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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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들의 만화적 열차(列次/列車) ―이윤희의 만화집 《여름엔 늘 좋은 일이 생긴다》

지치기 쉬운 일상을 우주만큼이나 광대하고 신비한 시간 여행으로 부드럽게 변환하는 데에 능한 작가 이윤희의 만화집 《여름엔 늘 좋은 일이 생긴다》 리뷰.

2026-11-06 박동성

기억들의 만화적 열차(列次/列車)―이윤희의 만화집 《여름엔 늘 좋은 일이 생긴다》


이윤희의 만화집 《여름엔 늘 좋은 일이 생긴다》표지. [Ghostbooks 온라인 신간 도서 소개에서 갈무리]


울퉁불퉁 결속된 기억들이 이윤희의 만화적 우주를 가로지르고 있(어 왔을 것이)다. 그녀의 만화집 《여름엔 늘 좋은 일이 생긴다》1)를 ‘일상 만화 모음집’으로만 단정하는 일이 머뭇거려지는 이유이다. 이 만화집이 그녀가 생활인으로서 경험했던 일상들을 적지 않게 담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러나 상당한 시기적 격차와 엄연한 형태적 차이를 서로 이루는 단편 만화들이 두루 포함된 특성도 동시에 뚜렷하다. 이 특성은 어떤 일관된 체계에 기초한 이해를 어렵게 만드는 주된 요인이다. 


의미를 이미지화하는 것이 만화 예술의 주된 체계이므로 이 만화집 내에서 반복되는 서사 모티프와 이미지에 집중하는 방향은 어떨까? 이 방향은 이윤희의 이번 만화집을 정합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꽤 유익할 것 같다. 이 방향을 취할 때 가장 두드러지는 두 요소는 바로 “추억여행”(35쪽)과 “달리는 열차”(145쪽)이다. 기억과 열차(列車), 이 두 요소가 결속된 분석을 통해 이윤희의 《여름엔 늘 좋은 일이 생긴다》는 그녀가 각기 다른 시기들에 발표했던 단편 만화들을 그 시기적 열차(列次)에 따라 단순히 묶은 일상 만화 모음집의 수준을 벗어날 수 있다. 


<버리기의 우선순위>는 이윤희 만화의 시간관이 어떤 양상들을 응축하고 있는지 가늠하는 데에 좋은 참고가 된다. 이 단편은 본가에 있던 자신의 짐들을 청소했던 만화가의 실제 체험을 소박하게 재현한다. 그녀는 그 짐들에 각인된 “과거의 볼륨”(38쪽)이 얼마나 입체적이고 방대한지 실감한다. 물건들의 물리적 크기 자체가 천차만별로 다를 뿐만 아니라, 물건들의 종류도 윤동주의 시가 담긴 상자, 디스켓, 만화책 등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하다. 그녀는 소품들을 볼 때마다 그것들에 첨부된 상이한 기억들을 떠올린다. 이윤희는 자신과 자신이 회상한 기억들을 각각 칸 안에서 왼쪽 하단과 오른쪽 상단에 배치하고 이 양자를 구분하는 경계를 물결선으로 그렸다. 이 그림은 양자의 존재 양상이 그 시간적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르다는 점을 간명하게 보여준다. 


이윤희의 만화집 《여름엔 늘 좋은 일이 생긴다》 [Ghostbooks 온라인 신간 도서 소개에서 갈무리]


이 대목은 현재를 통과해 가는 인간의 뇌리에 활발히 틈입하여 재생되는 기억의 유동성도 자연스레 드러낸다. 짐을 청소하면서 머릿속으로 추억여행을 홀로 떠난 그녀의 일상은 결국 기억이 모든 시간의 근간에 자리하고 있음을 명료히 확인시킨다. 현재가 “가장 가까운 기억”(67쪽)과 분리 불가하게 뒤섞여 있음은 이미 확인한바, <지난 초여름 전주에 다녀왔습니다>에서 전주로 혼자 여행을 가 영화를 봤던 만화가가 “습관처럼 미래의 나에게 말을 겁니다. 살면서 지금 이 순간이 여러 번 떠오를 거라고”(30쪽) 예상하는 대목은 미래조차도 과거와 깊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은은히 내비친다. 작자 미상의 고소설 《서대주전》을 어린이 만화 형식으로 변용한 <서원전>은 만화 장르에서도 현재까지 무한히 다양하게 해석되는 과거 예술의 영생을, 죽음의 미소가 기이하게 스민 <지저스 크라이스트>는 필연적으로 도래할 죽음 이후의 내세를 “천국과 지옥”(209쪽)의 이미지로 미리 스케치하는 인간의 영성을 보여준다. 

