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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에 대한 무한 귀납 증명, <품위증명>

품위증명(글 적록·그림 염밀, 네이버웹툰) 리뷰

2025-12-05 이성호

존재에 대한 무한 귀납 증명, <품위증명>

『품위증명』, 글 적록·그림 염밀 


1. 확률의 낭중지추

불행은 어디에서부터 시작될까. 거슬러 오르면 태생부터 우리는 불행한 존재가 될 것이다. 이를 누군가는 실존적 불안이라고 칭하는데, 어떤 이들은 이 불행에 잠겨 죽기도 하지만, 어떤 이는 불행의 깊이를 박차고 올라 자맥질하기도 한다. 이 자맥질의 근원이 어디서 오는지는 알 수 없으나 누가 붙잡고 끌어내려도 수면 위를 향해 유영하는 자를 보고 우리는 낭중지추라고 부른다. 이 낭중지추가 바로 <품위증명>의 주인공 곽건영이다. 존재하지 않는 어머니와 존재가 부증명과 다름없는 아버지. 사회적 증명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개인의 증명은 버거울 수밖에 없다.

고등학교 이전 건영의 학창 시절은 마치 통계를 통해 찍혀있는 점들을 일렬로 정렬한 것처럼 노골적이다. 사회적, 유전적 배경이 학업에 유리하다는 통계는 확률에 불과하지만, 이 확률에 대해 건영은 확률이 아닌 사실로 판단한다. 이는 건영이 벗어나고 싶어 했던 도박중독자 곽태건 핏줄의 특성이다. 통계를 사실로 판단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지만, 이 정도를 문학적 허용으로 본다면 우리는 언제나 작품이라는 것이 전형성을 반영한다는 것을 의식해야 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현재 본인이 딱 전국 10위에서 20위 정도의 전국 단위 자사고 출신이자 교사이기 때문이다.1) 평현고의 전국 순위도 모호한 수치다. 보통 전국 고교 순위는 서울대 합격자 순서로만 이루어지며, 재학생의 수나, 그 하위 대학 진학률은 포함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학년 재학생이 200명인 학교에서 서울대 10, 고려대 50명을 보내더라도 학년 재학생 500명인 학교에서 서울대 15, 고려대 30명을 보낸다면 순위는 후자의 학교가 더 높게 책정된다. 통계는 언제나 확률일 뿐이지, 사실은 아니다. 자사고 출신이자 교사로서 작품 내 모순을 끝없이 짚어낼 생각은 없다. 그것은 모순이 아니라 아이러니에 가깝다. 아이러니는 작품이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는 정당성이다. 곽건영이 이러한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는 확률적 정당성과 그것을 이겨내야 하는 확률적 의지가 작품을 이끈다.

교육은 그런 확률을 이겨낼 수 있는 신분 상승의 정당한 도구다. 특히 한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더욱 그러한데, 다른 나라보다 교육 체계에 있어서 전통적 가치관이 강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전에 신분은 태생이 결정했다면, 현대의 신분은 태생의 영향을 중요하게 받지만 필연적이지는 않게 되었다. 신분은 현대 사회에서 학벌, 직업, , 권력 등의 여러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기에 희석된 것이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곽건영의 선택은 학벌을 바탕으로 한 권력이었다. 신분의 유지가 태생이 아닌 끊임없는 증명으로 나타난다는 점에서 의외로 현대 사회는 충분히 평등하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더라도 학비에 큰 금액을 쓰는 것이 오히려 그 증거다. 그렇다면 학비에 큰 금액을 쓰지 않고도 신분 상승을 이루어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특별한 케이스일 것이다.


그림1 곽건영

특별한 케이스라는 것은 그것이 통계적으로 쉽게 이루어질 리 없지만, 이루어진 경우가 있다는 의미다. 곽건영이 희망을 잡을 수 있는 것은 확률적으로 존재한다는 이유 때문이다. 희망은 불행 위에 세워진다. 건영이 잠겨 죽기 전에 끝없이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이유는 불행의 수압에 익숙해진 것도 있지만, 불행의 바다 위에서 산란하는 희망이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희망은 지레 포기하게 만들지만, 도박처럼 눈에 보이는 확률은 진짜 현실의 희망보다 달콤하다.

