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언젠가 기회가 되면 해치워야지’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절대 그런 일 없고 실은 딱히 그럴 생각도 없는 일이 몇 가지 있는데, 내게는 그중 하나가 삼국지 읽기다. 삼국지라… 그거 실화였던가? 진심으로 헷갈렸다고 고백하면 삼국지 팬들이 비분강개를 터뜨릴 것만 같다. 근데 진짜 모르겠는데요..ㅠㅠ
어쩌면 이런 문외한을 위한 것이 아닐까. 역사 웹툰계의 설민석(?) ‘무적핑크’가 <조선왕조실톡>, <세계사톡>을 거쳐 '이번엔'1) 삼국지를 책임지겠다고 나섰다. 제목은 <삼국지톡>, 줄여서 <삼톡>이다. 과연 <삼톡>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입문자들을 쉬게 할지는, 일단 읽어봐야 알 수 있겠지.
난생처음으로 삼국지 도전!
1) ‘이번에’라고 했지만 사실 연재한 지 벌써 2년째다. 거참, 이래서 초짜는 안 된다니까?
직관적인 현지화 전략
길고 복잡한 이야기 입문에 필요한 것은? 정답은 ‘재미’와 ‘눈높이 설명’이다.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삼국지도 안 읽고 뭐 했냐고 물으면 나름대로 할 말은 있다. 풍문으로만 들어도 나오는 인물이 너무 많은 것 같고(참고로 기억나는 인물들은 유비, 관우, 제갈량 정도. 똑똑하고 힘센 사람들이란 것 정도는 알고 있다), 보니까 단위도 ‘8척’ 이런 거 쓰던데… 왠지 어미도 성경처럼 고유의 어투가 있어 말해줘도 못 알아들을 것 같다(실제로 어떤지는 안 읽어봐서 모르지만). 역시 너무 오래된 이야기는 좀…. 문외한들은 게으르고 겁 많은 법이다.
하지만 이럴 때야말로 일타강사가 활약할 때. 무적핑크의 최대 강점은 그게 500년 전 일이든 천 년 전 일이든 무엇이든 간에 ‘요즘 사람’의 시선으로 재가공해낸다는 것이다. 일종의 로컬라이징이랄까. <삼톡>은 싸움만큼은 칼과 창을 고수하지만, 그 외 대부분은 아주 직관적으로 현대화한다. 그중에서도 백미는 작중 인물의 나이를 해석하는 방식이다. 수명이 짧으니 조혼이 조혼도 아니었을 시절이지만 <삼톡>에서 10대는 미성년자다. 근엄한 업적을 자랑하는 무예 전사 장비(유비, 관우만큼 중요한 사람)가 교복 입고 급식 먹으며 인스타 하고 페북 한다는 소리다.
△ △ 무적핑크의 로컬라이징은 볼 때마다 탁월하다.하지만 ‘미성년자’ 설정에 충실한 만큼 말은 이래도 술 마시지 않음(중요)
사실 당대의 맥락을 제거한 단순 대입식의 접근법이 역사를 다루는 데 적합한가 의문이 들기도 하지만, 어쨌든 ‘요즘 사람’들이 거의 이천 년 전 일에 이해를 넘어 재미까지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적핑크만의 거침없는 로컬라이징 덕이 분명하다.
다만 개인적으로 느꼈던 <삼톡>의 진짜 아쉬운 점은 너무나 최신의 감각이라 어지간해선 내가 그 ‘요즘 사람’이기 힘들다는 것. 교양이 부족한 탓이다. 몇 개의 유행어 정도가 아니라 향유하는 문화 자체가 다르고, 그마저도 넷상에서 통용되는 것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에 이를 모른다면 가뜩이나 어려운 삼국지, 차라리 책으로 읽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정리하자면 이렇다. 대서사인 만큼 다양한 연령대가 대거 섞이는 데다 주요 인물들도 점차 늙어간다. 그런데 지위직책보다 세대를 강조한 상태에서 ‘톡’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니 주 타겟은 10대, 20대일 수밖에 없다. 아무리 쉽고 재밌는 게 좋다 해도 그렇지, 나이 들었다고 무시해도 되는 건가요?! 따져봤자 <삼톡>에선 ‘이넘덜아,,,우덜이,, 우습냐,,!!’ 휴먼아재체로 가공될 뿐이다.