한편, 기억은 모든 사유를 가능하게 하는 근간이기도 하다. 인간은 감각 기관을 통해 구체적 지각을 형성하고, 그 지각은 기억과 긴밀히 섞이(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유에서 한 종류를 점하는 것이 바로 상상이다. 상상도 기억에 깃든 감각적 데이터를 통해 전개될 수 있음을 고려할 때, <온실>이 만화집 내에서 다른 단편들과 이루는 공통점과 변별점을 유의미하게 짚어낼 수 있다. <온실>은 한 여인이 파인애플을 보다가 그것이 인격화된 캐릭터를 상상하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대사와 말풍선이 일절 없는 데다가, 분위기마저 다소 기묘하다는 점에서 평범한 일상을 다룬 다른 수록 단편들과는 상당히 변별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일상에서 자기 혼자 남몰래 엉뚱한 상상을 시시때때로 품어보는 일이 사실은 다반사이지 않은가? 그러한 상상이 기억에 의존한다는 점을 다시 강조하고자 한다. 이 지적들을 통합적으로 헤아려 보면, <온실>이 무언의 상상 이야기로서 이 만화집에 이채롭게 어우러지는 것이 가능함을 이해할 수 있다. 


이윤희의 만화집 《여름엔 늘 좋은 일이 생긴다》 [Ghostbooks 온라인 신간 도서 소개에서 갈무리]


집을 청소하면서 “30년을 3일 만에 횡단하는 열차에서 막 내린 기분”(38쪽)을 느꼈다고 밝힌 만화가의 소감은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추억여행은 결국 상상의 여행이 아닌가? 더 나아가, 상상 자체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다채로운 우주들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여행일 때도 많지 않은가? 여행 수단으로 열차가 또 빠질 수 없지 않은가? 만화집에서 열차가 반복적으로 출현하는 것이 눈에 띌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윤희에게 열차는 시간과 분리될 수 없는 이미지다. <밤 산책>의 여주인공이 “밤에 달리는 열차는 낮과는 다름 느낌을 주었다.”(146쪽)라고 밝히는 대목이 열차 이미지를 지각하는 과정에서 시간의 요소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음을 명확하게 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내달리는 열차가 과거·현재·미래의 단순한 열차(列次)로는 규정되지 못할 시간의 부단한 지속성을 인상적으로 나타내는 이미지라면, 이 만화집의 거의 모든 것을 응축한 인상적 장면으로도 달려가지 않을 수 없다. 134쪽에 그려진 <나의 도시> 속의 한 장면이 그 장면으로 아로새겨진다. 열차를 타고 귀가하여 침대에 눕는 여주인공의 퇴근이 담긴 이 장면은 자못 묘하다. 여주인공이 탑승한 열차가 하얀 별들이 군데군데 박힌 검은 허공을 가로지르는 가운데, 그 열차로부터 내린 그녀가 유유히 떨어지면서 집의 침대에 안착하는 이 장면은 열차 이미지를 든든한 축으로 삼아 고단한 일상과 아득한 환상을 절묘하게 섞어놓았다. 이렇게 이윤희의 만화는 지치기 쉬운 일상을 우주만큼이나 광대하고 신비한 시간 여행으로 부드럽게 변환하는 데에 능하다. 



이윤희의 만화집 《여름엔 늘 좋은 일이 생긴다》 [Ghostbooks 온라인 신간 도서 소개에서 갈무리]


[각주] 


1) 이윤희, 『여름엔 늘 좋은 일이 생긴다』, goat(쪽프레스), 2026. 이 글에서 별도의 출처가 표기되지 않는 한, 괄호 안에 쪽수만 표기된 것은 모두 이 책에서 인용된 것임을 밝힌다.

 

필진이미지

박동성

대학교와 대학원에서 각각 국어국문학사 학위와 국어국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2023 대한민국 만화평론 공모전에서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만화평론가로 등단하였다.
현재 국어국문학과 일반대학원 박사 과정에서 공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