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초기화
글자확대
글자축소

그래픽 노블의 띵작. 10대 소녀의 스케이트 인생 그리고 사랑에 대한 이야기

2020-06-04 김하림





그래픽 노블의 띵작. 10대 소녀의 스케이트 인생 그리고 사랑에 대한 이야기 - 스피닝(Spinning), 틸리 월든, 창비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10대의 성장기를 담은 작품 <스피닝>에게는 수식어가 많다. 우선 만화계의 아카데미상이라 할 수 있는 아이스너상 2018년 수상작, 작가의 자전적 경험을 담아낸 그래픽 노블, 성 정체성을 작품을 통해 밝힌 커밍아웃 작품, 미국 만화계의 10대 유망주 등이 있다. 400페이지에 두꺼운 한 권의 책으로 발간된 <스피닝>은 DC코믹이나 마블 만화처럼 풀 컬러판은 아니지만 배경과 라인은 보라색 계열이, 하이라이트와 같은 조명은 노란색이 그리고 책의 종이 컬러, 즉 공백으로 구성되어 있다. 몇 페이지를 본 뒤에 바로 든 직관적으로 느낀 점은 한국과 일본 만화에 비해 텍스트가 많은 편으로 마치 한 편의 그림 소설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스피닝>은 만화계의 거장인 윌 아이스너(Will Eisner)가 처음 작품에 명명한 ‘그래픽 노블(만화형 소설)’ 이라는 장르로 구분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만화의 장르 중 하나인 ‘그래픽 노블’은 그림이라는 ‘graphic’과 소설이라는 ‘Novel’의 합성어로 만화와 소설의 중간 지점에 있으며, 단행본 만화보다는 페이지 수가 많은 편이며 완결된 형태로 출판되는 것이 특징이다.1) 출판 형태나 판형에 있어서도 우리가 쉽게 보는 만화 단행본(46판)이나 일반 서적판형(국판A5)에 비해 다양한 크기나 형태로 출간되는데 그림책과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출판 판형에 있어 그래픽 노블이 자유로운 이유 중 하나는 대체적으로 단권으로 출간되는 탓에 시리즈 도서의 책장 사이즈에 굳이 국한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픽 노블의 소재는 주로 정치사회적인 문제점을 풍자하고 철학적 주제의식을 갖은 작품들이 많은 편이다. 대표적인 그래픽 노블 작품은 장 마르크 로세트와 뱅자맹 르그랑의 <설국열차>, 슈피겔만 <쥐>, 닉 드로나소의 <사브리나> 등이 있다. 국내에서는 2000년대 이후 세미콜론, 애니북스, 아르테, 아름드리미디어, 시공사 등을 통해서 그래픽 노블 만화가 꾸준히 출간되고 있다.

 좌) 윌 아이스너가 자신의 작품인 [A contract with GOD]에 그래픽 노블이라 처음으로 명명
중) 윌 아이스너는 만화가, 크리에이터 외에 만화 연구가로 활동 (1917~2005)
우) 아이스너상 트로피/ 아이스너상은 1988년 이후 매년 미국 샌 디에고에서 시상식 개최

 

 틸리 월든의 <스피닝>은 피겨 스케이트 선수가 되어야 할지 확신이 안서는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10대 또래 문화에서 볼 수 있는 왕따 문화 그리고 동성 친구와의 좌절된 사랑, 교통사고 후유증, 과외 선생님의 성추행 등 각종 트라우마를 담고 있다.
  어른이 되기 위해 준비하는 시기가 10대이다. 하지만 그 시기에는 누구나 처음이라 서툴고 그래서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내기도 하여 좌절에 빠지기 쉽다. 목표를 향해 가다가도 예상치 못한 일과 그것에 대한 압박에 의해 ‘방황’이라는 시기를 어떤 형태로든 부딪히게 된다.
  미국 뉴저지에서 스케이트 클럽에 소속되어 있던 틸리는 부모님의 사정으로 텍사스주로 이사를 가게 된다. 뉴저지는 나름 미국 동부의 메인 지역이지만 텍사스는 그에 반해 미국 남부에 위치한 주로 뉴저지에 비해 기반시설에 많은 차이가 나는 곳이다. 이사를 와서도 틸리는 지역 스케이트 클럽에서 훈련을 계속하지만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틸리는 뉴저지에서의 고된 스케이트 훈련과 경쟁에 지쳐 있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텍사스에서의 다소 느슨한 훈련 방식에도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불만이 뭉치고 뭉친 10대 소녀이지만 스케이트 승급 시험을 볼 때 그녀의 그 누구보다도 많은 것들을 생각하고 계산하고 그리하여 하나의 프로그램을 완성하기 위해 열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틸리의 그러한 모습은 다르게도 해석이 된다. 발과 다리 몸의 정확한 균형감을 통해 완성되는 과정을 묘사한 장면에서 등장하는 몸의 균형점을 보여주는 점선 표시는 스케이트가 더 이상 그녀에게는 즐거움이 아닌 마치 감정이 없이 움직이는 차가운 얼음판의 꼭두각시 인형이 되어 버린다. 시험에 통과하기 위해서 더 잘하기 위해서, 경쟁이라는 시스템에 최적화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압박하는 틸리의 모습은 이를 바라보는 독자에게 괴로움을 던진다.

