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고나 커피 대신 <닥터 프로스트> 정주행 1.
‘정주행
1)’ 하기에 특히 좋은 웹툰들이 있다. 예를 들어 호흡이 긴 웹툰이 그렇다. 솔직하게 밝히자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연재되는 웹툰의 특성 상 지난 줄거리가 가물가물할 때가 많다. 생활툰
2)같이 호흡이 짧은 경우에는 이전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도 감상하는 데에 지장이 없지만, 호흡이 긴 작품은 이전 줄거리를 모르면 제대로 된 감상이 어렵다. 그래서인지 몇몇 웹툰들은 나 같이 기억력이 부족한 독자를 배려해서 지난 화의 하이라이트 컷을 맨 앞단에 보여주는 방식으로 흐름을 이어가고는 한다. 마치 드라마 시작 전에 하는 ‘지난 줄거리’처럼 말이다. 바로 이러한 웹툰이 정주행 하기에 알맞다. 특히 시즌이 종료된 후 한꺼번에 정주행 하면 흐름이 끊기지 않고 끝까지 감상할 수 있으니 금상첨화다. 단, 정주행하는 작품은 필수적으로 ‘흡입력’이 있어야 한다. 정주행이란 모름지기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꼬박 하루를 할애하는 행위이기하기 때문이다. 작품에 몰입하기 힘들 정도로 지루한 작품이라면 끊김 없이 정주행하기 힘들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종범 작가의 <닥터 프로스트>(이하 <닥프>)는 정주행하기에 ‘딱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정주행을 권하는 글이니 만큼 스포일러나 감상에 해가 될 수 있는 부분은 본 글에서 최대한 자제하였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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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프>는 ‘프로스트’라는 천재가 일련의 사건을 해결하는 만화이다. 천재가 사건을 해결한다는 것만 놓고 보면 마치 「명탐정 코난」이나 「셜록」같은 탐정만화일 것 같다. 그러나 독특하게도, <닥프>는 ‘심리학’에 기반을 둔 만화이다. 즉 프로스트는 천재 ‘탐정’이 아니라 천재 ‘심리학자’이며, 용의자의 논리적 오류를 바탕으로 범인을 ‘검거’ 하는 대신에 ‘내담자
3)’의 심리 상태를 분석하여 솔루션을 ‘처방’한다. 현장에서의 전개 양상도 사뭇 다르다. 물적 증거를 채집하여 범행과 범인을 특정하는 대신에 내담자의 심리 파악을 위한 정보를 수집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1) 연속 출판물, 드라마, 영화 시리즈물을 차례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것을 의미
2) 생활+cartoon의 합성어로 일기와 같이 일상생활을 다루는 만화
3) 심리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담자에게 도움을 받으러 오는 사람
△ 「닥프」의 주인공 프로스트 교수. 흰 백발과 무표정이 인상적인 천재 심리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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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심리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이 작품의 엄청난 경쟁력이다. 실제로 이종범 작가는 준비했던 여러 기획안들이 무산된 반면, <닥프>는 심리학이라는 소재를 다룬 덕분에 시놉시스나 테스트용 원고 없이도 연재가 결정되었다고 밝혔다. 작가는 심리학이라는 전문소재를 다루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있지만 필자는 전문소재도 전문소재 나름이라고 본다. 여러 전문분야 중에서도 심리학은 대중의 호감이 높은 편이기 때문이다. 검증되지도 않은 수많은 심리테스트가 도처에 있다는 것이 그에 대한 방증이다. 즉 심리학을 다룬다는 것은 비전문적 소재뿐만 아니라 다른 전문 분야-예를 들어 양자역학이라든가 철학 같은-에 비해서도 높은 경쟁력을 갖는다. 게다가 심리학을 이용하면 사건이 해결될 때의 쾌감이라든가 몰입을 돕는 서스펜스처럼 탐정만화가 가진 장점은 알뜰하게 취하면서도 ‘범인은 이 안에 있다’든가 ‘진실은 언제나 하나’라는 구태의연함은 세련되게 빗겨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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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러한 장점들은 심리학을 ‘제대로’ 이용했을 때에만 빛을 발할 수 있다. 문제는 심리학을 제대로 이용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까다롭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바와 같이 근거 없는 심리테스트 수준으로 에피소드를 진행한다면 작품이 조잡해 질 것이다. 그렇다고 전문지식을 지나치게 깊이 다룬다면 재미없는 학습만화가 될 것이다. 따라서 정립된 심리학적 연구 결과를 크게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적당한 과장을 섞어 재미있게 버무려 내는 균형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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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닥프>는 이 쉽지 않은 균형을 훌륭하게 맞추어 낸다. 프로스트라는 천재 심리학자의 캐릭터가 구축되는 작품 초기에는 흥미를 유발하는 장치로써 심리학을 사용한다. 일례로 첫 화에서는 칵테일바에서 일하는 프로스트가 데이트 중인 손님의 몸짓만 보고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상대방에게 호감이 있는지, 그리고 더 나아가 연애가 성공적일지를 정확하게 맞춘다. 그 몸짓이라는 것도 대단한 것이 아니라 심리학 관련 교양서적을 한 권이라도 읽었으면 대부분 알만한 수준이다. 이는 과장되고 무리한 설정임이 분명하나 프로스트가 대단한 천재라는 점을 독자에게 각인시키고, 심리학에 대한 흥미를 유발하는 장치로서는 적합하다. 일단 이렇게 독자의 관심을 끈 후에 좀 더 전문적인 심리학을 슬쩍 드러낸다. 이미 작품 초반에 심리학에 흥미를 느낀 독자는 생소한 심리학적 개념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식으로 독자는 피리 부는 사나이를 좇는 아이들처럼 정신없이 이야기를 따라가게 된다.

