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연이 개연성을 만들고, 개연성은 호감을 만든다. <킬러분식> 리뷰
필자같이 생각이 많고 산만한 사람들은 가끔 쓸 데 없는 생각 때문에 작품에 집중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영화에서는 쫓고 쫓기는 차량 추격전이 한창이다. 주인공은 악당을 피해 차선을 요리조리 바꾸며 곡예를 하듯 도망가는 중이다. 주인공의 앞길에 방해가 되는 자동차들은 추풍낙엽처럼 튕겨져 나간다. 얌전하게 주차되어 있던 차도 주인공 차에 치여 봉변을 당한다. 누군가의 목숨이 달려있는 추격전을 벌이는 마당에 교통법규까지 준수할 수는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산만한 필자는 가끔 이렇게 주인공에게 희생당한 자동차 주인에게 감정을 이입하기도 한다. 설레는 마음으로 카탈로그를 보며 큰 맘 먹고 60개월 할부로 산, ‘아방이’라는 애칭까지 정해준 나의 자동차가 하루아침에 박살이 난 셈이니 얼마나 속상할까. 사실, 주인공이 좁은 골목시장을 도망가다가 과일이 가득 담긴 손수레를 넘어뜨렸을 때에도 비슷한 생각을 한다. ‘저 과일장수 아저씨는 오늘 하루 장사 공쳤네. 과일은 전부 흠집이 났을 텐데, 주워 담는다고 제값을 받을 수 있을까. 저 과일들은 떨이로라도 내놓아야 하겠네.’ 하는 쓸 데 없는 생각 말이다.
혹은 주인공이 아닌 엑스트라에게 감정을 이입하기도 한다. 주인공을 잡으려고 쳐 놓은 덫에 ‘지나가는 행인1’ 같은 엑스트라가 걸렸을 때 같은 경우이다. 다른 관객들은 주인공이 무사하다는 것에 안도할 텐데, 필자는 왜인지 ‘저 엑스트라에게도 사랑하는 가족이 있을 텐데’ 하며, 재수 없이 죽은 엑스트라에게 마음이 쓰이는 것이다.
어쩌면 이러한 쓸데없는 생각들은 주인공에 대한 ‘호감’이 부족하기 때문에 생기는지도 모르겠다. 주인공에 대한 호감이 매우 높을 경우에는, 주인공 이외의 사람은 어떻게 되든 개의치 않게 된다. 주인공에게 완벽하게 이입하여 전적으로 주인공의 편에 서게 되는 것이다. 반면 주인공에 대한 호감이 부족하면 자꾸 주인공 주변 인물의 사정이 보인다. 그러다가 급기야 ‘주인공이면 저렇게 뺑소니에 기물파손해도 용서가 돼? 저 엑스트라는 괜히 주인공 때문에 억울하게 죽었네.’하며 주인공을 주변에 피해나 주는 일명 ‘민폐쟁이’로 몰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인공에 대한 호감은 무엇으로부터 오는가?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필자는 주인공이 하는 행동의 ‘개연성’, 즉 주인공이 겪어온 일련의 ‘사연’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의 사연에 독자가 공감을 한 상태에서 주인공의 행동에 관대해지기 쉽다. 주인공의 사연을 알고 있다는 것은 주인공이 그러한 행동을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알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그릇된 행동에 일종의 개연성을 부여하는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대함은 곧 주인공에 대한 호감으로 이어진다. 반면, 독자가 주인공의 사연에 공감하지 못한 경우에는 주인공이 하는 행동이 개연성 없게 느껴진다. 이러한 경우 독자는 주인공이 하는 그릇된 행동에 공감하기 어렵고, 주인공 역시 주변에 민폐나 끼치는, 일명 ‘비호감’ 주인공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주변에 한없이 민폐를 끼치고, 범법자임이 분명한 주인공을 응원하게 되는 웹툰을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네이버 웹툰에서 2012년 연재되었고, 2018년 재연재 되었던 ‘한’ 작가의 <킬러분식>이 바로 그것이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의 주인공인 ‘추’는 전직 킬러이다. 지금이야 경찰서 앞에서 ‘킬러분식’이라는 분식점을 성실하게 운영하며 살아가는, 아내와 두 자녀를 둔 평범한 가장이지만, 젊었을 때 추는 미국 마피아 조직에 소속된 최고 수준의 킬러로 활동했었다. 조직을 떠나 평범한 가정을 꾸리려는 조직원이 으레 그렇듯이, 추도 새 삶을 찾아 조직을 떠나려는 과정에서 조직과 충돌이 있었고, 결국 수많은 조직원과 보스, 그리고 보스의 아들까지 죽이고서야 조직을 벗어나게 된다.

