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슈피겔만의 <쥐(MAUS)>, 지금 여기의 리-뷰
동요시키지 못하는 낡은 말들
“그럼에도 나는 그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어제 저지를 수 있었던 일은 내일 또다시 시도될 수 있고, 언젠가는 나와 우리 아이들이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얼굴을 찡그리고 머릿속에서 떨쳐버리고 싶은 유혹이 든다. 이것은 우리가 맞서야 하는 유혹이다.”1)
아우슈비츠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문장을 잠깐이라도 읽고 있자면, 참혹했던 역사로부터 시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오늘날까지도 그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얼마나 마땅한 일인지 알 수 있다.
그러니 아트 슈피겔만의 <쥐(MAUS)>를 읽는 이유에도 많은 부연이 필요하진 않을 것이다. <쥐>는 프리모 레비와 마찬가지로 아우슈비츠 생존자였던 아버지(블라덱 슈피겔만)의 증언을 토대로 재현된 실화 기반의 만화다. 극단적 ‘인종 차별’이 불러온 대규모 학살의 대상이었던 유태인을 그 상징적 의미를 살려 쥐로 표현했다. 마치 우화를 연상시키는 그림과 달리 내용은 지극히 사실적이고, 단순화된 표현 방식은 역사성을 훼손하기보다 오히려 상상의 여지를 자극해 더 많은 인상과 질문을 남긴다. 출간한 지 20년을 훌쩍 넘었으나 여전히 많은 이들이 <쥐>를 읽는다.
<쥐>는 고전이다. 좋은 평가와 해석이 ‘충분히’ 누적될 만큼 오래됐고 유명하다는 뜻이다. 퓰리처상 수상작인 데다 ‘코믹북의 역사에서 최초의 걸작(뉴요크)’이란 평가가 뻔히 선행한다. 이미 수많은 논문과 비평이 내용과 형식에 관한 정밀한 분석을 내놓았다. 그 탁월함과 의의를 논하기엔 리뷰어로서 내가, 말하자면 너무 늦게 태어난 것이다. 읽어야 할 이유는 충분할지 모르나 그것에 관해 떠드는 것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그런 회의감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만화를 오늘 여기서 ‘다시 보고(re-view)’ 싶었다.
<쥐>가 출간될 당시만 해도 만화는 진지한 예술의 영역이 아니었고, 홀로코스트 문제는 쉬이 건드릴 수 없는 무거운 주제였다. 치밀한 칸의 순서 배치와 실사 사진의 삽입 등 전달력을 극대화하기 위한 작가의 노력을 잠시 접어두더라도, ‘가벼운’ 만화에 엄숙한 역사를 담아낸다는 시도 자체가 혁신이었던 셈이다. 이 전제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오늘날 <쥐>를 읽는 것은, 바로 오늘날이기 때문에 이전과 다를 수밖에 없다.
앞서 <쥐>에 관한 찬사에 가까운 정보들을 늘어놓았지만, 사실 이것은 내가 ‘아는 것’이지 ‘느낀 것’이 아니다. 아무리 강력한 혁신이라도 시공간의 풍화작용을 거쳐 살아남기란 어렵다. 역사적으로나 만화사적으로 <쥐>가 갖는 의의는 여전하지만, 그 탁월함을 직접 느끼는 것은 홀로코스트 재현에 대한 엄격함과 만화에 대한 비하적 편견이 전제된 시절에나 가능했다. 사회적 분위기는 시대에 따라 바뀌는 법이고, 기술적 탁월함은 그것이 탁월한 만큼 모방되고 변주되어 공기처럼 익숙한 양식으로 자리 잡는다. 나를 비롯한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엄숙하고 정교한 만화는 너무도 자연스럽다. 감각의 영역에서 모든 것은 그때 거기에서만 유효하다. 사람들은 알지만, 느끼지는 못할 것이다.

△ 이 두 컷에 재현과 이해의 어려움이 응축되어 있는 듯하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것이 기억이 마모되는 과정과 같은 원리라는 점이다. 망각에 관한 논의 역시 진부한 것일지 모르나, 주제가 ‘역사의 증언’인 만큼 이 사실은 새삼스럽게 읽힐 필요가 있다.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타인의 경험이 시간적 · 공간적으로, 또 질적으로 우리의 경험으로부터 멀어질수록 이러한 어려움이나 무능력은 더 심해진다. 우리는 타인의 경험을 ‘주변’의 경험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마치 아우슈비츠에서의 굶주림이 한 끼를 건너띈 사람의 배고픔인 것처럼, 또는 트레블링카에서의 탈출이 로마 감옥에서의 탈출과 비슷한 것처럼 말이다.”2)
1945년 아우슈비츠에서 살아 돌아온 프리모 레비는 이후 평생 동안 말과 글을 통해 증언을 이어 가다 87년 사망했다. 자살이었다. 이 리뷰에서 인용하는 구절들은 그가 죽기 한 해 전 마지막으로 썼던 저서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런 말이 적절할지는 모르겠으나, 이 책을 읽은 많은 이들이 그의 사인(死因)을 납득했다.
나 역시 그랬다.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하나는 자의와 타의가 얽혀 인간성을 잃어야 했던 수용소에서의 시절이 끝의 끝까지 그를 괴롭혔을 것이라는 점. 다른 하나는 생환자로서 시작된 이후의 삶 역시 그에게는 괴로움의 연속이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증언은 그 스스로 짊어진 권리이자 의무였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가혹했던 것 같다. ‘왜 도망가지 않았나’, ‘차라리 자살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런 일이 정말 있었나’. 흔히 피해자들이 마주하는 지극히 전형적이고 잔인한 질문들이 얼마나 빈번히 그를 괴롭혔는지가 치밀하고 논리적으로 대비된 그의 대답들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는 최선을 다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넓어지는 이러한 간극을 메우는 것”3)을 막을 수는 없었고, “젊은이들과 이야기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4)졌다. 마지막 저서는 사실상 해명의 어조에 가깝다. 그 사실조차 마음을 아프게 한다.
