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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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들의 자기합리화-<유미의 세포들>, <방탕일기>

2020-12-19 김한영



언니들의 자기합리화-<유미의 세포들>, <방탕일기>

  언제부터였을까? <유미의 세포들>(2015, 이동건)을 의리로 보던 순간이. ‘구웅’에서 ‘유바비’로 환승하는 순간을 운명처럼 포장했을 때도 애써 납득해보았지만 그 완벽하던 유바비가 유미보다 더 어린 알바생과 바람피워 퇴장했을 때, 이 달달한 판타지가 어느 순간 남자로서 공감할 수 없는 지점에 닿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포보다 유미의 남자들이 전면에 나서면서 유미의 삶은 연애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유바비의 복제인 ‘신순록’의 등장에 그냥 잘 마무리되어 끝났으면 하는 바람만 가졌다.

서른이 되기 전까지 나는 주인공이 결혼하면 행복한 줄 알았다. 결혼을 하면 두 사람은 영원히 사랑하고 사랑 때문에 앓는 모든 갈등이 해소된다고 생각했다. <유미의 세포>도 유미와 신순록의 결혼으로 행복하게 끝났다. 그러나 마지막 화를 읽으며 행복에 겨운 감정이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저 결혼 생활이 많은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는데 왜 나를 포함한 내 주변엔 저런 사람이 없을까.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맴돌았다.

  그 갈증은 <방탕일기>(2019, 단지)를 통해 채워졌다. <유미의 세포>가 착하고 보편적인 유미와 각국의 왕자님들과의 동화라면 <방탕일기>는 신나게 놀아본 언니가 들려주는 자기합리화와 답 없는 남자친구의 연애담이다. 타인의 잘못에는 냉철하지만 나의 잘못에는 끝까지 이유가 있다는 단지의 독백은 세포라는 캐릭터로 책임을 회피하는 유미보다 진솔했다. 도덕적으로 주인공 단지를 욕할 수 있지만 그 욕할 수 있다는 부분에서 <방탕일기>는 독자참여를 요구하는 꽤 밀도 있는 텍스트이다.

  당연히 단지의 시선이기 때문이지만 단지가 만난 남자들은 하나같이 ‘하자’가 있다. 초반에 나온 남자친구를 대기업을 다니는 능력 있는 남자였지만 일이 바빠 단지와의 만남을 소홀히 했고, 클럽에서 여섯 번째로 만난 ‘육자’는 남성미 풍기는 육체를 갖췄지만 경제사정이 좋지 않아 단지에게 동거를 요구했다. 네 번째로 만난 ‘자승’은 단지가 육자와 사귀는 도중에 바람 핀 상대였다. 그리고 현재 남자친구 ‘애기’ 역시 단지에게 경제적으로 기대기만 했으며 철이 없고 단지와 같이 범죄를 저지를 공범이다.

  30대 여성의 자아 찾기와 자기고백인 <유미의 세포들>과 <방탕일기>는 서로 다른 전략을 구사한다. <유미의 세포들>은 아기자기하고 예쁜 그림으로 착한 호구인 ‘평범한’ 유미가 회사를 그만두고 작가가 되는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라면 <방탕일기>는 남들 눈치만 보고 살아온 ‘특이한’ 단지가 남의 시선 신경 쓰지 않고 제멋대로 어른들의 놀이를 즐기는 과정이다. 유미는 여러 왕자님들을 만나 공주가 되지만 단지는 함량미달의 남자들과 어울리다 자기파멸에 이른다.

  연애라는 것은 각자의 사정이 있고, 가해자와 피해자를 나누기가 쉬지 않다는 점이 있다. 두 작품은 모두 주인공의 독백으로 이야기가 서술된다. 이 점에서 유미와 단지의 자기합리화는 필연적이다. 자기 합리화라고 하는 것은 방어기제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유미의 세포>는 로맨스코미디라는 장르 특성상 그 자기합리화가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우선 귀여운 유미의 세포들 때문에 유미의 생각을 직접적으로 들을 수 없다. 유미의 세포들은 유미의 마음을 대변하는 변호인이다. 유미의 세포들은 유미의 세포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감정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 유미의 이기적인 행위는 모두 ‘착한’ 유미를 지키기 위해있고 독자들은 유미의 세포들처럼 나의 세포들도 나를 지켜줄 것이라 상상한다. 그런데 작품 속 다른 인물의 세포들도 역시 결과적으로 유미를 옹호하기 바쁘다. 유미의 세포는 착한 세포들이고 다른 인물의 세포는 유미를 상처 주는 악랄한 세포로 묘사된다. 유미는 구웅와 연애당시 구웅을 좋아하는 구웅의 친구 서새이를 싫어했다. 유미는 구웅에게 “걔는 너를 친구 이상으로 대하고 있잖아!”라는 말로 구웅에게 서새이와 절교하기를 요구했다. 그런데 정작 유미 역시 바비를 보면서 “남녀 사이에도 얼마든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크리스마스 파티에 바비를 초대했다. 결과적으로 유미는 구웅과 헤어지자마자 ‘친구’ 유바비와 사귀었다. 그럼에도 독자들이 유미에게 공감하는 이유는 작중 세포들이 모두 유미편이기 때문이다. 서새이의 세포는 유미에게서 구웅을 빼앗으려는 간악한 생각 덩어리로 묘사하지만 바비의 세포는 유미에게 호의를 베풀 때만 등장한다. 그리고 유미의 세포들은 유바비의 행위에 위선적인 태도를 보인다.

