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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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진의 크기>-청소년 권장 일진물(?)

2020-05-29 김한영



<일진의 크기>-청소년 권장 일진물(?)

 1. 일진물을 보면 일진이 될까?

 토대를 무시할 순 없는 것 같다. 연재를 시작하면서 학원물이 청소년에게 미치는 영향에 관한 논문들을 찾아 읽었지만 끝내 발견한 건 아집이었다. 나는 <크로우즈>, <상남 2인조>, <홀리랜드>부터 <니나잘해>, <럭키짱>, <체인지 가이>, <삐따기> 등 소위 비행청소년들의 쌈질하는 만화를 보고 자랐다. 왕따 당하는 학생을 괴롭히지도,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돕지도 않는 가해자였으며 꼴에 양심의 가책으로 장애 학생들과 짝을 자청했다.

  하루는 친구들이 노래방에서 일진들에게 당했다는 말에 겁 없이 싸움을 걸었다. 그러나 1:6으로 일방적으로 폭행당해 치아가 부러지고 안와골절로 오른쪽 얼굴 신경이 마비됐다. 장기간 입원했다. 웃기게도 ‘명문으로 가고팠던’ 고교는 사건을 축소시키려했으며 인근 일진들이 매일 찾아와 고소를 취하하라 협박했다. 가스라이팅에 가해자는 내가 되었고 은따를 당했다. 당시 구해줬던 친구들은 내가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내 처지를 방관했고 끝내 자퇴를 했다. 학원물이 청소년기인 내게 미친 영향이라면 만화 속 주인공처럼 나쁜 일진학생을 무력으로 제압해 친구들을 구하는 헛된 판타지를 부여했다는 점일 것이다.

2. 작품소개

 <일진의 크기>는 일진이자 주인공인 197cm의 최장신이 어느 날 갑자기 ‘성장 축소 증후군’을 앓고 키가 작아지면서 일진에서 셔틀로 뒤바뀌는 이야기(2013.11~2014.11)와 1년 후 최장신의 친동생 최장건이 주인공이 되어 사행성 오락에 빠진 친구를 구하는 이야기(2016.07~2017.08)로 구성되어 있다. 귀귀 작가의 <열혈초등학교>가 최초로 일간지 1면에 ‘폭력 웹툰’이라는 타이틀을 달았다면 <일진의 크기>는 바로 뒤 ‘일진 미화’라는 수식어로 등장해 제작지원한 한국콘텐츠진흥원까지 진화에 나선 이력이 있다. 제목 덕분에 적어도 ‘어그로’는 확실히 끌었다.

3. 싸우면 안 되는 액션만화?

 뒤늦게 <일진의 크기>를 보자 생각이 복잡해졌다. 가해자의 변명이 아닌 피해자의 아픔을 담으려는 노력이 보여준 작품이지만 선뜻 추천하기 힘든 부분이 있다. 앞서 다뤘던 네이버 일진 작품들은 독자에게 배덕감(背德感)1)과 응징의 카타르시스2)라는 양가를 전달했다면 <일진의 크기>는 가해자의 죄의식이라는 주제에 집중한다. 긴 시간동안 왜 일진미화 논란에 시달렸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만큼(그만큼 언론이 작품을 보지도 않고 조회수를 위해 휘갈겨 기사를 쓴 것이다.) 작품은 오늘날 일진 장르와 달리 교육용으로 쓰여야할 정도였다. 본 작을 복잡하다고 표현한 것은 그것이 장점이라기보다 단점에 가깝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폭력이 거세된 액션장르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폭력은 나쁜 것이라고 규정된 전제에서 주인공의 주먹은 통쾌한 내지르기가 아닌 숙연한 윤리적 물음으로 빠져버린다. 파이널 7화에서 주인공 최장신은 친구들과 친동생을 구하기 위해 폭력을 휘둘렀다. 악당을 응징하는 시원하고 통쾌한 장면에서 독자들은 장신의 폭력을 두고 옳고 그름을 따지고 있었다. 억압된 감정의 응어리가 분출되는 것이 아닌 켜켜이 답답함만 쌓여갔다. 이야기뿐만 아니라 컷을 구성하는 연출에서도 풀샷을 활용한 격동적인 신체의 움직임을 보여주기보다 때리고 맞았다는 상황만을 인지할 수 있는 미디엄 샷과 클로즈업의 나열로 액션을 풀었다.



1) 배덕감은 금지된 요소를 성취했을 때 얻는 만족과 쾌감이다. 새로운 것을 탐색했다는 성취감, 다른 사람이 경험하지 못한 것을 해봤다는 우월감, 규제에 반기를 들었다는 해방감이 뒤섞여있다. 금기, 그로부터 일어나는 욕망. 오동훈, 정신의학신문, 2018.04.04
2) 학원격투 장르의 일반적인 속성으로 <「싸움독학」 - 일진물이라는 새 시대의 웹툰, 이제 처절한 투쟁마저 비즈니스가 된다.> 편에서 다루었다.


