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를 초과하는 슬픔과 불가해한 결심
어떤 일이 있었기에 전부 그만두고 싶었는지, 구체적인 상황에 관해선 이야기되지 않는다. 다만 어두운 톤의 그림에 꾹꾹 눌러 쓴 슬픔과 절망의 문장들이 마음에 아프게 와닿는다. 이를테면 “악몽은 원래 꾸던 것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깨어 있는 것이 악몽보다 더 무섭고 괴로워 아예 푹 잠들어버리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는 말. “삶이 너무 무거워서 많이 피곤했다”는 말. “그래서 여러 가지 도전들을 다시 해 보고 또다시 실패하게 됩니다” 같은 말. “저는 제게 크게 실망했습니다. 더 이상은 이전처럼 희망차거나 행복한 미래가 있을 거라는 기대는 이제 하지 못합니다”라는 말.
우울증 투병 과정을 다룬 에세이 만화 <죽지 그냥 죽어버리지>(이하 <죽어버리지>)를 읽다 보면, 세상에는 내 이해를 초과하는 말들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요약하는 일조차 폭력이 될 것만 같은 절절히 아픈 말들이다. 옮기는 것이 조심스러워 주저하게 된다. 섣불리 이해하려 하기보다 고요히 귀 기울여볼 뿐이다.
그렇게 생을 한 번 포기했던 사람이 다시 살기로, 죽지 못해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힘을 내서 다시 살아보기로 결심하고 그 결심을 실천해내는 과정은 언제 생각해도 불가해하다. “지금도 이 남은 삶이 길게만 느껴지고 사랑할 수가 없어서 놓고 싶어”지는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살아 있길 잘했다며 웃게 될” 날을 약속하는 것은 거듭 생각해도 벅차고 신기한 일이다.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고 무엇이든 제대로 할 수 없는 멍청하고 한심한 나”, 그래서 “스스로한테도 사랑받지 못하는 나”에게 “좋은 말을 해주고 좋은 것을 먹이”고 “좀 더 살아보라고 다독이고 응원”해주는 다정함은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먹어온 것들’이 가능하게 하는 것들

<죽어버리지> 이후의 이야기를 그려낸 <먹어온 것들> 시리즈는 <죽어버리지>에서 압축적으로 보여줬던 살겠다는 결심을 하루하루 ‘먹어온 것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그려낸다. <죽어버리지>가 완전히 회복한 것은 아니라 고백했던 대로 <먹어온 것들>의 ‘나’는 여전히 중증 우울증을 앓고 있다. 무기력과 회피, 자학을 끊임없이 반복하며 깨어 있는 게 무서워 잠으로 도피하는 일상은 여전히 잿빛의 어두운 장면들로 채워져 있다. 그런 슬픔의 한가운데이기에, 만화가 출발하는 지점이 하필 ‘공복감’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
영화나 소설은 편집할 수 있지만 현실의 삶에서는 결코 피할 수 없는 거추장스러운 진실. 그것은 삶이 지속되는 한 배고픔도 거듭된다는 것이다. 심리적, 신체적으로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는 먹는 일조차 쉽지 않다. ‘고작’ ‘먹어온 것들’이 의미심장할 만큼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은 연약해진 상태다. 거기다 경제적으로도 압박을 받는 상황이라면 먹는다는 것은 ‘고작’을 넘어서는 일이 된다. 하지만 자신을 방기하지 않기로 결심했다면 아무리 슬프고 괴로워도 끼니를 챙겨줘야 한다. 투병기 혹은 이행기가 ‘먹어온 것들’로 기록되는 것은 그래서 실제적이다. 어떤 면에선 슬픔과 아픔의 본질에 다가서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맨 처음의 ‘간장계란밥’ 에피소드는 먹는 일이 어떻게 ‘분투’에 가까운지 함축해 보여주는 듯하다. 