△ 첫 화인 ‘텅 빈 남자’(왼쪽)에서는 프로스트 교수의 천재성을 어필하는 용도로 심리학을 사용한다.
그리고 작품이 진행될수록 ‘터널의 끝에는 빛이 있는가’(오른쪽) 에피소드처럼 본격적인 심리학 용어나 증상이 등장한다.
주목할 만한 것은 심리학적 지식이 적지 않게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닥프>는 전혀 딱딱하거나 지루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닥프>의 전반적인 서사가 충분히 극적이고 과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프로스트가 내담자를 대하는 방식이 그렇다. 작품 내 프로스트는 심리 상담사라기 보다는 ‘정신과 의사’나 ‘프로파일러’에 가깝다. 의사는 병원에, 프로파일러는 범죄자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본다면 <닥프>는 병원에서의 긴박함이나 범죄자와 대면 상황에서의 긴장감을 충분히 차용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또한 사실상 ‘심리상담’으로 해결하기 불가능한 문제를 앞서 각인시킨 프로스트의 천재성에 의존하여 해결해 버리기도 한다.
△ ‘검은파도’(왼쪽)와 ‘평강공주의 눈물’(오른쪽) 에피소드 中. 「닥프」의 서사는 전반적으로 과장되어 있으며,
이로 인한 긴장감 넘치는 전개는 작품의 몰입을 높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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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이러한 과장은 철저하게 ‘심리학적 지식을 크게 왜곡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만 이루어진다. 필자는 바로 이 부분이 <닥프>가 웰메이드 웹툰으로 평가받는 요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작가의 입장에서는 작품의 재미를 위해 정보의 정확성은 포기하는 것이 편할지도 모른다. 비판이야 좀 받겠지만, 작품 도입부에 “본 작품에 등장하는 심리학적 내용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한 허구이며, 실제 심리학 연구결과와는 다름을 밝힙니다.” 정도로 적어 두면 비판에서도 어느 정도 자유로울 테다.
하지만 <닥프>는 각별한 검증을 통해 제대로 된 정보를 전하는 쉽지 않은 길을 택했다. 짐작하건데 작품 속 인물에게 자기 자신을 투영하는 독자를 걱정했을 것이다. 작품 내에는 ‘PTDS(외상후스트레스장애)’, ‘불면증’, ‘과민성대장증후군’, ‘공황장애’등 다양한 심리적 문제가 등장한다. 비슷한 증상을 지닌 독자들에게 은연중에라도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지 않으려면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면밀한 사전조사가 필요할 것이다. 실제로 심리학을 전공한 이종범 작가는 각종 논문 및 사례집, 심층취재, 전문가 인터뷰등을 이용하여 심도 있는 취재를 바탕으로 스토리를 구성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정성을 들인 작품의 질이 높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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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닥프>는 정주행 하기에 좋은 작품이다. 긴 에피소드는 10화가 훌쩍 넘을 정도로 호흡이 길고 흡입력 또한 상당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즌 4까지 완결이 되었으니 휴일에 한 시즌씩 정주행 하기에도 알맞다.
2020년 5월 현재, 코로나19 여파로 여전히 ‘생활 속 거리두기’가 시행되고 있다. 좋든 싫든 집에 머물러야 하는 시간은 길기만 한데, 지루함을 견디기 위해 유행처럼 번졌던 ‘400번 저어 만드는 달고나 커피’, ‘1000번 저어 만든다는 수플레 계란후라이’도 슬슬 시들해지고 있다. 이럴 때 작정하고 좋은 작품 하나 감상하는 것은 어떨까?
'정말이지 <닥프> 정주행하기 딱 좋은 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