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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증의 열린 우화 - 하민석의 만화책 『기동물기』

기동물기(하민석, 딸기책방) 리뷰

2025-09-04 박동성

통증의 열린 우화 - 하민석의 만화책 『기동물기』

『기동물기』, 하민석 


기괴한 순간이 있다. 기괴하다는 언술로도 적확하게 표하지 못할 순간이 있다. 그런 순간마다 살갗에 피어오르는 요상한 변이는 어디에서부터 발원하는 무엇인가? 이 질문이 문득 떠오르고 그 답을 찾고 싶어질 때가 있다.


하민석의 만화집 기동물기(딸기책방, 2023)1)는 이 질문에 초점을 맞춘 음울한 탐구로 여겨진다. 이 책의 다섯 단편은 사뭇 무거운 어둠을 머금은 듯한데, 에피소드마다 그런 어둠을 서로 다른 결로 이야기하고 있어서 풍부한 재미도 느끼게 해준다. 그런 점에서 역설적으로 기동물기는 암흑의 다채로움을 드러내는 작품집으로 가치화될 수 있다. 이러한 미학성이 인정된다면, 미성년기에 체험·억압된 부정적 정서와 그로부터 유발되는 각종 증상을 우화적으로 그려낸 열린만화로서 기동물기를 감상하는 작업도 충분히 시도될 수 있을 듯하다.

이 만화의 스산한 음기는 형식과 내용에 기인한다. 흑백 만화로서의 무채색 화면을 통해 이야기되는 학교 폭력, 보복, 범죄, 불화 가정, 정신질환, 납치, 감금 등의 요소들은 추가 설명 없이도 문제의 심각성을 뚜렷이 알려준다. 작가 스스로 밝혔듯, 기동물기어릴 때 겪었던 아픈 기억들이 시간이 흘러도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점”(186)에 집중하여 그런 모호한 감정들”(187)이 일으키는 온갖 스트레스 반응을 기동물의 형상으로 변환한 기록으로 읽힌다. 따라서 각자의 고유한 병증을 작품 속에서 발견한 독자라면 통감도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동물은 낯설고도 흥미로운 캐릭터다. 만화는 스스로 이 존재가 동물의 모습이나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동물은 아니”(87)귀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87)라고 설명한다. 동물이나 인간이 아닌데, 귀신 같은 영적 존재도 아니라면, 도대체 이 기동물의 실체는 무엇일까? 기동물 연구자 손봉수 소장에 따르면, “아이들의 불안이 그들에게는 아주 좋은 먹잇감”(87)이다. 미래에 닥칠 위험을 예상하는 조심성이 과해지면 불안감으로 흐른다. 심한 불안은 감정적 고통을 불러온다. 이런 불안을 먹고 사는 기동물은 아이들이 불안정한 미래에 대해 마음속으로 증폭시키는 어떤 감정과 연결된 존재로 추측할 수 있다. 이 존재의 정체에 관해서는 많은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어두운 감정일수록 결이 잘게 쪼개지면서 내가 어떤 기분인지 설명하기 힘들”(186~187)기 마련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어린아이들만이 형성하고 발산하는 특유의 불안 증상과 어두운 욕망이 기동물로 육화됐다고 보는 해석을 취하고자 한다. 이 해석이 적당한 균형성과 설명력을 어느 정도 잘 갖추었다고도 판단되기 때문이다.

기동물은 동물이 아니지만, 동물의 외양을 지녔고, 우화의 어원이 다르게 말하기라는 점을 고려하면, 아이들의 깊은 불안과 흉악한 욕망을 기동물이라는 인격체로 바꾼 이 만화들을 우화로 보는 시각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 우화들이 전부 묘하게 열린 듯한 결말 구조를 지닌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다섯 편의 만화는 확실한 매듭을 짓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마무리되는 뒷맛을 짙게 남긴다. 열린 결말은 독자들에게 인계되어 무한히 다른 내용으로 이어질 수 있는 미래 가능성을 함유한 플롯이다.


