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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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노동을 위한 헌사, <많이 좋아졌네요>

많이 좋아졌네요(우영, 우리나비) 리뷰

2025-11-26 박근형

보이지 않는 노동을 위한 헌사

『많이 좋아졌네요』, 우영 

외람된 이야기를 하면서 글을 연다. 만화에 대한 소고를 적을 때 나는 이 작업을 일종의 번역으로 규정하며 시작한다. 비평이 되었든, 리뷰가 되었든 만화에 관한 산문을 적는 일은 작품에서 내가 읽어낸 바를 독자에게 정확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번역의 산물이라고 나는 정의한다. 이 정의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루틴에 불과함을 밝혀둔다. 그러나 무수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의도는 물론이거니와, 글을 쓰고 있는 나의 의도 역시 정확하게 전달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불가능을 최대한 가능하게 만들기 위해 무수히 발버둥을 치는 정도일까. 특히 자전적인 경험을 토대로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만날 때, 이러한 번역의 불가능성은 나를 더 긴장하게 만든다. 자신의 삶을 담아 작품을 발표한다는 것은, 얼마나 많은 오독을 각오해야 하는 일인가?

 

 

나의 번역은 비언어적 표현과 이미지에서 도출되는 감각을 언어적 표현으로 옮기는 것을 포함한다. 이를테면 <많이 좋아졌네요>에서 아들 기영은 사고로 의식을 잃고 중증 환자가 된 아버지 보현의 옆얼굴을 큰 산의 능선처럼 느낀다고 비유하고, 뒤이어 대지로 그려진 얼굴 위를 걷는 장면이 배치된다. 나는 그것을 태산 같아서 미처 다 알 수 없는 아버지의 삶으로 읽는 식이다. <많이 좋아졌네요>와 같이 자전적 경험을 통해 존재의 자리를 만들고자 하는 작품을 만나면 번역의 단어를 겸손히 고르게 된다. 타인의 삶이란 거대한 대지와 같아,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으므로 나 역시도 눈에 보이는 저 능선을 헤아리는 것이 고작일 뿐이다.

 

<많이 좋아졌네요>는 가족 돌봄을 통해 바라본 대한민국의 의료 복지 체계와 사회적 연결망의 취약점을 다루는 그래픽노블이다. 동시에 사고와 재난으로 일상에서 밀려 나가는 존재들이 삶의 의미를 잃지 않기 위해 외치는 목소리이기도 하다. 우영 작가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돌봄·요양 체계를 자전적 서사의 과녁으로 겨냥하면서 이곳에서 저곳으로 건너가기위해, “벌어진 틈과 시차를 메우기 위해1 바삐 틈새를 연결하는 돌봄 노동의 면면을 놓치지 않고 주목한다. 욕창이 생기기 쉬운 중증 환자를 일정 시간마다 자세를 바꿔주어야 하는 일은 간병의 고됨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삽화다. 여기에는 갑자기 닥쳐온 재난에 한 사람의 몫을 할 수 없게 된 존재를 지탱해야 하는 가족의 아픔이 겹쳐있다. <많이 좋아졌네요>는 육신과 일상성의 취약함을 일깨우면서, 한편으로 개인에게 끝없이 부담으로 지워지는 돌봄 노동에 사회적 존엄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의료와 복지 시스템은 누구를 중심으로 설계되어 있는지를 묻는다.

 

<많이 좋아졌네요>를 한국 도서 출판 정보센터에서 검색해 보면, 사회과학 분야에서도 사회문제/복지-노동문제 분야로 분류된다. 가족복지나 사회복지, 사회문제와 같은 분야를 두고 노동문제로 간주한 것은 아버지의 사고와 가족의 상황을 산업재해의 관점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돌봄 노동의 관점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일까. 어쩌면 둘 다일지 모르겠다.

