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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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大)를 위한 소(小)의 희생, 그 씁쓸한 뒷 맛 - <아스란 영웅전>

2020-09-18 윤지혜



대(大)를 위한 소(小)의 희생, 그 씁쓸한 뒷 맛 - <아스란 영웅전>


오래도록 사랑받는 작품, <아스란 영웅전>
 <아스란 영웅전>은 2012년 네이버웹툰에서 박성용 작가가 연재한 웹툰으로, 연재가 끝난지 시간이 꽤 지난 지금까지 높은 평점을 유지하고 있는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이처럼 오래도록 사람들에게 명작으로 기억되고 있는 것은,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특징점이 그 때나 지금이나 여러모로 돌출적인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가장 큰 특징은 이 작품이 정통 판타지의 외피를 입은 추리물이라는데 있다.



판타지적 세계관을 이용한 트릭의 신선함
 판타지적 세계관이라 함은 모험을 떠올리기 쉽겠으나, <아스란 영웅전>에서 ‘모험’은 사실상 끝난 상태이다. 오래 전 신마전쟁은 인간이 편을 든 신의 승리로 끝났으며, 폭주하여 인간을 학살했던 블랙드래곤 루갈반다도 영웅과 그의 동료들이 물리치고 난 이후 5년이 지난 평화의 시대다. 악마를 물질계 바깥으로 몰아내거나 마물과 전쟁을 치르는 등 인류의 생존을 좌지우지할 만한 역사적인 이벤트는 이미 지나가고, 그에 비하면 나름 소소한(?) 인간사가 존재할 따름이다. <아스란 영웅전>은 이런 세계관을 바탕으로 미스터리를 파헤치는 추리서사를 보여주고 있다.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마법이라는 수단이 있는 세계에서의 ‘추리’는 성립이 어려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스란 영웅전>은 그 부분까지 포함하여 설득력 있는 미스터리를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판타지적 세계관을 포함함으로써 다소 기발한 트릭까지 선보이기도 한다. 첫 번째 에피소드 ‘레드스타’의 경우 사건 당시 용의자의 기억이 없는 점, 피해자는 현장에서 목에 칼이 꽂힌 채 쓰러진 모습으로 발견됐으나 시반은 죽은 이후 장시간 서 있었던 것처럼 생긴 점 등에 마법이 적극적으로 관여했음이 밝혀진다. 그러나 그 마법은 기억을 지우는 마법이라거나 시체를 계속 서 있게 만들 수 있는 마법처럼 필요에 따라 전능하게 사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 구역의 온도를 잠시 바꾸고 특정 사물의 크기를 조절할 수 있는 등 마법의 작용 방식은 고정되어 있다. 즉 도구로서 마법을 사용하는 세계관 속에서, 그 도구가 얼마든지 범죄 알리바이를 조작하는 용도로 쓰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작품에서 사용되는 트릭 자체가 특출나게 뛰어나고 기발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럼에도 신선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작가가 작품의 세계관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설계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대조적이고 개성적인 인물 구성
 추리물로서 <아스란 영웅전>이 주는 재미는 사건에 관여하는 인물 설정의 몫도 크다. 특히 탐정 역할로 ‘은퇴한 영웅’을 내세운 점이 이색적이다. 주인물 아랑 소드는 사건의 시점으로부터 5년 전, 인류를 위협하는 블랙드래곤 루갈반다를 물리친 영웅이다. 그러나 루갈반다를 퇴치하면서 한쪽 다리를 잃고 더 이상 용사로는 활동할 수 없게 되어 은퇴하고, 현재는 무직으로 미키의 가게에 얹혀산다. 이런 아랑 소드가 탐정 노릇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그가 다년간의 모험을 통해 괴이한 상황이나 결투를 통해 사람의 죽음을 많이 봐온 바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른 냉정한 판단력은 덤이다. 즉 뛰어난 추리력이나 관찰력만이 아닌, ‘경험’이 추리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아랑 소드가 경험 중심의, 냉정한 인물이라면 아스란 시티 수비대 백부장 세라핀 그린포그는 그 반대급부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세라핀은 동정심이 많은 성격으로, 순수하게 사람을 구하기 위해 일하겠다는 신념이 있는 인물이다. 미심쩍은 사건을 선배는 용의자를 고문하여 해결하려 할 때, 정확한 증거가 필요하다며 아랑 소드에게 수사 협조를 요청할 만큼 원칙주의적이고 고지식하기도 하다. 때문에 아랑 소드의 제멋대로인 행동에도 불구하고 그를 수비대에 취직시켜 각종 괴사건의 해결에 함께한다. 제멋대로인 영웅과 모범 시민이라고 하는 이 대조적인 인물들은 함께 사건들을 해결하기 위해 행동하지만 사건에 대해 점차 다른 반응을 보이게 된다.


