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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언어와 자연, 그리고 인간에 대한 이야기 2부

2020-12-11 손유진



<마녀>: 언어와 자연, 그리고 인간에 대한 이야기 2부




 앞서 게재된 1부에서는 <마녀>에서 전개된 인간중심적 언어 비판을 해제했다. 이제 이가라시 다이스케가 설파하는 메시지를 검토하여 그의 비판을 재비판하는 자리를 마련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 1부에서 거론됐던 핵심적 지점들을 요약할 것이다.
 우선 첫 번째 요점은 인간 언어의 호명에 관한 문제였다. 인간은 비언어주의를 고수하는 자들에 대한 이단재판으로서 그들을 ‘마녀’라 호명한다. 인간의 호명이 타자를 규정짓고 분별하는 자세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작가는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두번째는 행위의 중요성을 근거로 한 언어 비판이다. 마녀는 말로써 세상을 이해하지 않고 아는 것을 행하며 세상과 조화를 이룬다. 말로써 이해되는 세상은 왜곡되고 인간적 틀에 갇히고 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언어를 통한 소유와 정복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인간 언어의 규정적 성격은 정복욕과 상관관계를 지닌다. 언어를 통해 세상을 타자화시키는 것은 자연에 대한 소유와도 직결된다. 말에 타자를 가둠으로써 대상을 소유하는 메커니즘은 제국주의로 이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작가의 시각은 과연 타당한가? 언어는 불필요한 껍데기에 지나지 않으며 앎에 대한 행위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요소인가? 또한, 이러한 주장에 대해 작가는 타당한 근거를 들고 있는가? 이를 검토하며 세 단계에 거쳐 논의를 진행시킬 것이다.

 1. 언어비판
 인간에게 언어가 필요하다는 것은 사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인간에게 있어 언어는 파르마콘(pharmakon)과 같다. 파르마콘은 약을 뜻하는 그리스어로, 치료제와 독의 뜻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이가라시에 의해서는 언어의 독소적 성격만이 조명되고 있지만 언어는 인간에게 치료제가 되기도 한다. 언어란 인간이 이해한 바를 외화시키는 과정이다. 인간 이해는 필연적으로 언어적 속성을 띠며 인간의 의사소통 전반은 언어로써 성립한다. 그렇다면 왜 언어여야만 하는가? 이는 인간이 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성은 한 측면에서는 패턴화 능력으로 정의될 수 있다. 베르그손은 인간의 이성을 “과거의 경험을 정식화하여 미래를 예측하도록 설계된 능력”이라 말한다. 즉 인간적 본성은 이성이라는 식별 능력이며 이성의 산물인 언어는 인간의 절대적 필요에 의한 발명품이다.

 언어는 이해와 기록의 수단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의 치료제이다. 인간은 자신이 감관을 통해 수용한 것을 언어를 사용하여 데이터화한다. 예를 들어 빨간 열매는 먹을 수 있다는 반복적 경험을 내재화할 때 인간은 ‘빨강’, ‘열매’, ‘안전’이라는 언어적 패턴을 통해 생존에 필요한 지식을 습득하고 기억하는 것이다. 이미지로서의 기억 또한 결국 의미는 언어로 부여된다는 점에서 이를 피할 수 없다. 인간에게 언어의 발명은 필수적임과 동시에 필연적이다.

 한편, 소수의 입장으로서 자연을 대변할 때조차 언어는 필요하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저서 「역사의 이름들」에서 역사 속 무명의 대중들은 역사가의 언어를 통해 자기 본연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다는 주장이 대두된다. 당대의 대중들은 자신을 표현할 적절한 언어 능력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역사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했으며, 이를 복원시키기 위해서는 역사가가 그들의 행위와 말들 속에서 그들이 진정으로 지향하고자 했던 바와 그들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자연을 소수자에 위치시켰을 때 또한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만약 인간에게 환경 보호를 주장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언어의 방식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파괴당하는 환경의 입장을 언어로 치환하여 설명해야 인간에게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문제에서 지식인들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도 동일하다. 소수자들의 고충에 대한 언어적 분석을 명료화시켜 문제상황으로 제시하여 경각심과 개선 의지를 촉발하는 것이 지식인들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언어적 수단을 통한 의미부여가, 이가라시에게는 역설적이게도, 타자를 소외로부터 구제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언어를 통한 파괴는 언어로써만 복구될 수 있다.