△ 추는 조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열명이 넘는 조직원과 보스를 죽인다. 그리고 보스의 어린 아들까지 총으로 쏜다.
문제는 죽은 줄 알았던 보스의 아들 ‘잭’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추에게 복수하기 위하여 한국에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잭은 복수를 위해 추와 추의 주변인들을 집요하게 괴롭힌다.
사실 추는 냉정하게 보았을 때 결코 선인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 지금이야 자상한 남편이자 아버지이지만, 한때 마피아로서 온갖 범법을 저질렀을 것이며 킬러로서도 많은 살육을 저질렀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잭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아버지를 눈앞에서 죽이고, 본인도 죽이려고 한 추에게 복수하는 것도 일면 정당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독자들은 잭보다 추를 응원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독자들이 추의 사연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추는 어릴 적 미국에 있는 친척 집에 맡겨진 한국계 미국인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러나 추를 맡은 친척들은 추의 부모님의 유산에만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어린 추를 학대한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셈이다. 굶주렸던 어린 추를 거두어 주었던 사람이 마피아 두목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마피아가 된 것일 뿐 본인의 의지로 킬러가 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추는 ‘여자와 어린아이는 죽이지 않는다.’는 다소 낭만적인 규칙을 가지고 있는 킬러였다. 사랑하는 여자인 ‘수지’가 자신의 아이를 임신했기 때문에 새 삶을 살고 싶었을 뿐, 처음부터 조직을 떠날 생각을 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어린 잭을 죽이려고 한 이유도 잭이 먼저 추에게 총을 겨누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추가 죽인 인물들은 마약, 매춘 등을 일삼는, 수지의 표현에 의하면 ‘죽어 마땅한 놈들’이라는 설정까지 친절하게 덧입혀준다.
이렇듯 추의 악행에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 있으며, 이러한 서사에 납득한 독자들은 어느새 추를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일단 추의 사연에 공감하고 나면 독자는 추가 하는 행동에 자신도 모르게 개연성을 부여하게 된다. 추가 하는 행동이 민폐가 아니라 호감으로 비춰지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추가 열 두명의 조직원을 살육할 때에도 ‘잔혹하다’는 생각보다는 ‘멋있다’ 혹은 ‘대단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게 된다.
인물이 품고 있는 사연의 중요성은 작품 내 악당으로 설정된 잭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작품 초반의 잭은 사람을 고문하면서 천연덕스럽게 감자칩을 먹고, 사람 머리에 곰 몸뚱이를 이어붙인 괴이한 인형을 들고 다니는 미치광이처럼 묘사되었다. 하지만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잔혹한 마피아 두목이었던 아버지 아래에서 자랐던 어린 시절이나, 결국 눈앞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목도한 것이 큰 트라우마가 되었다는 사연은 잭의 이러한 기이한 행동에 개연성을 부여하게 된다. 그리고 “같은 고통이라도 아이와 어른이 느끼는 고통의 크기는 다르다”는 잭의 대사는 이러한 사연을 극대화시킴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악당인 잭에게도 연민을 가지게 만든다.

△ 초반에 잭은 단순한 미치광이로 묘사되었다(왼쪽). 작품이 전개될수록 잭의 사연이 부각되었고(오른쪽),
이러한 사연에 공감한 독자는 작품 내 악인으로 설정된 잭에게도 연민을 느끼게 된다.
물론 이 작품의 주된 매력은 등장인물의 스토리가 아니라 폼 나는 액션 장면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어쩌면 추에 대한 호감의 원천은 잘생긴 근육질 중년으로 묘사된 추의 외양이라고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러한 주장도 일면 일리가 있다. 실제로 <킬러분식>은 작화 측면에서도 높은 완성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 화려한 액션 장면이나, 추의 수려한 외양도 「킬러분식」의 매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죄자인 추가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에 주저함이 없게 되는 이유는 독자가 추의 사연에 공감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에게 공감할만한 서사가 없다면 스토리에 개연성이 없었을 것이고, 개연성 없이 그저 수려한 작화만을 강조한 작품은 그 깊이가 얕기 때문이다.
독자가 주인공의 사연에 공감하게 되면 전적으로 주인공의 편에 서게 된다. 동시에 악당의 사연에도 공감하게 되면, 악당조차 안쓰럽게 느껴진다. 결국 독자가 주인공에게도, 악당에게도 공감하게 되는 시점이 바로 작품 자체에 한껏 몰입한 순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