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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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스피리츠> : 만화의 제2형식을 고찰하다

2020-09-21 손유진




<삼국지 스피리츠>: 만화의 제2형식을 고찰하다


 <삼국지 스피리츠>는 2014년 발간된 삼국지 총서로서 <강철의 연금술사>로 유명한 아라카와 히로무와 <공명의 신부>를 펼쳐낸 삼국지 마니아 토코 준이 공동 저자가 되어 <삼국지 연의>에 대한 고찰을 가벼운 논조로 담아내고 있다. 같은 삼국지를 소재로 한 유명작 <창천항로>나 <화봉요원>과는 달리 매우 명랑한 색채를 띤다. 일례로, 사활을 걸고 임무를 완수한 조운을 두고 유비가 “온몸이 간으로 되어 있는 것 같다”고 이른 일화에서 두 작가는 조운을 ‘푸아그라’라며 개그 소재 삼는다. 이렇듯 <삼국지 스피리츠>는 무겁지 않은 톤을 견지하며 120회에 이르는 <삼국지 연의>의 전반적인 줄거리를 요약하면서 네 컷 만화를 곁들여 유명 일화들을 리메이크하고 있다.

 <삼국지 스피리츠>의 가장 큰 특색은 만화를 곁들인 ‘가이드북’ 형식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가이드북은 인기 만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도감’의 기능을 한다. <원피스>의 방대한 정보를 여러 섹션에 걸쳐 풀어내는 <원피스 레드>, <원피스 옐로우>, <원피스 블루>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이러한 가이드북들은 오리지널 단편 만화들을 부록으로 하여 산문을 적극 이용한다. 작품의 방대한 정보를 중점으로 두고 있기 때문에 다소 산만한 구성을 보이는 것이 가이드북의 특징이다. 이는 일본의 국민 여행 정보 팜플렛인 <루루부>에서도 나타나는 구성으로 일본 특유의 정보 처리 방식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삼국지 스피리츠>는 가이드북의 형식을 적극적으로 취하여 회당 줄거리, 작가간 대담, 네 컷 만화, 인물소개로 한 장 안에서도 상당히 밀도 있는 정보를 담아내고 있다.



△ 일본 여행 책자 루루부의 복잡한 레이아웃


 본서는 가이드북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 만큼 줄거리를 간소화하고 만화 부분 또한 줄글의 지루함을 덜어내는 최소한의 역할만을 하고 있다. 즉, 삼국지를 본격적으로 펼쳐내는 작품이기 보다는 삼국지에 입문하는 독자에게 길잡이 역할을 하고 삼국지 매니아들에게 한층 더 깊은 재미를 주는 ‘참고서’같은 작품인 것이다. 그렇다고 삼국지 연의를 서툴게 다루지는 않는다. 두 페이지가 한 장을 이루어 연의의 1회를 풀어내는데 그 깊이가 방대하여 작가의 요약 실력에 감탄하게 된다. 또한 당대의 배경지식을 짤막한 만화로 그려내면서 가이드북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또한 한 장에 담겨 있는 정보들이 상호보완되면서 단 2권으로 이루어져 있음에도 삼국지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이끌어내고 있다. 각 장의 소제목은 실제 연의의 제목을 따라 한문 문장으로 되어 있고, 이를 재해석한 부제를 달아 해당 회차의 대략적인 스토리를 예상케 한다. 줄거리 부분은 간략한 설명으로 되어 있지만 그 문체가 건조하지 않고 한 편의 소설처럼 쓰여 있어 마치 실제 연의의 함축본을 읽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한다. 이어서 두 작가의 대담 파트가 등장하는데,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본편에 재미를 더하게 된다. 그림작가 아라카와의 경우, 시니컬하고 풍자적인 시선으로 인물들의 행동을 분석하는 한편, 글 작가 토코는 사건들을 아울러 캐릭터를 총체적으로 아우르려 하는 경향을 보인다. 창작자의 입장에 서서 연의의 치밀한 작품성을 분석하고 있는 두 작가는 작품에 필요한 재미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해체하고 있다.

 만화 파트의 경우 캐리커처화된 인물들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데, 각 캐릭터가 모두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어 수 없이 많은 인물이 등장하는 연의임에도 각자의 매력이 생생하게 표출되고 있으며 모든 캐릭터를 특색 있게 디자인할 수 있는 작가의 역량이 돋보이고 있다. 특히 인물의 외관에 대한 특이한 묘사가 많은 연의의 특징을 따와 이를 캐릭터의 ‘기믹’으로 활용하면서 재미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유비의 경우, 팔이 무릎만큼 길게 늘어져 있다는 묘사가 있는데 만화에서는 이 긴 팔을 휘둘러 원심력을 유발하며 관우 못지않은 무투 실력을 보여주는 모습이 웃음을 자아낸다. 또한 그을린 대추와 같은 피부색을 가진 것으로 유명한 관우는 비슷하게 거무스름한 외양을 가진 위연을 ‘캐릭터가 겹친다’며 견제하려 든다. 이렇듯 인물의 특성을 극단화하여 에피소드로 만드는 작가의 방식은 연의 속 방대한 인물들을 제대로 구분할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하며 줄거리에 등장하지 못한 일화를 보완해주고 있다. 또한 지면의 귀퉁이에는 인물들의 생몰 타이밍이 적혀 있는 등 책의 두께는 비교적 얇은 편이나 페이지의 구성을 적극 활용하는 편이다.


