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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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출된 욕망이 만들어낸 기괴한 일상의 세계, <닭은 의외로 위대하다>

2020-12-22 윤지혜



돌출된 욕망이 만들어낸 기괴한 일상의 세계, <닭은 의외로 위대하다>


 닭은 위대한가? 이 질문에 선뜻 긍정적인 대답을 내어 놓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닭의 조상이 인류 발생 이전, 중생대의 패자였던 공룡이라는 설은 이제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듯하다. 그러나 과거의 영광(?)은 어떻게 되었는지 지금의 닭이라는 이름의 조류는 날개가 퇴화되어 날지 못하고, 인간에 의해 가두어져 알과 고기를 생산하는 가축으로서 위치하고 있다. 한때는 나름 정복자의 위치에 있었다고 할지라도, 지금의 닭은 인간에 의해 피정복자의 위치에 가까워졌다 하겠다. 진화는 보통 더 나은 것으로의 변화를 말할 진대, 닭은 왜 하필이면 인간에게 ‘먹히는’ 존재로 진화했는가? ‘위대하다’는 형용사는 피정복자보다는 정복자에게나 어울릴 법하다. ‘위대한 장군’이라던가, ‘위대한 인류’. 그리고 ‘위대한 닭’. 이 연결 관계에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닭은 의외로 위대하다>는 이 웹툰의 제목이 의도하는 바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위대함과 닭은 거리가 멀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임에도 ‘의외로’라는 수식어까지 덧붙여 ‘닭’을 ‘위대’하다고 말하고자 하는 이유는 뭘까. 무엇보다도, 작품의 제목에서 유추해내기 어렵게도 이 작품의 장르는 소위 말하는 ‘좀비물’이다. 어느 날 사람들 사이에서 인간의 고기를 먹고 싶어지는 병이 퍼지고, 주인물 ‘심연’은 난리를 피해 말 못하는 할머니 ‘정복자’가 혼자 사는 시골집에 도착한다. 인간고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피해 임시로 같이 살기로 한 그들에게 이런 저런 사람들이 찾아오면서 사건이 발생한다. 여기서 닭은 주인물 중 하나인 정복자의 반려동물(그것도 나름의 비범한 능력이 있는)로 등장하지만, 어디까지나 주변에서 관찰하는 입장일 뿐 서사의 중심에는 인간이 놓여있다. 2부까지 연재되고 있는 지금의 시점에서 닭의 위대함은 아직 발견하기 힘들다.


 의문의 실마리는 이 작품의 제목이 어느 정도 기존 영화의 제목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다소 찾을 수 있다. ‘닭’과 ‘위대함’을 연결 짓는 이러한 작법은 ‘거북이’와 ‘빠름’을 연결 지은 일본영화의 제목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를 연상시킨다. <닭은 의외로 위대하다>의 소제목들도 ‘마당을 나온 암탉’,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고백’,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귀신이 산다’ 등 기존의 영화 제목에서 따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다만 단순히 영화 제목만을 따온 것이 아니라, 영화의 제목과 작중의 설정이나 소재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닭의 시점에서 인간들의 삶을 바라보고 있고,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고백’에서는 영화의 주요 소재였던 ‘불륜’이 작중 서사에 있어서 핵심적인 사건으로 자리하고 있다.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는 사고로 인해 일어난 살인을 은닉한 인물들에게 그들의 살인을 알고 있는 듯한 의문의 편지가 날아오면서 사건이 발생하는 영화의 전개처럼, 웹툰의 주요 인물이 살인을 저질렀을 것으로 의심하는 인물이 등장하여 갈등을 일으킨다. 패러디한 소제목이 작중 서사와 가지는 연관성을 생각할 때, 제목 역시 작중 서사와 관련성이 있으리란 추측은 나름 합리적으로 보인다.