‘용사’가 구해야 할 다수, 희생되는 소수
 <아스란 영웅전>의 마지막 화가 연재된 이후 8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따라다니는 일종의 악명(?)이 있다. 파격적인 결말로 ‘멘붕물’이라는 이명이 생긴 것이다. 대부분의 독자들은 그 결말에 크게 당황했다. 좀 더 이어지리라 생각했던 서사가 갑작스럽게 종결되었으며, 그 파격적인 결말이 뜬금없다고 느낀 사람들도 있었다. 결국 작가 본인이 작품의 후기에서 그런 결말을 낸 이유를 직접 설명하고 그 결말에 스스로도 소위 ‘멘붕’을 느꼈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그러나 작가의 설명이 없었더라도, 작품을 곱씹어 보면 그러한 결말이 완전히 뜬금 없는 것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아스란 영웅전>에서 핵심적인 키워드는 ‘용사’라고 할 수 있다. 주인물인 아랑 소드를 지칭하는 단어이기도 하지만, 작품의 세계관을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배경은 5년 전만 하더라도 ‘폭주한 블랙드래곤 루갈반다’라는, 인류 전체를 위협하는 ‘악’이 있었고, 아랑 소드는 그들을 구하기 위해 ‘악’을 처단하는 ‘선’으로서 나섰다. 그런 의미에서 아랑의 세계는 이분법적인 세계이다. 그는 다수를 위협하는 위험 요소를 제거하는 것으로 다수를 지켰으며, 그것이 아랑 안에서의 신념이자 정의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신념을 관철시키는 것이 ‘용사’이다. 아랑은 자신의 방식을 관철시킬 때 종종 “용사니까.”라는 말을 했으며, 에피소드 ‘레드스타’에서는 열세에 몰린 세라핀이 굴하지 않고 범인을 체포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자 그녀를 ‘작은 용사’라고 지칭한 바 있다.

 그러나 작중 사건들에 관련되어 있는 사람들은 엄밀히 말하면 선과 악, 어느 쪽으로든 이분되기 어려운 상황의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사건을 일으킨 범인의 의도가 순전히 악하다고 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에피소드 ‘하프엘프’의 경우 인종차별로 인한 불행한 과거사가 원인이며, ‘게르베인’은 처참한 가족사를 제공한 자에 대해 복수를 한 경우였다. ‘도플갱어’와 ‘여섯번째 손가락’은 일의 원흉이 다수를 위해서는 살아서는 안 되는 존재의 살고자 하는 의지에 있다는 점에서 복잡하다. ‘레드스타’는 우발적이지만 분명한 살의가 있었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하겠으나, 범인과 피해자의 과거와 현재가 비교되며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그런 반면 아랑 소드가 구하고자 하는 다수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반드시 선한 것도 아니다. 이들 중에는 범인에 대한 가해자가 섞여 있는 경우도 있다.

 세라핀이 이런 이분화되기 어려운 상황 앞에서 주저하고 혼란스러워 할 때, 아랑 소드는 정의라는 이름 앞에서 소수의 희생을 묵과한다. 일말의 주저조차 없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그의 내면에 “죽어도 되는 사람”(27화)의 영역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대상이 누가 되는지는 항상 선택적이다. 다수가 만든 질서 안에서 위배되는 누군가가 제거되어야 할 소수가 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랑 소드 역시 언제든지 그 소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아스란 영웅전>의 파격적인 결말은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하는 구조가 합리적으로 보임에도 그 안에는 잔인함이 내포되어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파격적인, 그래서 아쉬운 결말의 여운
 문제는 세계관의 방대함과 말하고자 하는 바의 묵직함에 비해 전개된 에피소드의 수가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각 에피소드는 독립성이 있어 다섯 개의 에피소드로 메시지를 담아내기엔 부족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설정과 복선을 해결하는 것에는 충분치 않았다. 무엇보다 에피소드가 많지 않은데 비해 인물들과 세계관이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실패하는 법이 없는 아랑 소드의 유능함과 다리 한 쪽이 없다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강한 먼치킨적인 면모는 매 회차마다 또 무슨 일을 벌일 것인지 기대하게 만들었다. 고지식한 세라핀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온 몸으로 고생하는 것을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무엇보다도 추리물로서, 각 에피소드마다 등장하는 인물들이 사건을 일으키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어떠했는지 그 사연을 추적해가는 것이 흥미롭다. 그 세계 안에서 더 많은 이야기가 있었을 것만 같지만 그것이 아랑 소드와 세라핀의 이야기가 끝나면서 함께 끝나버린 것이 아쉬울 정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아쉬움은 독자의 몫이고, <아스란 영웅전>은 군더더기 없이 이야기의 끝을 맺었다. 용사가 더 이상 필요 없는 세상에서, 용사로서 살고자 했던 인물들의 기록으로서. 그리고 그 기록은 끝이 난 12년 후에도 여전히 비슷한 울림으로 머리 한 구석에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