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한영웅>-굳이 네가 캐리할 필요 없어.
스콧 맥클라우드는 만화를 “의도된 순서로 병렬된 그림 및 기타 형상들”이라 말했다. 병렬된 그 사이에는 홈통이라는 것이 존재하는데 우리는 그곳을 채워 그림과 그림 사이의 틈을 메우려한다. 그림은 멈춰있지만 만화는 움직인다. 그 홈통을 채우려는 우리의 심리 때문이다. 만화와 영화와의 차이는 프레임 수의 싸움이다. 프레임이 올라갈수록 우리는 운동성을 느끼고 그 운동성이 주는 서사는 문자가 필요 없는 비언어적 서사를 형성한다. 액션은 가장 높은 프레임으로 구성된, 만화의 본질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표현할 수 있는 장르라 본다. 그리고 그 액션 중에서도 학원 격투물, 혹은 일진 격투물은 오늘 날 웹툰 시장을 견인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태준 월드’를 마치고 선택한 네 번째 작품은 서페스/김진석의 <약한영웅>이다. 개인적으로 참 아끼는 작품으로 최효만, 하이바 그리고 진태오까지 에피소드는 2019년 학원폭력물중 가장 신선한 카타르시스를 주었다. 소위 ‘찐따’의 서열에서 일진들에게 시달릴 것 같은 ‘예쁜’ 남자가 오히려 일진들을 폭력으로 제압한다. 그 판타지는 완력, 무술 혹은 초능력도 아닌 온전히 계략으로 실현시킨다. 제목처럼 <약한영웅>은 다윗과 골리앗을 담고 있다. 오늘날 ‘먼치킨’류 캐릭터가 주류를 끌고 가는 상황에서 <약한영웅>의 주인공 연시은은 신선한 반전이었다. 이에 힘입어 연재하자마자 짧은 시간에 일요웹툰 1위를 차지했었다.
연시은의 싸움은 결투라기보다 일방적인 폭행에 가까운데 ‘약한영웅’인 그가 상대와의 전력 차를 좁히는 방법은 상황을 설계하고 도구를 이용하는 지략과 군중을 지배하는 쇼맨십이다. 연시은과 서준태의 시선을 번갈아가며 긴장감을 쌓은 후에 보여주는 일방적인 폭행은 속칭 ‘사이다’라고 비유되는 폭발적인 카타르시스를 낳는다. 그래서 독자들 사이에선 제목의 ‘약한’이 ‘Weak’가 아닌 ‘drugged’라는 말장난까지 나왔다. 그런데 1위 자리를 같은 장르인 <싸움독학>에게 내주었다. 그것이 굳이 <약한영웅>을 불러온 이유이다. 일진물의 장르정의를 찾기 위해 시작한 본 여정은 이제 박태준 작가를 벗어나 다른 작품을 찾아야했고 동일 장르이자 같은 요일의 경쟁 작품으로서 <약한영웅>은 유일했다.

1위에서 3위로 근소한 변화지만 <약한영웅>의 후퇴에 독자들의 니즈는 여전히 ‘인싸 편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의 예견처럼 <싸움독학>은 빡고 에피소드 이후, 성태훈 에피소드로 넘어가면서 성태훈을 찾아가는 도전자로 위치가 바뀌었다. <인생존망>에서 장안철은 반성이 아닌 빙진우로서 인생을 즐기고 있다. <외모지상주의> 역시 박형석은 4대 크루 통합시키느냐 정신이 없다. 시작은 서열 최하위의 자구책 혹은 저항 의지였지만 이제는 앞장서서 기존의 체제를 견고하게 만들고 있다. 이전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박태준의 작품은 아싸라는 계급을 뚫고 인싸, 그것도 ‘핵인싸’라는 중심부로 귀속하고자 하는 욕구를 자극한다. 그의 연출은 아싸라는 서열 최하위의 치욕스러운 부조리를 시각화시키고, 인싸가 되면 따라오는 이성의 호감을 성애화해 두 경계를 도드라지게 한다.
<약한영웅>의 경우, 연시은은 중학교시절 유일한 친구인 안수호와 같이 학폭의 피해자가 였다. 안수호는 연시은을 보호하고 제도권 안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나 결과적으로 안수호는 옥상에서 추락하고 치명적인 뇌손상을 입는다. 연시은은 이 경험이 트라우마로 남아 뛰어난 머리를 바탕으로 자기를 괴롭히는 일진들을 철저하게 짓눌러버린다. 시작은 박태준 월드와 마찬가지로 학폭의 피해자가 가해자들에게 저항하는 플롯을 품고 있다. 공권력의 부재로 피해자는 가해자들과 똑같이 물리적인 폭력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카타르시스를 생산한다.