 환승하는 과정에서도 구웅의 세포는 유미보다 회사(자신)을 우선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유미는 더 이상 구웅과의 소통을 거부하고 똑같이 자기 자신을 1순위로 올린다. 그 사이에 구웅 대신 유바비가 유미를 1순위로 생각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유미의 환승 연애의 당위성을 부여한다. 이 연출은 유바비에서 신순록으로 연애대상이 바뀔 때도 똑같다. <유미의 세포들>은 에피소드 간의 연결성이 치밀하지 않다. 그 사이는 독자들의 상상으로 채워간다. 유바비가 다은이라는 알바생에게 흔들리는 장면, 갑자기 먼 미래로 이야기가 흘러 유바비와 다은이 결혼하는 장면, 유미가 헤어지자고 하는 장면. 이런 식으로 <유미의 세포>의 연출은 유미가 아닌 인물의 이야기는 독자들이 (안 좋은) 상상을 하도록 만든다.

  <방탕일기>역시 단지는 육자와 사귀는 도중 자승과 바람피운 사실에 대해 전 남친 때문이라고 변명한다. 단지는 그가 23살이던 당시, 학원 강사였던 남자친구와 2년 넘은 연애를 했는데 남자친구가 학원 수강생과 바람난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회상 끝에 단지는 “그걸 내가 하게 될 줄이야. 세상일이라는 게 참!”이라며 웃어넘긴다. 남자친구 육자는 26살 무직이기 때문에 단지가 모든 데이트 비용을 부담했는데 설상가상 육자는 눈치 없이 단지의 자취방에서 동거를 요청한다. 그리고 단지의 바람이 들킨 순간, 육자는 동거를 요구한다. 단지는 “그놈이랑 같은 취급 받는 게 너무 참을 수 없다고. 나는 그런 쓰레기랑 달라.” 라며 ‘연애의 의리’를 약속하는데, 이번에는 잠시 서울에 올라간 육자가 바람을 핀다.

 <방탕일기>의 자기합리화 방식은 불우한 과거의 트라우마를 드러내는 방법과 상대를 깎아내리는 방법으로 표현된다. 전작 <단지>에서 이어지는 단지라는 캐릭터의 불우한 과거 때문에 <방탕일기>에서 묘사되는 방탕한 삶과 범죄가 면죄된다. 또한 남자친구들을 지질한 존재로 묘사함으로써 단지 역시 당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유미의 세포들>이 우회를 통해 유미의 이기적인 행동을 필연적인 것이라 말하면 <방탕일기>는 너무나 직접적으로 자신이 옳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 공격하기 쉬운 부분으로 독자들은 참여 한다.

  만화는 내면을 읊조리기 참 좋은 매체다. 영상매체인 영화나 드라마는 보이스오버를 촌스러운 연출이라 평하지만 만화에서 독백은 컷을 절약하는 효과적인 표현방법이다. 그리고 칸과 칸의 구속에서 자유로워진 웹툰에서 독백은 칸 밖에 위치하여 전능한 힘을 얻는다. 혼자 그린 작가의 그림과 글 속에 자기 고백이 녹아내린다. 그리고 그 고백은 자기 위주로 서술될 수밖에 없다. 서술이란 주관적이라서 필연적으로 왜곡이 발생한다. 그래서 주인공들의 이중적인 모습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자기합리화를 반복하다 나의 이상형과 행복한 결혼생활을 맞이하는 유미의 이야기보다 누구에게서 옮았는지도 모르는 성병에 걸려 병원신세를 지고 특수절도를 저질러 실형을 받느냐 마느냐 피 말림 속에서 고생하는 단지의 이야기가 더 울림 있다. 솔직하고 노골적이라 자기합리화가 정말 추잡하게 들린다. 유미가 되고 싶은 모델이라면 단지는 되기 싫은 모델이다. 그런데 “나는 단지와 다를까?” 그 소리가 마음 한 구석에서 계속 들린다.

  10년도 더 된 이야기다. 정말 싫어했던 재수학원 강사께서 수업도중에 이런 말을 했다. “여러분, 나 정말 싫어하죠? 근데 그거 알아요? 나 싫어하는 사람들은 나랑 똑같은 사람들이야. 왜냐면 나도 하고 싶은데 못하고 쟤는 하니까.” 10년이 넘은 기억임에도 지금도 가끔씩 가슴에 남아 콕콕 찌른다. 특히 이별의 순간 앞에서 말이다. 인간이란 행복이라는 지상과제를 위해 자기모순적인 행동을 보인다. 그런 인간을 그린 만화는 참으로 흥미롭다. 자기모순.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나는 당당했다고 믿고 나갈 뿐이지. 만화를 그리는 작가고, 그걸 읽는 독자도. 그리고 비평을 쓰는 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