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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엄마와 딸을 위하여, <안녕, 엄마>

2020-05-18 윤지혜



세상의 모든 엄마와 딸을 위하여, <안녕, 엄마>

엄마와 딸이라는 이름
 엄마와 딸이라는 관계는 복잡 미묘하다. 흔하게는 딸을 엄마의 최고의 친구로 치기도 한다. ‘엄마에겐 딸이 있어야 한다’고들 하지 않는가. 말의 의미를 굳이 생각하자면 동성인 부모 자식 간이라는 점에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기 쉬운 면도 있으니, 그만큼 ‘엄마’에게 ‘딸’은 친밀감을 유지하기 쉬운 자식이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엄마에게 딸은 자신을 투영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의미로 읽히기도 한다. 엄마의 어린 시절에는 배우고 싶어도 배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적성에도 맞지 않는 피아노 레슨을 받아야만 했던 딸들이 무수했던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그리고 딸은 자라 엄마가 되어 또 다른 딸을 낳고, 비슷하면서 또 다른 관계를 재생산한다. 지나치게 가까워지면 서로를 상처내기도 하고, 지나치게 멀어지면 서운한 관계. 나 자신이면서도 타인이고, 타인이라기엔 너무 가까운 관계. 그런 것이 모녀 관계인 것일까.

 김인정의 웹툰 <안녕, 엄마>는 이처럼 미묘한 모녀 관계를 조명하고 있다. 그녀들이 안고 있는 모녀 관계의 문제는 그들 자신의 문제이기도 하고, 그들을 둘러싼 환경의 문제이이도 하며, 엄마와 딸이라는 이름 아래 대물림되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엄마’ 이상의 엄마 이야기
 은영은 엄마에게 살갑지 않은 딸이다. 엄마인 영선도 딱히 딸에게 다정하지는 않다. 딸인 은영의 기억에 엄마는 엄격하고 냉정하기만 한 사람이다. 공통된 화젯거리도 별로 없어, 그저 한 번씩 밥은 먹었는지 확인하는 안부 인사를 주고받는 것이 고작이다. 은영이 그런 안부전화 조차도 바쁘다는 핑계로 대충 끊어버린 어느 날. 은영은 엄마인 영선의 부고를 통지받는다. 갑작스러운 죽음에 황망한 가운데 유품을 정리하다가 발견한 엄마의 일기장. 은영이 그 일기를 읽게 되면서 엄마를 다시 되돌아보게 된다는 설정은 다소 흔해서 진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은영이 엄마의 일기장을 들고 집에 온 이후 은영의 눈에 자꾸 엄마 영선이 보인다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죽은 엄마가 내 곁에 다시 돌아왔다면 믿기지야 않겠지만 반갑기도 하고 못 다한 말이 생각나기도 할 법하다. 그 엄마가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유령인지 환영인지 잘 모를 것 같은 상황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엄마와의 사이가 데면데면했던 은영에게는, 죽은 엄마의 귀환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가까워진 엄마와의 거리가 당황스럽다. 엄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은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모르고 같은 공간에 있어봤자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어색할 따름이다. 그 어색함을 견디기 위해 은영은 거부감에도 불구하고 영선의 일기를 들춰보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영선의 죽음으로 인한 이별이 은영과 영선을 다시금 대면하게 했다는 것이다. 은영이 들춰본 영선의 일기에는 그렇게 많은 정보가 있지는 않다. 영선의 생전 성격이 그러했듯이, 매일 장볼 것과 짤막한 감상이 나열되어 있을 뿐. 그러나 은영은 그 글에서 출발하여 ‘엄마’ 이상의, 영선이라는 사람을 발견해 나간다. 상상한 적도 없었던 연애하는 영선의 모습과 외로워하던 영선의 마음, 바다와 카펜터스를 좋아하던 것까지. 은영이 알고 있던 엄마 영선은 ‘냉혈한’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그보다 다양한 모습을 발견하면서 은영 안의 엄마라는 고정관념은 혼란을 맞는다. 엄마가 엄마일 뿐만이 아니라 ‘영선’이라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가면서, 내가 알고 있던 엄마가 아닌 영선이라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랑의 얼굴은 다양하다
 <안녕, 엄마>에서는 의도적이라고 할 만큼 남성들의 서사는 배제되어 있다. 은영의 부친이자 영선의 남편에 대해서도 영선의 과거에서만 짧게 다뤄질 뿐이고, 은영의 남자친구 역시 은영이 영선을 이해하게 되는 계기로서의 역할을 잠시 할 뿐 그다지 드러나지 않는다. 남성 인물들의 서사를 배제하는 만큼 여성의 서사, 그 중에서도 모녀 관계에 대한 서사에 이 웹툰은 치중하고 있다.