 2. 행위중심적 관점 비판
 행위가 진리와 직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과연 타당한가? 언어라는 매개 없이 행위가 진리를 담보할 수 있을 지에 대한 의문이 남는다. 옳은 행동을 규정하기 위해 무엇을 근거로 둘 것인지가 문제가 된다. 이는 상술된 논의와도 이어진다. 인간이 행위를 할 때 그것은 판단을 근거로 하며 인간의 판단은 오직 언어적 경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선 윤리적 판단이 아니더라도 모든 판단은 언어의 논리로 구성되어 있다. 게다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 마녀의 역할이라면 이는 곧 윤리적으로 적합한 행동을 하는 것으로 바꾸어 말할 수 있는데, 윤리적 진리가 곧장 행위를 지시할 수는 없고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예를 들어 칸트의 윤리학을 생각해보자. 그도 모든 인간은 직관적으로 옳은 일을 행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이는 오로지 이성적 판단의 보편성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또한 행동만을 통해 행동의 정당성을 근거 짓는다면 부적절한 행위에 대해서도 정당성을 부여할 위험이 있지 않은가? 언어가 충분히 발달하기 전, 즉 인간의 판단이 완성되기 전에 식인 풍습이 있었다고 가정해보자. 그들의 행위를 규범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행위 그 자체로서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한가? 당연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마녀>에서 이야기되는 행동은 주로 윤리적 행동인데 이미 ‘윤리적’ 행동에 대한 판단은 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행동을 통해 행동을 정당화하는 것은 근거의 불충분이며 자가적 순환논증에 가깝다.

 3. 언어비판의 근거들에 대한 비판
 이가라시는 언어의 비판자로서 마녀를 내세워 마녀의 이상적인 속성들을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가 적절한 소재들을 이용하였는지, 논변을 위한 이야기가 타당하게 전개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우선 그의 작품관 안에서 마녀들은 오지 등 소수 집단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밀림의 부족, 혹은 서구의 숲에 거주하는 소규모 공동체, 유목민 사회 등지에서 마녀는 살아간다. 한편, 마녀가 살아가는 세계로서 이러한 소수민들은 대상화될 위험성을 갖고 있다. 어떤 신비로운 존재들이 마법적으로 또한 비언어적인 방식으로 살아가리란 환상은 오히려 그들의 행동양식을 오독할 가능성이 있다. 이누이트족의 언어체계는 색에 대한 다양한 표현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를 그들이 자연의 색채를 사랑하며 자연을 존중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며 실질적 환경과 필요를 고려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일방적인 타자화에 가깝다. 이가라시가 일관적으로 비판한 객체화를 답습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소수민의 주술적 이미지에 대한 편견들은 그들을 오히려 틀에 가두고 있다. 미대륙 원주민에 대한 시선이 이를 잘 대변해주고 있다. 드림캐처나 들짐승의 신체 일부를 이용한 부적 등을 통해 ‘인디언’에게 마법적 신비주의를 부여하는 것은 그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며 서구의 합리성 중심 사회에서 도외시되게 만들 뿐이다. 제국주의의 안티테제로서 자연적 인간으로 상정되는 소수민으로 설정하며 그들을 마법적 객체로 만드는 것은 그저 대상화의 일부로 전락할 위험을 껴안고 있다.

 또한 작중에서는 언어의 과오가 자연의 힘으로써 처벌받을 수 있다는 점을 자주 부각시키고 있는데 이것이 적절한 근거가 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자연의 처벌이라는 권선징악적 정당화 수단의 빈약함은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반언어주의의 근거 중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은 자연의 강대함이다. 자연에게 역학적 처벌을 당할 수 있기 때문에 언어의 사용을 자제해야 한다는 주장은 사실 타당한 근거라기 보다 공포에의 호소에 가깝다. 따라서 이는 합리적인 근거로서 작용하지 못한다.

  물론 이가라시가 지적하는 언어의 폭력성은 충분히 고려해야 할 문제의식이다. 그러나 이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언어의 필연성을 직시하지 못하고 인간의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데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그가 자신의 주장에 부연하는 근거들은 또 다른 대상화를 낳을 수 있다는 혐의마저 포함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그가 지향하는 언어비판은 수정될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언어의 폭력성을 제거하는 방향은 실현 가능할 수 있으나 언어 자체를 인간에게서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으며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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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유진

만화평론가(2019 만화평론 공모전 신인 부문 가작 수상)
텍스트의 의미를 중심에 두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