 <삼국지 스피리츠>는 산문적 설명문이 만화만큼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는 본작이 독립적인 하나의 매체이기보다 <삼국지 연의>를 보조하는 포지션에 놓여있다고 보게 만든다. 삼국지의 원작이 만화는 아니지만 기존 만화 매체들이 으레 내놓는 가이드북들과 그 역할의 궤를 같이 한다는 점에서 <삼국지 스피리츠>는 그만의 특색을 가지며 가이드북의 역할이 어떤 것인지 재고하게 만든다. 만화 원작의 가이드북이란 일종의 데이터 아카이빙이다. 등장 인물의 일대기나 서사의 하이라이트를 재조명하는 것이 주된 내용으로 <원피스>의 경우 방대한 서사만큼이나 가이드북 또한 거대한 분량을 자랑하며 세 권에 걸쳐 출판되었으며 최근 <비브르 카드>라는 제목으로 다시 정리되기도 하였다. 대서사시를 다루는 작품들의 경우 작품의 정보 자체가 독자들에게 또 하나의 컨텐츠가 되며 평론의 지평을 넓히게 된다. 게임을 원작으로 하는 프랜차이즈 또한 네 권에 이르는 데이터 북을 출판하였으며 서사뿐만 아니라 작품의 배경 설정 또한 팬들이 주로 토론하는 영역에 이르렀다. 이렇듯 작품의 객관적인 데이터와 치밀한 설정은 팬을 열광하게 만드는 제3의 요소 중 하나이다. 출판계에서 이를 충분히 위시하고 있기에 데이터북은 하나의 장르로서 우뚝 설 수 있었다.

 <스쿨럼블>은 2000년대 초반 애니메이션계를 풍미한 학원 로맨스 작품으로 10명에 달하는 주조연의 관계를 절륜하게 풀어내어 인기를 끌어냈다. 순정물의 스테레오타입과는 다르게 복잡미묘한 내용을 다루는 <스쿨럼블>은 로맨스 장르에서는 드물게도 가이드북이 발매되었다. <스쿨럼블>의 가이드북은 등장인물 소개, 주요 관계 요약, 명장면, 학교 등 배경 설계, 심지어는 인기투표 특집 단편 만화 등 오리지널 컨텐츠까지 망라하며 그 볼륨을 넓히고 있다. 깊이 있는 설정들의 총체를 통해 독자들은 작품을 깊이 이해하게 되고 이를 뛰어넘어 팬덤 내에서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하게 된다. 가이드북의 출판은 독자들의 해석에 자유의 날개를 달아지는 위업이기도 하다. 작품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세세한 설정들을 서사와 인물에 대입하여 상상하면서 팬덤의 상상력은 더욱 풍부해진다. 이는 ‘2차 창작’이라고 지칭되는 팬덤의 가시적 피드백에 상호 의존하는 만화의 장르적 특성을 염두에 두고 바라보면 만화계에서 매우 중요한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가이드북은 작가 공인으로 직접 중요한 부분을 독자에게 상기시킴으로써 작품의 포커스를 공고히 하고 별도의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작품에서 정보를 설명하는데 할애되는 시간과 노력을 절약하게 해준다. 최근에는 유명 작품에 대한 데이터 아카이빙이 ‘위키’의 포맷으로 우후죽순 생겨나고 인터넷에 관련 정보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가이드북의 위세가 위축되고 있지만 작가의 직접 검수를 거친 공식 출판물로서 데이터북의 위상은 궤를 달리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삼국지 스피리츠>는 원작자(나관중)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출판된 책이므로 위의 기능들과는 약간의 거리가 있지만, 가이드북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삼국지 연의>의 서브 컨텐츠로서 <연의>에 대한 이해를 보조하는 데 충분한 기여를 하며 그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최근 애니-만화 업계에서는 리메이크나 리부트 등 기존 작품을 활용한 컨텐츠가 줄을 이어 등장하는 추세이다. 이러한 현상이 소재 고갈과 제작 주체의 역량 부족과 연결된다는 부분은 차치하고, 특정 작품에 대한 서브 컨텐츠의 확장이라는 점에서 가이드북의 역할과 중첩되는 지점이 어느정도 존재한다고 보인다.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는 흔한 고사처럼 대작을 지지하는 기반의 일부로서 서브 컨텐츠들이 활성화되는 것은 고전 작품의 명맥을 잇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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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유진

만화평론가(2019 만화평론 공모전 신인 부문 가작 수상)
텍스트의 의미를 중심에 두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