고등학교 입학직후 최효만을 시작으로 연시은이 싸움에서 이기면 더 강한 상대가 복수하러오는 에스컬레이터식 구성은 분명 인싸로 편입하고자 하는 욕구를 자극한다. 그것이 작중 ‘셔틀패치’ 랭크제도다. 다만 박태준 작품과 다르게 가시적인 보상으로 오지 않으며, 주인공 일행 그 누구도 그 서열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괴롭히는 악당들이 그 서열에 예민하다. 연시은이 싸움을 반복하면서 얻는 보상은 트라우마의 치유인 우정이다. 짝꿍인 서준태에게 쌀쌀맞게 대하던 그는 회차를 거듭하면서 미소를 보이고, 서준태의 친구인 임주양과도 역시 친구를 먹는다. 또한 그의 곁에는 나백진의 연합으로부터 전면에서 막아주는 지켜주는 박후민, 고현탁과 연합과 무관하게 연시은의 뒤를 지켜주는 진가율까지 있다. 작품은 “예쁜” 연시은을 중심으로 브로맨스의 느낌까지 줄 정도로 우정을 강조한다. ‘구독과 좋아요’를 눌러 달라는 <싸움독학>이나 ‘벌꿀 오소리’가 된 빙진우의 <인생존망>, “한 그룹으로 당연하게 생각되어지는 것이 기뻤다.”라고 말한 <외모지상주의>과는 보상이 다르다. <약한영웅>의 행보는 일본의 경파물에서 이어진 <짱>, <럭키짱>, <니나잘해>, <삐따기>류의 학원 폭력물과 닮았다.

박태준의 작품과 비교해 똑같이 공권력의 부재를 설정하고 있다. <외모지상주의>는 청소년 범죄조직 ‘4대 크루’가 있는데 그 가장 중심에는 HNH라는 작중 대기업의 총수인 최동수 회장이 주도하고 있다. <싸움독학>은 인터넷 방송에서 실시간으로 싸움장면이 송출되는데도 어느 누구 제지하는 이가 없다. <인생존망>에서 선생과 부모는 학폭에 대해 전무한 것으로 등장한다. <약한영웅>의 경우도 나백진이라는 셔틀패치 랭킹 1위의 존재가 있다. 나백진은 영등포 고교 연합 ‘만월’을 무너뜨리고 자기중심의 연합을 재건한다. 연합의 힘을 이용해 KHG모직의 교복을 강매시켜 막대한 수익도 창출한다. 기존의 학원 폭력물이 고등학생이라는 신분의 한계를 드러내고 그 속에서 학생들끼리 싸우는 것에 반해, 일진 격투물은 공권력의 부재 속에 학교안의 서열이 사회 전반, 자본주의의 서열 정점으로 묘사된다.
박태준의 작품은 공권력이 나를 지켜줄 수 없다면, 내가 그 체제의 정점에 올라가 지배자의 위치에 올라가려하고 <약한영웅>은 소외된 이들이 공권력을 대시할 연대를 새로 구축하겠다고 말한다. 그래서 박태준의 주인공들은 체제에 진입하기 위해 능동적이지만 <약한영웅>의 주인공들은 외부의 침략 막기만 하기에 수동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약한영웅>의 목소리가 오늘날 독자들에 먹히고 있는지 생각해봐야한다.

‘캐리(Carry)’라는 은어처럼 요즘 게임은 유저가 홀로 난관을 극복하고 팀원들을 끌고 갈 수 있는 ‘캐리’가 되는 구조로 되어있다. 5:5 AOS게임의 <리그 오브 레전드>부터 1:100 서바이벌 FPS게임인 <배틀 그라운드>처럼 유저는 그 어려운 상황을 홀로 극복해 ‘캐리’하고 모두에게 인정받는 희열을 느낀다. 만화도 마찬가지다. <드래곤볼>의 손오공부터 더 나아가 <원펀맨>의 사이타마는 펀치 한방에 작중 모든 캐릭터를 쓰러뜨린다. 웹툰의 경우도 <신의 탑>의 스물다섯번째밤, <노블레스>의 라이제르 등부터 제목이 <하드캐리>인 작품도 연재되고 있다. 독자들이 열광하는 주인공은 영웅이기보다 인정욕구를 대리만족 시켜주는 아이돌이다. 뒤에서 몰래 시민의 안전을 지키는 배트맨보다 스스로 아이언맨이라고 밝히는 토니 스타크에게 더 열광하는 것이다.