<쥐>의 ‘나’를 통해 전달되는 그의 부모 아냐와 블라덱의 모습은, 이런 프리모 레비의 모습과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아버지의 증언을 토대로 재현된’ 만화라고 설명했음에도, 어머니 아냐를 앞에 언급한 것은 아냐가 많은 부분 레비와 더 닮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블라덱에 비해 더 예민한 정서의 소유자였다는 것, 그래서 훨씬 더 괴로워했고,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것, 그렇게 괴로운 와중에도 아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일기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는 점 하나하나가 프리모 레비를 비롯한 많은 증언자들을 연상시킨다. 물론 블라덱 역시 닮지 않았다 말할 수 없다. “아우슈비츠는 아무도 이해 못”(228면) 할 것이라 말하는 순간이나 자주 어딘가 망가진 사람처럼 행동할 때 그 역시 참사로부터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사람이란 사실이 상기된다. 자라면서 모든 부모가 자다가 비명을 지르지는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나’가 어떤 마음으로 기록을 결심했을지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그것은 부모와 자신 모두를 위한 각오였을 것이다.

△ 『쥐(MAUS)』는 총 두 권으로 나뉘어 발간되었는데 해당 컷은 2권의 도입부다. 1권이 엄청난 성공을 거둔 뒤임에도 그는 ‘최근 기분이 우울하다’고 고백한다.
책상 아래 쌓인 수많은 시체들이 그가 직접 경험자들로부터 넘겨받은 간접 증언자의 역할에 느끼는 심리적 압박감을 보여준다. 이미지에 집중하기 위해 영문판을 가져왔다.
은유라는 양날의 칼
(일부러 센 표현을 사용하자면) ‘전염병’으로 외출을 자제한 지 몇 주째다. 그러니까 내가 오늘 여기서 하필 이 만화를 집어 든 이유는, ‘생존’이라는 말이 비교적 덜 은유적으로 이해될 시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도 이해 못 할 아우슈비츠’라는 특수한 역사적 사건을 그 자체로 기억하기 위해서. 시공간의 장벽을 거쳐 끝내 마모된 채로 도달하고 말겠지만, 오래전 먼 곳에서 전송한 증언의 말들을 조금이나마 선명히 전달받고 싶었다. 말하자면 어설픈 ‘은유’를 피하기 위해서. 하지만 책을 읽고 생각을 거듭할수록 일부러 시기를 노려 교차해 읽는 것이야말로 오히려 은유를 가중하는 것은 아닌지 뒤늦게 우려가 된다. 이 책을 읽게 된 맥락적 목적을 글의 후반에야 밝히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다만 오늘 옮겨 적은 증언들이 정교한 은유로 구성된 한 편의 만화를 경유해 접한 것인 만큼, ‘은유’라는 것에 대해 조금 더 유연해질 필요도 있어 보인다. 성급한 은유는 문제를 환원하고 추상화해버리는 문제가 있어 조심해야 하지만, 정성스런 은유는 오히려 본질에 다가서길 허락한다는 것을 이 만화가 보여주고 있다. 지나간 일이라서, 혹은 타인의 것이라서. 아무리 끔찍하고 부당한 것일지라도 그것들 모두는 더는 생생한 ‘지금’ ‘여기’의 것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은유의 우회적 속성을 지닌다. 단순한 인물형과 칸과 칸 사이 공백이 독자에게 적극적인 상상을 요구했듯, 기억과 증언 역시 마찬가지다. 만화와 비유라는 양식의 선택이 논란과 극찬을 함께 불러왔듯 은유적 해석 역시 양날의 칼이다. 타인의 경험을 타자화하는 무례가 될 수 있는 동시에 조금이나마 이입해 경청하려는 예의도 될 수 있다.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품는다.
요즘 나를 가장 절망스럽게 하는 사실은, 이 일련의 일들이 종결된 이후에도 거의 모든 것들이 계속되리란 사실이다. 비관은 힘이 세서 열 가지 믿음직한 소식보다 한 가지 나쁜 사건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보지 않았다면 좋았을 일들을 짧은 기간에 많이도 목격했다. 상대의 절박함을 어떻게 악용하는지, 불안과 분노를 얼마나 비열하게 표출하는지, 태생적 차이나 이해관계의 다름을 이유로 타인의 고통 앞에서 어떤 표정들을 지을 수 있는지, 전부 목격했다. 바이러스가 지나가고 난 이후에도 기억은 상흔이 되어 일상에 가라앉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시기이기에 압박감 속에서도 기록을 계속했던 이들의 당부가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같지는 않지만 완전히 다르지도 않았을 풍경을 바라보며 어쩌면 그들도 했을 질문, 세상은 점점 더 나빠지는 것일까? 단순히 비관적으로만 보이는 이 막연한 질문에 성급히 대답하는 대신 나는 “어제 저지를 수 있었던 일”5) 에 대해 좀 더 고민해보려 한다.
- 참고문헌
김대중. “<쥐>에 나타난 홀로코스트 재현의 윤리와 교육적 의의 연구”. 영어영문학연구, vol.58, no.3 2016.9, 19-46.
1) 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돌베개, 2014, 60-61면.
2) 프리모 레비, 앞의 글, 192면.
3) 프리모 레비, 위의 글, 192면.
4) 프리모 레비, 위의 글, 247면.
5) 프리모 레비, 위의 글, 6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