 <닭은 의외로 위대하다>와 관련이 있으리라고 짐작되는 영화 <거북이는 의외로 빨리 헤엄친다>는 어느 평범한 주부가 어느 날 스파이 모집 광고에 응모하면서 일어나는 해프닝을 다루고 있다. 시종일관 가벼운 유머가 난무하는 스파이물과 인간고기를 갈구하는 좀비가 난무하는 좀비물 사이에 닮은 점은 찾으려야 찾을 수 없을 것 같지만, 의외로 둘 사이에 유사한 점이 있다. 바로 평범한 일상에서 튀어나온 비일상을 통해 인간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는 점이다.
<닭은 의외로 위대하다>는 좀비물이지만, 그 설정이 조금 독특하다. 좀비라는 설정을 활용하는 방식은 다양하지만, 다수의 작품에서 좀비는 전염성이 강하고, 인간을 먹고자 하는 의지 외에는 모든 것이 소거된 맹목적인 존재로 그려진다. 비슷한 시기 연재되어 최근 완결을 맞은 이윤창 작가의 <좀비딸>의 경우가 이와 비슷한데, 이 작품에서 좀비는 야생동물과 다름없는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이와 같은 좀비에 대한 설정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선명하게 한다는 점에서 계층 문제를 말하기 위해 유효한 소재로 활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닭은 의외로 위대하다>의 좀비는 이성이 있다. 좀비가 아닌 사람들과 똑같이 다양한 방식으로 사고할 수 있는데다가 외견상으로도 일반인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저 ‘인간고기’를 먹고 싶은 욕망이 추가되어 있을 뿐이다. 때문에 좀비가 퍼지고 있다는 것을 뒤늦게 파악해 기존의 사회구조는 어느 정도 무너진 상태지만, 사람들은 그럭저럭 일상을 영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좀비라는 새로운 소비계층의 등장과 사회제도의 붕괴로 인간에게 새로운 가치가 부여되었다. 인간의 신체가 고기로서 소비되는 것이다.


 체계가 붕괴된 사회에서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남보다 나은 생활을 영위하고 싶은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인간의 신체를 매매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여기서 여성, 특히 젊은 여성의 신체는 특히 선호되면서 먹이사슬의 아래쪽에 놓이게 된다. 약자에 대한 대상화는 직접적으로 고기라는 상품으로 인간이 지칭된다는 점에서 현실의 그것보다 직설적이다. 약자의 구도는 기존의 사회와 다르게 재편된다기보다 증폭되며, 인간의 욕망은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지극히 일상적인 듯하면서도 기이하게 욕망이 돌출된 작중의 세계는 현실의 모습과 다른 듯 닮은 모습으로 경각심을 준다.

 다만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이 작품이 독자들의 감정이입을 요하는 성향은 아니라는 것이다. 인물들은 각자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움직인다. 남성 인물들은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약자의 신체를 손에 넣어 이득을 얻기 위해 움직이고, 현재 작중 유일한 젊은 여자 인간 심영은 스스로 오래 살아남기 어렵다고 생각하면서도 살아 남기위해, 살아남아 예전 서울에서의 삶을 다시 영위하기 위해 살인(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 행위도 불사한다. 정복자는 기댈 것 없는 무료한 일상을 견디기 위해 심영이 시골집에서 함께 살아주기를 원한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집 부엌 소주병에 담겨 있는 정체불명의 극약을 언제라도 사용할지도 모른다. 그들 중 누구도 더 나은 사람도, 더 못한 사람도 구분하기 힘들다. 지극히 생략되다 못해 점과 선으로 단순화된 작화는 인물들 간의 구분되는 특징을 무화하여 도긴개긴의 상황을 강화한다. 각자의 욕망에 따라 움직이는 이들의 줄다리기는 각자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에, 언젠가 터져버릴지도 모를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준다.

 이러한 작중의 상황을 생각할 때, 작품의 제목이 말하는 ‘닭의 위대함’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이해된다. 인간의 신체가 생존의 도구로서, 또는 재화로서 소비되는 상황은 인간의 입장에서 지옥도의 한 장면이나 다름없겠지만, 닭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인간으로부터 소비되어 왔다.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상황을 관조하며 인간을 먹고 싶어 하는 좀비들의 욕망을 파악해 낼 수 있는, 작중의 닭이 가진 그 시점이 이미 오랜 시간 인간에 의해 소비되어 온 닭이 가진 ‘위대함’이 아닐까. 혹은, 욕망에 휘둘리며 서로를 상처 입히는 인간들의 생태와 관계 없이 얼마든지 독자생존 할 수 있음에도(정복자의 반려 닭은 홀로 살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터전을 다 닦아 놓은 닭이다) 자신의 ‘정복자’의 곁을 지키기로 선택할 수 있는, 그 너그러움이 가지는 ‘위대함’일지도 모른다.

 작중의 사건들이 점차 심화되며 ‘미래보고서’를 통해 예고된 비극으로 달려가고 있는 상황에서 닭의 운명은, 그리고 인물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것으로 이 작품이 인간의 어떠한 것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확인하는 것도 아직은 이르다. 그저 기괴하게 비틀리고 노골적으로 추한 이 돌출된 욕망들이 만들어낸 세계에서, 인물들은 ‘의외로 위대한’ 결말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가. 작은 희망처럼 의문을 마음에 품고, 그들의 마지막을 기다려 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