ㅇㄱㄹㅇ ㅂㅂㅂㄱ. 혹시 ‘페이스북’과 ‘틱톡’ 세대를 구분 못 하는지? 지금 주춤했다면 당신 역시…. 넷상에서의 세대교체는 정말 가차 없다. (요즘 ‘넷상’이라는 말은 쓰나요?ㅠㅠ)
미모는 덤?
뭐야, 얜 뭔데 이렇게 잘생겼어? 회차를 거듭할 때마다 장르를 의심하게 하는 공들인 미인들이 한 명 한 명 추가된다. ‘벌써부터 이렇게 잘생겼으면 초선이는 대체 어떻게 그리시려는 거지?!’ 같은 댓글을 베스트댓글로만 400개는 본 것 같다. 초선? 이름을 들으니 생각난다. 맞아, 엄청난 미인이었다지. 하지만 삼국지 문외한인 내가 언제 나오는지 알 리가 없다. 궁금해서 미리 이미지 검색해봤다(‘삼국지 초선’이라 검색해야지 안 그러면 정치인 사진 잔뜩 나옴: 初選).
제대로 검색했는지 2D와 3D, 다양한 그림체와 실사를 넘나들며 상당량의 미인도가 쏟아진다. 대체로 청초한 미인이구먼. 그런데 함께 검색된 남성 영웅들과 같은 출신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이 비주얼 차이는 뭐란 말인가. 몸도 마음도 우락부락한 이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희고 아름다워 기이할 정도다. 거기다 94%의 확률로 거의 언제나 헐벗고 있다. 피 터지게 싸운 뒤 트로피처럼 손에 넣는 세계관 최고 유일 미인, 뭐 그런 거겠지(아님). 남성향 영웅물은 왜 늘 이런 식일까. 이왕 만화로 그리는 거 그렇게 예쁜 게 좋으면 자기들이 예뻐지면 되잖아, 바보들?
마치 이런 불만에서 태동한 듯 <삼톡>엔 너무도 많은 미인이 나온다. 너무도… 많이. 야호!!! 독자들의 환호성이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만화의 전달력을 위해선 너무 예쁘기만 한 작화는 작품에 해롭다는 주의인데, 로컬라이징이라더니 결국 미인계로 가는 것인가 씁쓸…해지기엔 이르다. 참을성 있게 보다 보면 <삼톡>이 미인뿐 아니라 벌레, 음식물쓰레기, 송장, 폐허부터 성벽까지. 특별히 가리지 않고 골고루 잘 그린다는 것이 금세 확인된다. 예쁜 것만이 아니라 추하고 더러운 것, 잔인하고 끔찍한 것, 초라하고 웅장한 것 모두 가능하다. 진폭 넓은 그림체는 전쟁을 다룬 대서사시에 얼마나 중요한가. 특히나 배경은 생략하기 일쑤요, 얼굴은 ‘예쁜’ 것만 취급하는 것이 대세인 작금의 웹툰 판에서 예쁜 것‘도’ 잘 그리는 능력은 좀 더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그림 작가가 괜히 따로 있는 것이 아님을 몸소 그림으로 보여주시는 중.
거기다 ‘외모지상주의 어쩌구’를 잠깐 괄호 안에 넣어뒀을 때, <삼톡>에서 미(美)가 기능하는 광경 역시 흥미롭다. 마치 국민 프로듀서라도 뽑을 기세로 각양각색의 취향을 노린 미인군단이 독자의 정치적 분별력을 흐리는 듯하다가도, 깊어진 눈빛과 우뚝 선 콧날에 없던 사연도 만들어줘야 할 것 같은 충동을 느낀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인물에 이입하게 하는 것만큼 작중 몰입에 도움이 되는 것도 없다. 변방의 단역 취급받던 이의 능력이 재평가받고, 대립하는 두 인물 앞에서 독자는 어느 한쪽 편을 들기 주저하게 된다. 전쟁이란 게 바로 그런 것 아닌가. 서술자에 따라 평가가 갈리며 강자와 약자, 승자와 패자는 있어도 악인과 선인은 없는 법. 위, 촉, 오의 파벌을 거느리며 각각의 인물들이 저마다의 팬덤을 가진 삼국지에 걸맞은 연출일 수도 있겠다.

△ <삼톡>은 그림에도 주석이 필요하다.2)
컷툰, 설명과 갑론을박의 장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특징은 <삼톡>이 스크롤 형식이 아니라 ‘컷툰’ 형식의 웹툰이라는 점이다. 위아래가 아니라 좌우 방향으로 넘기고, 매 컷에 댓글 창이 존재한다. 일반적인 웹툰이 휘리릭 만화를 본 뒤 댓글을 통해 후기를 떠드는 식이라면, 컷툰은 거의 ‘공독회(共讀會)’에 가깝다. 반에서 애들이랑 같이 티비 보는 느낌? 광장에서 같이 월드컵 보는 느낌? (세대를 고려해 비유를 둘로 나눕니다.)