너구리 동굴은 또래들의 갈등과 시간 여행 모티프를 결합한 이야기다. 그 갈등의 중심에는 게임기가 있다. 주인공 소년은 준성에게 자신의 게임기를 빌려주지만, 준성은 돌려줄 기미가 없다. 그러던 중, 주인공은 준성이 다른 친구에게 그 게임기를 빌려준 사실을 알게 된다. 게다가 준성은 게임기를 바닥에 던져 버리기까지 한다. 그 장면에서 흑백 화면이 컬러 화면으로 슬며시 전환된다. 이 연출은 건조한 무력감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맹렬한 분노가 격발하는 정서 상태를 탁월하게 표현한다.

고라니 도로는 고라니의 로드킬에 관련된 몽환적 추리물이다. 감정(과 비슷한 변용의 역량)이 주제인 듯한 작품집에서 법리의 영역을 다룬 이 작품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인간 세계에 인간들을 위한 법이 있듯이 고라니 세계에도 고라니 법이 있”(43)다는 고라니의 대사를 실마리로 삼을 수 있다. 이 대사는 불분명한 우울감의 세계도 스스로 운영되는 체계를 갖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인간의 차에 치인 고라니를 둘러싼 이 법정 스릴러는 나름의 서스펜스를 통해 인간 감정의 사회문화적 특성을 흥미롭게 시사한다.

거북이 텐트는 가정의 빈곤과 불화가 아동에게 가하는 악영향을 손봉수 소장의 담론적 대사와 엮어 으스스하게 보여준다. 그런 불우 가정의 자녀에게만 가시화되는 거북이 텐트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저절로 움직”(82)인다는 점에서 역시 자율적이다. 이 악령은 청소년 우울감이 얼마나 위협적인 창조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꽤 섬뜩하게 알려준다.

개구리 볼펜은 학교 폭력 피해자 오진우의 판타지 이야기다. 괴롭힘을 겪은 트라우마로 정신과 약을 먹는 진우는 우연히 개구리 볼펜을 얻게 된다. 그 볼펜은 적는 내용대로 미래 계획을 수정하는 도구였던 것! 그런 점에서 개구리 볼펜은 원래는 선악의 피안에 있지만, 사용자의 상대성에 따라 선하게도 악하게도 쓰일 수 있다. 그 펜은 진우의 복수심에 접촉하여 가해자 성주영을 실종 상태에 처하게 한다. 이때, 진우가 개구리 볼펜을 만난 후로 줄곧 비가 쏟아졌다는 점”(104)을 언급하는데, 이 폭우는 울적한 심정의 환경화로 이해될 수 있다.

대신가게와 고양이 가면무엇이든 대신해 주는 서비스를 제공”(119)하는 대신가게를 통해 사람들을 미혹하여 그()들의 행세를 하는 쥐 요괴들을 퇴치하는 히로인물이다. 히로인 정미소는 고양이 가면을 쓰고 사람의 탈을 걸친 쥐 악당들을 소탕하는데, 가면 디자인은 검토할 만하다. 고양이 가면은 흑백이 반씩 어우러진 디자인인데, 이 밸런스 디자인은 육체의 안팎을 모두 볼 수 있게 하는 초능력을 형상화한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그의 전작 이상한 마을에 놀러 오세요! 1~2(딸기책방, 2019)가 황당무계한 무지갯빛 별세계를 발랄하게 전방위적으로 펼쳐내는 느낌이었다면, 기동물기는 인간 마음속의 어느 심연에서 미세하지만, 끊임없이 꿈틀거리는 그림자를 차분히 관음하여 그 은밀한 감정을 서늘하게 묘사한 음계(陰界; 음울한 세계)처럼 느껴진다. 그 음계가 다층적인 음계(音階)’처럼 구축된 면도 있음을 한 번 더 강조한다. 이처럼 하민석은 이상한감정과 상황을 만화로 그려내는 일에 최적화된 작가다. 그의 다음 작품이 어떤 세계로 이행해 갈지 더욱 기다려지는 이유다.

 


1) 이 글에서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된 것은 모두 이 책에서 인용된 것이다.

필진이미지

박동성

대학교와 대학원에서 각각 국어국문학사 학위와 국어국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2023 대한민국 만화평론 공모전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만화평론가로 등단하였다.
현재 국어국문학과 일반대학원 박사 과정에서 공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