2. 수학적 명제와 다른 존재 증명

확률의 높낮이는 의미 없다. 곽건영에게 모든 확률은 본인이 통과해야만 하는, 1%가 있다면 본인이 100%로 만들어야만 하는 과제들뿐이었다. 곽건영은 본인을 증명해야 한다. 본인이 자신을 증명해야 하기에 오롯이 권리와 책임은 본인에게서 나오기에, 곽건영이 본인의 품위를 본인이 증명하기로 결정한 순간 건영의 더러운 과거는 언제나 배제의 대상이다. 곽건영이 최선을 다해 아버지를 밀어내고 어머니를 부정하고, 가족을 숨기는 것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밑에다 두어야 할 바닥들이다. 바닥은 붙어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차고 오르는 도구일 뿐이다. 밑을 내려다봐서는 안 된다. 그 바닥들은 딱딱한 바닥이 아니고 언제든 발목을 잡을 파리지옥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밟아서 올라가는 한 칸 한 칸은 증명의 한 줄이 된다. 어떤 존재들은 연역적으로 증명된다. 태생이 미래를 결정했던 것처럼 마치 자신의 태생을 증명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대로 곽건영처럼 귀납적으로 본인을 증명하는 존재들이 있다. 마치 귀납에서 한 번이라도 어긋나면 증명이 망가지는 것처럼, 1에서 N으로 나아가는 증명 속에서 N으로 가기까지의 여정은 아득하다. 존재의 증명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무한한 귀납 증거들로 이루어진다. 귀류법으로 결론을 부정한 뒤에 그 결론이 모순임을 증명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곽건영이 품위가 바닥이라고 했을 때 그 결론이 모순임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하나라도 흠집이 있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건영의 가장 큰 흠집은 태생이 된다.

결론적으로 건영의 증명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 참으로 나아가는 증명에 반례는 있으면 안 된다. 이미 반례가 있다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증명자의 의무가 되므로 결국 건영의 증명은 본인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태생을 부정하는 것이 증명된다. 부모로 인해 받은 상처는 회복되지 않는다. 그래서 품위의 증명은 끝이 있지 않다. 품위라는 것은 위치를 드러내며 위치는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현재에 개인이 차지한 시공간이다. 현재를 증명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것이므로 건영의 증명은 불가능을 증명하는 셈이 된다. 그것은 성적으로 압도하든, 학생회장이라는 직위로 압도하는 것과 별개의 이야기다.

현재가 과거를 바꿀 수는 없다. 건영과 달리 어진과 강희서, 배소이 등의 학생들은 부모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사실 건영도 마찬가지다. 건영은 애매함을 견디지 못한다. 감싸안지도, 밀어내지도 못한다. 건영의 주변에 결함 있는 강희서, 어진 등이 떠도는 것은 의도적이다. 이 결함은 본인의 결함이 아닌 가족의 결함이어야 한다. 작품의 방향성은 개개인의 이겨냄보다도 그 이겨내기 힘든 가족이라는 환경에 중점을 둔다. 가장 근본적인 환경인 가족 속에서 사실 자식은 그대로 자라나기도 하지만, 그 가족만큼이나 예측 불가능하다. 환경을 통제할 수 없는 도박과 달리 건영은 환경을 통제할 수 있는 공부를 택했듯이, 희서의 편집증적 강박이 엄마처럼 자식에게 향하는 것이 아닌 출구인 건영을 택했듯이, 각자의 존재 증명은 가족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으면서도 언제든지 가족과 관련 없는 방향으로 튀어 나갈 수 있다. 과거는 그러므로 변화를 원하는 자에게 안정된 바닥이 아니라 밟고 올라가야 할 지옥이다.



그림2 (순서대로) 배소이, 강희서, 어진

증명은 명제의 참 거짓을 밝혀내는 것이다. 명제는 사실, 가치, 정책으로 나누어지지만, 사실 명제만이 참 거짓을 나눌 수 있을 뿐 가치와 정책 명제는 참 거짓을 나눌 수 없다. 다시 말해 품위는 사실의 영역이 아니기에 사실을 아닌 것을 밝혀내는 것은 여전히 불가능하다. 그러나 건영이 품위를 증명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본인의 존재 가치가 되었기 때문이다. 건영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본인을 증명하기 위해 타인의 가치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건영의 증명 과정은 실존주의처럼 보이지만 결국 대학을 위한 공부와 권력을 위한 공부라는 점에서 진짜 자신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 남들의 품위 기준에 본인이 들어가는 증명이 된다. 자신을 위한 증명이 아닌 타인을 향한 증명이라는 점에서 실패부터 시작하는 증명의 끝은 결국 다시 타인으로 채워질 것이다. 왜냐하면 건영의 증명은 끝까지 본인의 결함에 대한 증명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결함을 증명할 필요 없는 관계에서 건영은 구원받을 것이고, 그 필요 없는 관계는 결함에 묶인 채 벗어나고자 하는 희서와 진이 되는 것이다. 구원 서사는 결함 없는 사람에 의해 나타나지 않는다. 서로의 같은 결함이 발견되고 본인이 끊을 수 없는 족쇄를 향해 타인의 족쇄를 휘두를 때야 족쇄는 부서진다. , 증명은 내가 타인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1) 설득력을 갖추기 위해서 부득이하게 필자의 직업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득을 위한 에토스적 특성으로 이해해 주시길 바란다.

필진이미지

이성호

만화평론가/고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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