이러한 특징은 장점일까, 단점일까? 사실 컷툰 형식이야말로 로컬라이징이나 미모 대첩보다 더 분명한 장단점을 가지는 것 같다.
입문자로서 느끼는 가장 큰 장점은 설명이 있다는 것. 새 인물이 나올 때마다 이게 누구야? 누가 뭔가를 결심할 때마다 그래서 그게 뭐 어쨌다는 건데?! 하면서 발을 동동 구를 수밖에 없는 입문자에게 자칭 삼국지 박사들이 주석을 제공한다. 얘가 유비라고? 귓불은 왜 이렇게 커? ‘유비 우습게 보면 안 됩니다. 없던 시절에 말 타고 쌍검 휘두르던 사람이에요.’ 공손찬, 애가 참 괜찮아 보이네. ‘유비보다 더한 깡패입니다.’ 이런 식이다. 초짜가 일희일비하며 설레발 치지 않게 조언해주는 어르신 느낌이다.
하지만 가장 큰 단점 역시 설명이 많다는 것. 새 인물 나오는 것도 벅찬데, 원조 삼국지로 이미 결말까지 알고 있는 ‘으른’들이 매 컷 원치 않는 설명까지 늘어놓는다. ‘따지고 보면’, ‘생각해보면’, ‘지금 보면’ 같은 말들로 시작하는 댓글들은 일단 5줄은 기본. 아예 사전을 긁어온 것들도 많다. 뉴스 기사도 요약봇이 있는 시대에 너무한 것 아닌가요. 거기다 마니아들이 모인 만큼 서로 오류를 지적하느라 바쁘고 각자의 취향과 정의관에 따라 갑론을박이 끊이지 않는데… 엄마, 우리 집에 언제 가?
군중 속에서 내밀하고 진지한 분위기를 잡는 것이 어려움은 컷툰이 필연적으로 가지는 한계를 암시하는지도 모르겠다. 컷툰은 만화인 동시에 그 자체로 커뮤니티이기도 해서 작품에 온전한 몰입을 어렵게 한다. 실제로 물리적으로 만화의 흐름을 끊는 것도 사실이고, 댓글을 보든 보지 않든 늘 다른 이들의 반응을 염두에 두면서 작품을 읽기 때문이다. 거기다 진지한 와중에 예상 못 한 드립이 나올 수도 있고, 사실 50퍼센트가량은 그냥 예쁘다는 댓글이다. 그래서 잘 모를수록 다 보고 나서 내가 뭘 본 건지 헷갈릴 때가 많다. 나쁘게 말해 산만하다.
2) <삼톡>에는 이외에도 색깔별로 정말 정말 많은 미인이 등장하지만, 삼국지 혹은 미에 능통한 독자일수록 각 인물이 어떻게 형상화되고 어떻게 변해가는지 지켜보는 것 자체가 큰 즐거움인 듯하다. 말하자면 얼굴만 보여주는 것조차 스포일러가 되는 셈…. <삼톡>이 그려내는 미의 춘추전국시대가 궁금하다면 정주행을 추천한다. 웬만히 어지간하다면 필히 당신 취향도 있을 것이다.
결론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입문자용으로 <삼국지톡>은 역시 좀 애매하다 해야 하나? 삼국지 말고도 신세대 교양, 컷툰, 거기다 ‘나루토’, ‘해리포터’, ‘마블 히어로’ 등 오타쿠적 교양까지 함께 요구되기 때문에 진입 장벽이 높은 편이다.
하지만 독자가 역량만 갖춘다면 정말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세대별 카톡 말투를 쥐락펴락 구사하는 무적핑크의 솜씨나 회차를 거듭할수록 광기와 근심, 노화를 드러내는 이리의 솜씨 모두 요즘 말로 ‘맛집’이다. <삼톡>만의 세계관이 자리 잡으면서 낯섦에서 오던 산만함도 정돈되고, 일단 알아듣는다면 댓글 개그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결국 뻔한 소리지만 뭐든 읽는 당신에게 달린 법. 그래요, 노력하면 삼국지고 세대 통합이고 안 될 게 뭐가 있겠습니까.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그럼 저는 이만,, 다음 화 보러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