돌봄은 노동을 가능케 하는 가장 긴밀한 요건이면서 동시에 가정·가족의 역할로 치부되어 온 지 오래다. 돌봄에 대한 인식이 많이 전환되어 복지망이 다각도로 구축되고 있기는 하나, 2025년에도 매달 뉴스 헤드라인으로 간병 살인이나 간병 파산과 같은 단어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갈 길은 요원해 보인다. 이전과 같은 활동을 할 수 없는 중증 환자를 위한 간병은 상당한 시간적·경제적 비용을 요구한다. 누구보다도 복지 시스템의 도움이 필요한 환자와 가족들은 간병에 온 일상을 들이게 되면서 정작 모든 다리가 끊어진 섬에 고립된 처지가 된다. 의료와 복지, 요양 시스템 사이사이 끊어진 연결망으로는 돌봄은 여전히 가정 내의 문제로 국한될 수밖에 없다. 좋은 제도가 생긴다 한들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으면 수급자에게는 여전히 무너진 다리일 뿐이다. 고립된 가족에게 돌봄에 소모되는 재원은 생계의 위협으로 이어지기 쉽고, 결국 또 다른 사회적 약자에게 돌봄을 외주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곳에 온전히 시간을 내 존재해야 할 수 있는 역할이다.”2는 기영의 독백처럼, 돌봄 노동은 역할에 존재가 잠식되기 쉽다. 사회가 돌봄에 종사하는 사람을 잊고 돌봄 노동을 수단화하면 돌봄 노동은 생명 연장 장치와 다름없이 기능하게 된다. 사람이 지난한 돌봄의 일상에 잠식되어 존재를 잃어버리면 돌봄은 사라지고 처리만 남는 것이다.3 돌봄이 수단화되는 곳에서 생존과 삶은 이음동의어다. 생명을 유지하는 것을 삶과 동치시킬 때, 사회적 존엄에 대한 논의는 호사스러운 것으로 간주한다. 돌봄 대신 처리가 이루어지는 곳에서 돌보는 사람은 삶은 과연 존중받고 있을까. 그러므로 많이 좋아졌네요.”, 아니, <많이 좋아졌네요>는 당신의 돌봄 노동이 가치있음을, 그러니 존중받아야 함을 의미하는 일종의 헌사다. 지난한 돌봄의 일상에 잠식되어 당신의 존재가 잊히지는 않기를, 존엄을 놓지 않길 바라는 기도이기도 하며,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하고자 하는 목소리이기도 하다.

 

 

<많이 좋아졌네요>는 만화를 매체로 선택함으로써 사건이 지시하는 현실과 이미지 서사가 지시하는 예술의 경계에 스민다. <많이 좋아졌네요>와 같이 고립된 이들의 자리를 만들고자 하는 작품을 만나면 번역의 불가능성과 오독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말하고 싶어진다. 사회적 재난은 운 나쁜 개인이 해결해야 하는 우연하고도 불행한숙제가 아니다. 우리가 평소에 그토록 확신하는 의 존립은 삶이 뜻대로 되지 않는 그 지점에서야 비로소 깨질 듯이 취약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 취약한 존재를 온전케 하는 것이 서로를 향한 돌봄일 것이다. 책장을 덮으며 나의 모든 시간에는 누군가의 돌봄이 스며있음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그것은 그만큼 돌봄이 가장 필수적이면서도 가장 비가시적인 행위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사회의 보이지 않는 곳을 그려내는 만화가 더 많이 등장하기를 소원한다. ‘의 일을 우리의 문제로 만드는 예술의 힘을, 나는 믿으므로.



1) 우영. (2024). 많이 좋아졌네요. 우리나비, 254-256p

2) 우영. 같은 책. 259p

3) 권지담. (2019.5.13.). 숨 멈춰야 해방되는 곳기자가 뛰어든 요양원은 감옥이었다. 한겨레. https://www.hani.co.kr/arti/society/rights/893616.html 대한민국 요양보고서 11화 참고.

필진이미지

박근형

2017 디지털만화규장각 신인만화평론 공모전 가작 수상
2021 제4회 혼불의 메아리 공모전 대상 수상
2024 대한민국만화평론공모전 최우수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