4. 왜 폭력이 사라진 것일까?

 키가 작아지자 최장신은 싸움실력이 떨어졌다. 친구인줄 알았던 이들은 2인자인 박정수에게 붙고 장신은 정수와 1인자 자리를 놓고 싸우게 된다. 정수일행의 괴롭힘과 장신의 저항이 반복되던 어느 날, 정수일행이 자기를 괴롭히는 거라 여겼던 것들이 사실은 장신의 셔틀들이 그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란 걸 알게 되면서 큰 충격에 빠진다. 그리고 일진시절 자신의 셔틀인 윤식이 학폭에 자살하려하자 그를 구하고 속죄의 눈물을 흘린다. 그 대가로 장신은 스스로 일진 박정수의 셔틀이 된다.

  장신은 오직 정수와 싸워서 왕좌를 되찾으면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 믿고 있었다. 그랬던 그가 박정수의 셔틀이 된 것은 단지 죄책감에서만이 아닌 구조의 개혁이 필요하단 것을 인지한 것이다. <일진의 크기>는 일진이라는 것이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항변한다. 셔틀이 된(일진의 능력을 잃은) 장신이 새 일진 정수를 무너뜨린 힘은 일진으로서 폭력이 아닌, 학생들이 힘을 합친 대의적 요구 덕이었다. 약자들의 연대. 장신의 왕좌를 정수가 몰아낸 것처럼 폭력을 동반한 해결은 또 다른 폭력으로 반복된다. 확대하면 독재에 맞선 민주주의적 요구이다. 액션만화로서 장르의 컨벤션을 기대할 순 없었지만 독재를 견제하듯 일진을 견제하는 시즌 1의 엔딩은 나름의 명분이 있었다. 문제는 시즌 2가 작품의 대전제를 흔들리면서 시작한다.



5. 다시 싸우라는 시즌 2

 2년이라는 공백에 <외모지상주의>가 연재를 시작했다. 찐따가 특별한 힘을 얻어 일진, 인싸가 되는 플롯은 <일진의 크기>와 정반대 행보였다. 일진이란 철옹성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닌 일진이 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 일진은 만능이었고 모두가 좋아하는 인싸로 그려졌다. 그리고 개인이 노력만 한다면 찐따도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고 전도했다. 셔틀이 일진에게 괴롭힘 당하는 반복은 답답하고 피로했지만 찐따가 일진을 폭력으로 굴욕 시키고 인싸가 되는 반복은 ‘사이다’였다. <외모지상주의>, <싸움독학>, <인생존망>이 그랬고 <프리드로우>마찬가지였다. <약한영웅>도 인싸가 되라는 일레고리는 없지만 약자가 강자를 굴복시키는 내용이다.

  돌아온 <일진의 크기 시즌2>는 장신의 동생이자 주인공인 최장건을 형과 마찬가지로 195cm의 큰 신장과 싸움실력, 전교 1등으로 설정했다. 최장신은 다시 원래대로 키가 돌아왔다. 새로운 영웅과 돌아온 영웅이었다.
작중 키라는 상징은 완력과 권력을 의미한다. 박정수가 2인자인 이유는 1인자인 최장신보다 키가 작아서, 싸움을 못해서였다. 1인자 최장신은 키가 작아졌다는 이유만으로 2인자에게 밀렸다. 키가 셔틀과 같아지자 이번엔 셔틀들에게도 무시당했다. 그랬던 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것은 쫓아낸 독재자에게 다시 권력을 부여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는 작가나 읽는 독자나 서로 불편해졌다. 시즌1의 주제의식대로라면 시즌2의 엔딩 역시 학생들 자발적으로 사행성 오락을 그만두고 운영자를 체포해 경찰에 넘겨야 하지만 최장신과 박정수가 힘 합쳐 공동의 악당을 폭력으로 제압하는 이율배반을 낳고 말았다. 액션 장면에서 윤리적 기준을 세워 주인공의 폭력을 평가하게 된다. 폭력은 나쁘다는 시즌 1의 배경이 있으니 다른 작품과 달리 시즌 2는 매순간 자기감열의 연속이었다. 작가도 당위성을 만들기 위해 위성사건을 늘리면서 핵사건과 위성사건의 위계가 사라졌다.

  일진 미화 비판을 받을지언정 <외모지상주의>의 [불법또또]편은 불법도박에 빠지게 되는 심리를 자극적으로 연출하고 불법도박를 운영되는 방법을 묘사, 은어를 사용하며 핍진성과 사실성을 높였다. 결말도 나쁜 놈과 더 나쁜 놈의 대결이라는 이분화로 깔끔하게 매듭지었다. 장건이 친구인 지웅이를 구하기 위해 불법도박장에 위장 취업해 몰래 데이터를 빼돌리는 긴 과정을 <외모지상주의>는 세계관 최강자(HNH회장)가 키운 천재 해커 코우지의 등장으로 절약한다. 고생은 고생대로 했지만 <일진의 크기>는 방향을 잃고 만 것이다.  