  스케이트 승급 시험에서 나오는 각종 기술들을 구사하기 위해 새벽부터 훈련을 하는 그녀에게 스케이트장은 또 다른 현실과의 공간적 분리된 공간일 뿐이다. 그림 그리기와 첼로 레슨을 받으며 시한폭탄의 시간을 조금씩 늦추며 완화를 시키고 있지만 그녀를 짓눌러오는 사건과 사고들이 점점 그녀를 눌러오기 시작한다.
 

△ 틸리에게 피겨 스케이트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피겨 스케이트는 예술성과 테크닉을 평가하는 스포츠로 은반 위의 무용이라고 한다. 여성 피겨 스케이터들의 화려한 의상과 음악에 맞춘 움직임은 아름답다. 남성적인지 여성적 스포츠를 구분하는 것이 현대 시류에는 어울리지는 않으나, 피겨 스케이트는 바로 여성에게 더 잘 어울리는 종목이라 할 수 있다. 틸리는 피겨 스케이트의 화려한 의상이나 과한 여성성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성을 좋아하는 틸리의 성적지향과 여성성을 가진 피겨 스케이트에 대한 부정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하고 있다. 스포츠인 피겨 스케이트와 개인의 성적지향은 같은 선상에 있는 취향의 문제와는 다른 것인데 말이다.

  틸리는 유튜브를 통해 본 동성애자에 대한 혐오에 대해 공포감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마치 스케이트 승급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상실, 자책감에 대한 감정들과 유사한 방식으로 부정적 감정들이 등장한다. 틸리에게 사랑도 스케이트도 그리고 학교도 그녀에게는 좌절을 맛보는 공간으로 등장한다.

  물론 비극이 영원하지는 않다. 그녀에게도 친구가 있고 고민을 털어놓고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친한 스케이트 동료언니도 있으며 학교에서도 그녀의 재능을 알아봐주는 선생님이 있다. 하지만 계속되는 시련 앞에 그녀는 결국 12년 동안 꾸준히 그리고 어느 누구보다도 열심히 해왔던 스케이트를 그만 두게 된다. 스케이트를 그만 둔 틸리의 선택은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의 명대사인‘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가 떠올랐다. 그녀에게 스케이트는 마치 그녀를 가둔 껍질이었던 것이다. 어떠한 결정도 어떠한 결론도 내지 못했던 그녀에게 있어 처음으로 스스로가 낸 결정이 가진 의미는 바로 다음 스텝으로 발을 디딜 수 있는 용기라고 하겠다.

  <스피닝>에서는 그녀가 고민을 하는 장면들이 많이 등장한다. 독백처럼 흐르는 대사와 움츠려들어 스스로를 갇혀버린 그녀를 모습들이 자주 등장한다. 엎드려 있거나 고개를 숙이고 있는 장면 등이다. 고민하는 틸리의 고민컷 중 최고의 명장면은 과자 자동자판기 앞에서 희미한 본인을 바라보는 장면이다. 자판기 속 많은 과자와 음료 중에서 무엇을 골라야 할지 선택을 하지 못하는 틸리 그리고 매번 선택의 순간을 살고 있는 우리 현대인을 모습을 비유적으로 표현하였기 때문이다.
또 다른 명장면은 마지막 승급 시험을 보며 그녀가 생각한 단어들이 칸들은 네이비 컬러로 표현되었고, 그녀가 스피닝을 할 때 흔들리는 동작들은 노란색 칸에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흰색 칸에는 엄마에 대한 걱정과 무념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만화와 달리 그래픽 노블은 텍스트를 이미지화 하여 시각적으로 전달하여 지면 광고를 보는 것 같은 강렬한 메시지가 전달된다.


 좌) 최고의 명장면으로 틸리의 고민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장면 
 우) 스피닝하는 그녀의 모습과 생각들

 

  어려운 피겨 스케이팅 테크닉을 클리어 하기 위해 스피닝을 수백만 번 돌았던 틸리이지만,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던 10대 소녀는 스스로 새로운 선택을 하게 된다. 이 작품이 해피엔딩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열린 결말이지만, 우리가 틸리 월든의 자전작 <스피닝>을 한국어판으로 읽고 있다는 점 자체가 바로 해피엔딩이 아닐까 싶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1) 네이버 시사상식 사전 <그래픽 노블> url.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668832&cid=43667&categoryId=436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