 다만, 작중에 드러나는 모녀 관계는 은영과 영선만이 아니다. 은영과 영선 외에도 은영과 오랜 친구인 희선과 희선의 엄마와의 관계, 그리고 영선과 영선의 엄마와의 관계까지. 이 작품은 은영과 영선을 중심으로 하여 그녀들을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모녀 관계를 조명하고 있다. 은영과 영선의 관계가 다소 냉랭하다 할 수 있을 만큼 서로에게 무덤덤한 반면, 희선과 희선의 엄마와의 사이는 굉장히 친밀하다. 은영은 영선과 친밀하지 못한 것에 불만을 느끼고 희선과 희선 엄마와의 관계를 부러워하지만, 희선의 입장에서 그들 모녀의 관계 역시 안고 있는 불만이 있다. 희선과 희선 엄마는 오랜 시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왔지만, 그러기 위해서 희선 엄마는 많은 것을 희생했다고 느낀다. 그런 만큼 희선을 많이 의지하지만 한편으로는 자라서 자신과 점차 멀어져 갈 것 같은 희선에게 불안을 느끼기도 한다. 희선의 입장에서 그런 엄마와의 관계는 부담으로 느껴지지만, 엄마의 희생과 애착을 모른 척 할 수도 없다. 반대로, 애착이라고는 영 없었을 것 같은 영선과 영선의 엄마, 그러니까 은영의 외할머니와의 모녀 관계에서도 속사정은 있다. 영선은 자신의 엄마가 자신을 미워한다고 느끼고 항상 그녀처럼 살지 않을 거라고 다짐한다. 영선의 엄마도 영선에게 불만을 품고 못마땅한 듯 가시 품은 말을 일삼는다. 그러나 영선의 엄마는 세상을 떠난 영선의 납골당 앞에서 눈물을 보이면서, 그야말로 먹고 사는데 바빠서 벌어져버린 관계를 봉합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그녀들의 관계를 떠올린다.

 이처럼 은영과 영선의 모녀관계를 기점으로 수평(희선-희선 엄마)으로 수직(영선-영선 엄마)으로 확장되어가는 모녀 관계에 대한 시선은 사랑의 다양한 형태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사랑’이라고 하면 마냥 달콤하고 따뜻하기만 할 것 같지만, <안녕, 엄마>가 보여주는 사랑의 맛은 씁쓸하기도 하고 때로는 지나치게 버겁기도 하며 때로는 상대를 공격하는 날카로운 것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수많은 모녀 관계가 있고 그것은 각자의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안에 어떠한 모양이든 결국 ‘사랑’이 있었음을, 그 모양을 만들어가는 것은 각자의 몫임을 이 작품은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세상 모든 엄마와 딸을 위하여
 <안녕, 엄마>는 이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만남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정확히는, 죽음이라는 이름의 이별을 겪으면서 은영이 엄마인 영선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이야기이다. 이 경험을 통해 은영은 엄마가 아니었던, 그리고 엄마였던 영선의 삶을 새삼 알게 되면서 그녀와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다. 은영은 영선이 자신을 사랑했을지 궁금해 하지만, 사실 의미 없는 물음이다. 영선에게 고향은 발목을 붙잡는 것 같이 질척이는 곳이었지만 바다가 있는 그리운 곳이기도 했다. 고향에 대한 양가적인 감정은 은영에 대한 영선의 감정과도 닮아 있다.

 이 작품이 의미 있는 지점은, ‘엄마는 위대하다’고 하는 모성 신화를 배제함으로써 어느 쪽으로도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모녀 관계를 감싸고 있다는 것이다. 모녀는 친밀해야 하고, 엄마는 엄마 노릇을, 딸은 딸 노릇을 해야 한다는 고정된 관계에서 벗어나 다채로운 ‘인간관계’로서의 부모 자식 관계를 보고자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으로써 얻는 것은 어떠한 형태여도 ‘그럴 수 있다’는 따뜻한 인정이다. 여느 인간관계가 그렇듯이 모녀 관계도 삶이라는 여러 선택 속에서 변화한다. 에필로그 중 영선의 말처럼, “부디 많은 선택이 최선으로 남길” 바랄 수밖에. <안녕, 엄마>는 내 마음 같지 않은 모든 관계들로 인해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은근한 위로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