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말 여름의 끝자락에서 올해를 돌이켜 보면 정말 정신없이 걸어온 것 같다. 보통 때면 올해 절반을 훌쩍 넘어서 연말 준비를 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을 터이지만, 현재를 살아가는 인류에게 2020년은 폭포수처럼 순식간에 흘러가버리길 바라는 해가 되어버렸다. 2020년 어감으로 봐서는 같은 숫자가 더블로 배열되어 있어 일명 라임도 좋아 기분 좋은 출발을 기대했지만 연초부터 시작된 코로나 19의 전세계 유행으로 인하여 2020년은 역사에 바이러스와의 전쟁이 시작된 해로 기록되게 생겼다.
8월이면 무더운 더위를 피해 국내외로 여행을 가던 일상을 그리워하며 여행 브이로그 영상을 보여 달래거나, SNS의 과거의 오늘에 올린 게재물이 마침 여행 사진과 글을 보며 과거의 자신을 부러워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그야말로 삶의 의욕을 잃기 쉬운 이 시기에 청춘의 생생한 활기를 담은 박카스 광고* 같은 만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박카스 광고는 젊은이들의 꿈을 이루기 위해 힘쓰는 일상을 감각적이고 감동적으로 영상으로 표현하여, 청춘을 테마로 한 대표적인 광고이다._필자주)
△ 애니메이터들의 리얼 현장을 그려낸 <니시오기쿠보 런스루>
푸른 바닷물을 연상시키는 울트라 마린과 생생하고 역동적인 오렌지 컬러로 눈길을 사로잡은 만화 <니시오기쿠보 런스루>는 오랜만에 만난 직업 만화이다. 대학 입시를 막 끝낸 고등학교 3학년인 에다지마 사키는 대학을 포기하고 꿈에 그리던 애니메이션 제작회사인 스튜디오 헤메로킬리스에 지원하게 된다. 사키는 지원한 회사의 면접관으로부터 이 업계에 들어오면 몸이 망가져서 회사가 책임을 질 수 없으며, 재미 때문에 지원했냐는 질문을 받게 된다. 애니메이터로서의 그림 실력도 중요하지만 그와 더불어 ‘근성’을 확인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우여곡절 끝에 압박 면접을 통과한 사키, 이 작품은 그녀를 통해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의 생태계를 그려냈다.
<니시오기쿠보 런스루>를 읽으면서 연상되는 몇 편의 작품들이 있다. 애니메이션 제작 시스템의 전과정을 담아낸 미즈시마 츠토무 애니메이션 감독의 [시로바코]와 애니메이션은 아니지만 게임제작회사를 배경인 토쿠노 쇼타노 작가의 만화 <뉴게임>, 마시멜 웹툰 작가의 <게임 회사의 여직원들>이 떠오른다. 이들 작품의 공통점은 분업화된 시스템에서 콘텐츠를 만든다는 점이다. 또한 야근이나 철야가 익숙한 노동환경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도 유사하며, 콘텐츠가 완결이 되면 새로운 프로젝트로 부서 이동되거나 이직도 잦은 편이다.
결코 쉬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 업계에 뛰어드는 이유는 <니시오기쿠보 런스루>속 애니메이터들의 각자의 꿈을 통해 알 수 있다. 주인공인 사키는 슬프고 괴로울 때 그림을 그리며 잊어낼 수 있어서 그림을 관련된 일을 하고 싶었고 그것이 바로 애니메이터였던 것이다.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감독이나 성우와 만나기 위한 이들도 있다. 꿈만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업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각오로 다져진 화려하고 성대한 무엇인가가 아니라 그것을 하게 만드는 동기 그 자체인 것이다.
애니메이션 업계에 대해서는 추상적으로 ‘힘들다’라는 단어로만 알았지만, 이 작품은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정해진 시간 내에 원화 원고 마감을 위해 일주일 넘게 회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일을 하는 모습을 보면 짠하기 그지없다. 그런데도 계속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야근 중에 동료와 함께하는 편의점 음식과 맥주 한 잔 일수도, 참여한 애니메이션의 촬영 후 영상을 이어서 쭉 보는 사전영상(올러쉬)을 봤을 때의 희열과 떨림일 수도 있다. 아니면 카리스마 넘치는 애니메이션 감독 선배가 “너희를 키워가는 게 어른의 의무”라 하는 진동이 마음을 울리게 해서 일 것이다.
△ 가혹한 업무환경임에도 애니메이터로 살아가는 이유는 바로 ‘떨림’과 ‘울림’일 것이다.
애니메이션을 비롯한 문화 콘텐츠들은 TV 방영 또는 극장에 개봉을 통해서 대중들이 접하게 되고 직접적으로 평가를 받는다. 성공의 여부가 시청률이나 동원 관객수나 평점 등의 수치에 의해 결정될 만큼 냉혹한 세계이다. 애니메이션 업계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원작이 갖고 있는 스토리나 표현을 충분히 영상으로 표현하기 위한 노하우와 기술력이 있어야 하고,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대중의 코드를 일정 부분은 타협하면서 맞춰가야 융통성과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강한 정신력이 탑재되어야 한다. 물론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한 인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특화된 능력을 가진 개인이 모여 부족한 부분을 서로 채워가는 집단인 인 것이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제작회사 밀집지역, 니시오기쿠보
본 작품의 배경은 일본 도쿄에 서쪽에 위치한 니시오기쿠보 일대이다. 신주쿠역 일대나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점과 같은 랜드마크나 높은 빌딩이 있지는 않지만 골동품점이나 고서점 또는 LP판을 파는 잡화점은 물론 전통가옥을 개량한 작은 카페 있는 개성을 지닌 지역이다. 덧붙이자면, 도쿄에서 살고 싶은 지역 순위권에 매번 링크되는 키치조지와도 가까운 동네이다.
실제로도 니시오기쿠보 일대에는 일본의 크고 작은 애니메이션 제작회사가 포진되어 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너의 이름은], [언어의 정원]이나 사이토 다카오 원작만화 <고르고13> 등을 제작한 The Answer Studio가 있으며, [하이큐]와 [뱅드림] TV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3D 및 CG 부문에 참여한 스튜디오 크로노스(Studio Khronos), 명작 [에반게리온]과 [신 고릴라]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카라(Khara)가 니시오기쿠보에 위치하고 있다.
△ 니시오기쿠보에 위치한 애니메이션 제작사 : [The Answer Studio], [스튜디오 크로노스], [카라]
만화 속에 등장하는 편의점, 선술집, 음식점과 정류장 등은 니시오기쿠보에 실존하는 곳으로 <니시오기쿠보 런스루>만화 팬들의 성지순례를 한다고 한다. 만화 팬들이 올린 이 지역 성지순례 관련 블로그를 보면 유키 린코 작가가 니시오기쿠보 일대 사전답사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코로나 바이러스만 아니었다면, 일본 여행 코스로 만화 속에 등장한 인도 음식점에서 인도카레를 먹고 니시오기쿠보 거리를 여유롭게 걸어 다녔을 텐데 말이다.
오랜만에 접한 직업만화 <니시오기쿠보 런스루>는 꿈과 이상을 쫓아온 애니메이터의 열정과 애니메이션 업계의 현실을 균형 있게 잘 풀어냈다. 애니메이터가 되고픈 이들에게는 마음의 준비를 돕는 지침서이니 한 번 읽어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