  " 정수: 돈도 빽도 없는 내가지금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냐고? 알고 있으면 어디 한 번 말해줘 봐. 그러면 나도 당장 이 짓거리 때려치울 테니까. "
 " 장신: 그런 걸 내가 알 리가 없잖아. 그래 아까 저 영감이 말한 것처럼 지금 세상은 힘 센 놈이 약한 놈을 짓밟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세상일 수 있어.
남한테 뺏길 바에 뺏는게 현명하다고 칭찬 받을지도 모르지. 사실 나도 뭘 어떻게 해야 똑바로 사는 건지 몰라. 그래도... 그래도 이건 아니잖아?"
   -파이널 28화 中-

  정수는 설득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작가도 할 말을 까먹어버린 상황에 독자들은 분개했다.
물론 웹툰이 반드시 오락물로서 유희에 초점을 맞출 필요는 없다. 하물며 액션이 반드시 폭력의 미학이란 이름으로 멋있어야할 이유도 없다. 그러나 피카레스크라는 장르도 주인공이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그에게 감정이입할 공간은 만들어준다. (<데스노트>의 라이토를 생각하면 쉽다.) 다시 커져서 나타난 장신에게 독자들은 감정이입할 수 있을까? 가족인 동생마저 일진은 변하지 결코 변하지 않기에 형을 용서하지 않는다 말한 상황에서 장신의 폭력은 아무리 친구를 위해서라지만 정당하다 볼 수 있을까? 신체 변화라는 똑같은 판타지를 소재로 삼아도 전자는 계속 독자의 현실을 반추하게하고 후자는 욕망을 무한의 판타지로 충족시킨다.


6. 일진미화를 다시 생각해보자

 ‘일진미화’라는 시선이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지원을 받은 환경에서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액션장르지만 액션이 거세된 작품이란 안타까운 모습에 사회가 너무 학원 폭력물에 경직된 시선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물론 학원 폭력물은 조폭물과는 사정이 다르다. 조폭은 사회 음지의 일부분으로 일반인이 쉽게 접할 수 없기에 판타지가 될 수 있지만, 일진은 같은 공간에 함께 숨 쉬고 있기에 학원 폭력물은 일상이 될 수 있다. 하물며 일진물이라는 단어가 유행하기 이전 학원 폭력물은 학교와 학교 간 짱들의 배틀이었지만, 일진물은 학급 안에서 계급을 만들고 인싸와 아싸, 일진과 찐따를 구분 지으며 권력화 한다. 그렇다고 학원 폭력물이 지양되어야하고 청소년 작품은 건전해야만 하는 것은 청소년들이 현실과 판타지를 구분 못 한다 낮잡는 건 아닐까?

  시즌1에서 일진이었던 민재홍이 시즌2에서 개과천선하자 건전한 철봉운동을 유희라고 하는 것을 보며 어른들이 원하는 청소년의 모습이지 결단코 청소년들이 바라는 모습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비단 일진만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것은 아니다. 일진만 싸움을 하고 욕을 하는 것도 아니다. 설령 작품 속에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나쁜 짓을 저지른다고 해서 그걸 청소년 독자들이 옳은 일이라 착각하지도 않는다.

  ‘일진미화’라는 단어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폭력 논란, 선정성 논란, 일탈행위 논란 등이 결코 일진 미화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주 독자인 10대는 늘 폭력에 노출 되어있고, 한창 성에 눈을 뜰 시기이며, 사회억압에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는 세대이다. 독자는 당연히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판타지를 좋아하게 된다.
일진미화는 알레고리를 살펴봐야한다. 그 옛날 학원 폭력물을 즐겨본 내 이야기처럼 나쁜 어른에게 반항하는 일탈 이야기, 약자를 지키는 짱의 책임감, 우정과 신의를 위해 위험에 기꺼이 몸을 던지는 영웅담을 우리는 충분히 학원 폭력물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일진물의 문제는 일진을 긍정적인 존재로 그리기위해 찐따는 아싸이며 그들이 그런 대접을 받는 이유는 개인에게 있다며 책임으로 전가시킴에 있다. 그 서열 최하위에는 오타쿠가 있고 그 오타쿠를 교육시키기 위해 ‘담당일진제’를 옹호한다.
장르의 컨벤션까지 무너뜨린 자기검열에 우리가 재미를 느낄 수 있을까? 부디 유연하게 10대 독자를 보호의 대상이 아닌 하나의 동등한 존재로 인정해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