과 두 개의 발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몸, 이 몸에 머리가 하나일 수밖에 없음은 당연한 듯 보인다. 그렇다면 머리의 주인은 누가 될 것인가? 리리코? 또는, 아사다? 질문을 이렇게 바꿔볼 수도 있겠다. 먹는 쪽은 누구이며, 먹히는 쪽은 누구인가?

아사다 검사는 리리코의 추락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하는 순간 모습을 드러낸다. 시간이 갈수록 리리코는 무너진다. 그녀 앞엔 자신이 한 번도 갖지 못한 것을 당연하게 가지고 태어난 후배까지 등장한다. 자신의 현재가 무엇보다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녀에게 새파랗게 어린 후배는 내장을 뽑아내고 가죽을 벗겨내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나는 존재다. 리리코가 점차 엄마의 관심에서도 멀어지는가 싶던 찰나, 아사다 검사가 만화의 새로운 축으로 등장한다. 리리코를 타이거 릴리라고 부르는 그의 정체는 검사라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어딘가 의미심장하다. 그도 그럴 것이, 호랑이 형상의 그것은 리리코의 머릿속에서만 존재하는 환각이 아닌가? 마치 그녀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집어삼키기라도한 듯이, 또는 하나의 머리를 공유하기라도 하는 듯이, 그녀를 타이거라고 칭하는 아사다의 정체는 혼란스러움을 더하는 요소가 된다.

만화에서 아사다와 리리코의 관계는 반복된 컷으로 형상화된다. 만화의 마지막 컷이 그것으로, 이 컷은 이미 한 차례 등장한 바 있다(아직 만화를 읽지 않은 독자를 위해서 구체적인 장면의 묘사는 생략한다). 리리코의 불안과 아사다의 불안은 기묘하게 감응한다라는 말처럼, 이들의 관계는 분명 그것과 연결된 하나의 몸을 연상하게 한다. 이야기의 끝이자 또 다른 시작을 예고하는 마지막 컷이 드러내듯, <헬터 스켈터>는 단지 성형 수술로 만들어진 미녀 스타가 추락하는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만화는 추락의 가속도를 동력 삼아 다른 방향으로 도약한다’. 추락하는 순간마다 리리코는 극적으로 부활한다. 스타에서 괴물로, 리리코에서 타이거 릴리로 말이다. 비록 그 과정이 거칠고 난잡할지라도, 이는 분명 도약의 과정이다. 정상(頂上)에서 바닥으로 내려가는 대신, 그녀는 차라리 정상(正常) 바깥으로 향한다. 그리하여 그곳에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다.

이러한 점에서 <헬터 스켈터>은 미국의 소설가 척 팔라닉의 <인비저블 몬스터>를 떠올리게 한다. 이 소설은 인기 있는 모델이었던 주인공이 총격으로 인해 얼굴의 반이 손상되면서 사람들로부터 외면받고, 이후 우연히 만난 이들과 함께 여정을 떠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녀의 이야기 또한 거칠고 난잡한내용이 주를 이룬다. 약물, 도둑질, 사기, 욕망과 집착, 배신과 복수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러나 그 끝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진짜 얼굴에 관한 이야기다. <인비저블 몬스터>의 주인공과 <헬터 스켈터>의 리리코 모두 한때 모두가 선망할 법한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던 이들이다. 동시에 이들 모두 그것을 잃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추락할 시간만 남은 듯한 그녀들이 보여주는 방향 전환이 독자에게 예상외의 지지를 얻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우리가 그녀들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교코는 이 만화의 연재를 끝낸 뒤 교통사고를 당해 현재까지 요양 중이라고 한다. 그녀의 빠른 쾌유를 빌면서, 언젠가 타이거 릴리의 기묘한 모험을 볼 수 있게 되길 바라본다.

필진이미지

김윤진

시각예술 및 대중문화에 대하여 글을 쓴다.
2024년 대한민국 만화평론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2023년 영평상 신인평론상을 수상하였고 같은 해 GRAVITY EFFECT 미술비평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