재원고에 이진성, 홍재열, 진호빈, 이은태 등이 있어도 모든 갈등을 극복하는 절대적 존재는 주인공 박형석이다. 연시은도 안수호 에피소드까지 ‘사이다’평가를 받았다. 악인이 주인공을 괴롭히고 연시은은 기회가 올 때까지 참는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조건이 충족되면 일방적으로 악인을 폭행하고 그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안긴다. ‘캐리’ 서사인데 그 방법에서 여타 주인공들과 달리 연시은이라는 캐릭터는 설계를 통해 악인을 굴복시키기는 지능형 캐릭터이기 신선했다. 하지만 소위 ‘바쿠팸’이라는 은장고등학교 출신 연시은, 서준태, 임주양, 진가율, 박후민, 고현탁 맴버가 완성되면서 이들의 연대를 강조하기 위해 주변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게다가 연시은이 위기에 몰리는 상황도 만들었다. 연시은이 맞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고, 판을 짜는 계략 대신 친구로부터 배운 기술을 쓴다거나 친구들이 위험에 빠진 그를 도와주거나 한다.
만화의 알레고리에 독자들이 공감하기 때문에 흥행한다고 본다면 생각해볼 문제다. 일진물에 묘사되는 비행, 폭력의 수위를 염려하는 것보다 왜 독자들이 일진물에 열광하는지에 더 집중하고 싶다. 네 작품은 학교폭력을 학교나 경찰이 막을 수 없다는 지배적인 생각이 작품 내에 ‘그렇기 때문에 주인공은 싸울 수밖에 없다’라고 묘사된다. 작중 안티테제는 학교의 서열의 정점이자 자본가 계층으로 묘사된다. 돈이 많기 때문에 공권력도 그를 건들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점이 오늘날 독자들이 바라보는 사회모순인 것이다.
박태준의 작품은 모순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개인의 노력으로 ‘캐리’를 하고 모두에게 인정을 받아 신분상승을 하는 것이다. 신분만 상승한다면 그에겐 많은 부와 이성의 호감이 기다린다. 반면 <약한영웅>의 연시은은 ‘캐리’를 하지만 타인들의 인정에 대해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신경 쓰는 자들이 악인들이다. 다수의 인정과 신분상승보다 작품이 말하는 대안은 일진이든, 찐따든 주인공들은 연대를 만들어 공권력을 대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전자에서 보여준 금전적 보상이나 이성의 호감 등은 등장하지 않는다.

조회수 순위 하락은 단지 오늘날 독자들이 ‘캐리’라고 말하는 만족감에 중독되었기 때문이다. 분명 연재 초기에서 느끼는 소위 ‘캐리’하는 맛이 약해졌다. 하지만 필자는 그런 점이 좋다. 박태준 작품에 따라오는 비판처럼 개인의 노력이 시스템의 어느 부분까지 파고들 수 있냐는 점 때문이다. 지난 번 글에서 작가는 <인생존망>의 임슬기를 희화화 시키고 그가 겪는 폭행을 가해자만 바꾸어 그대로 유지하는 것으로 갈등을 해결했다 비판했다. 찐따라는 계급의 인물을 박태준 작가는 그럴 대접을 받을 짓을 했기 때문이라 표현한다. 그러나 <약한영웅>의 서패스 작가는 84화에서 친구인 연시은을 구하기 위해 일진에게 대항하는 서준태의 가장 숭고한 자기희생으로 연출한다. 은장고등학교의 연대, 우정은 잘난 사람이 모자란 사람을 ‘캐리’해가는 것이 아닌 서로가 서로의 부족함 점, 어려운 점을 보듬어 주며 단단하게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작품을 ‘참으로 아끼는 작품’이라 표현한 것이다. 한 독자로서 이 작품을 매주 챙겨보는 이유는 이 점이다. 어떤 앤딩이 준비되어 있는지 모르겠지만 부디 이 작품이 훗날 학폭에 직간접적으로 피해 입은 학생들에게 좋은 작품으로 기억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