물론 간장계란밥은 그 자체로 맛있고 간편하기까지 한 요리지만, 이는 아프고 돈 없을 때 찾기 쉽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좋아서 먹는 것과 그것밖에 먹을 수 없는 것은 다르다. ‘나’는 만들기 쉽고 저렴해 아주 어릴 때부터 해 먹었고, 계란이 떨어지자 결국 ‘계란 없는 간장계란밥’을 먹기도 했다. 그런 음식을 우울증에 걸린 후 또 다시 자주 해 먹었다는 말에서 ‘먹어온 것들’에 얽힌 그간의 사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아무 생각 없이 해 먹던 요리였는데, 어느 순간 힘들 때 먹는 요리처럼 되어서 먹고 있자면 주마등처럼 과거가 스르륵… 생각하기 싫은데도 침범”하는 것이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무기력해질 때의 팁’과 만화 곳곳에 자리한 명랑한 레시피들이 ‘나’와 독자 모두가 섣불리 슬픔에 빠지는 것을 막는다. 3편에서 ‘나’는 더는 경제 활동을 피할 수 없기에, 그리고 사회에 다시 안착하기 위해 일을 시작한다. 다른 일을 할 수 없어 하게 된 택배 상하차 일은 토하지 않기 위해 물도 조금만 마셔야 할 만큼 과중한 노동을 요구하며 폭언이 쏟아지고 사람을 부품 쓰듯 돌리는 곳이지만, 그런 곳에서도 ‘나’는 먹는다. “토하지 않기 위해 소화가 잘되는 음식들”과 “괴로울 때 먹을 초코바”를 “한 끼에 천 원 내외”로 맞춰 매일 도시락을 챙긴다. 투박하지만 든든한 음식으로 일하는 자신을 다독이는 자기 자신에게 “오늘도 잘 먹었어, 정말 고마워”라고 말하며. 일을 하는 한 달 동안 “다시 죽고 싶은 날이 대부분”이었다는 고백에도 이 만화에서 슬픔과 절망보다 활기가 눈에 띄는 것은 ‘먹어온 것들’ 덕분이다. 먹는 행위는 우리를 곤란하게도 하지만, 때로는 지나친 추락에 제동을 걸어준다는 것을 알게 해준다.
음식의 훈기만큼이나 마음을 따뜻하게 했던 또 한 가지는, 친구들과 함께 ‘먹어온 것들’을 이야기할 때다. 다정하면서도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친구들 덕에 ‘나’는 곤경에 처할 때마다 다시 먹고, 살 힘을 얻게 된다. 전부 포기하기로 했던 자신을 찾아내 죽을 사주고, 함께 살며 월세를 대신 내주면서 “너 좋아지는 게 갚는 거”라 말해주는 친구를 보며 ‘나’는 좋아지고 싶다고 진심으로 생각한다. 재료 하나 없는 파스타를 먹는 ‘나’를 위해 재료비를 부담하거나 도시락 아르바이트를 부탁하는, 끼니때마다 맛있게 먹어주는 친구들을 위해 무기력으로부터 몸을 일으켜 하루를 시작한다.
연약한 누군가가 더는 자신을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일은 너무도 용기 있고, 언제나 응원하고 싶어진다. 사실 절망 속에서 변화를 결심할 수 있다면 그는 이미 연약하기보다 강인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사람조차, 가난하고 바쁜 와중에 스스로 끼니를 챙길 수 있는 사람조차 혼자라면 할 수 없는 순간들이 있다. 그래서 다정히 식탁에 앉아 음식을 사이에 두고 서로의 안위를 걱정하는 모습이 안전망과도 같은 안심을 주었다. 아주 연약한 이도 함께하는 이가 있다면 조금 더 강인하고 다정해질 수 있다는 말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꼭 힘든 일이 아니어도 음식은 함께 먹을 때 더 맛있는 법이니까.
따뜻하고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죽어버리지>의 말미에서 ‘나’는 결심한다. “이렇게 계속해서 힘들고 아플 거라면 그때 그냥 죽어버리지 하고” 스스로를 놔버리고 싶은 때에, ‘산책을 하겠다’고. 목마를 때를 대비해 물통을 들고 방 밖으로 나가 무작정 걸으며 추워진 계절을 실감하고 사람이든 고양이든 무엇이라도 떠올리며 전부 지나가 보이겠다고. 구체적인 결심은 신뢰를 준다. 그때의 구체성은 결심을 실천해 보이겠다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결심은 결심을 넘어 약속과도 같다. 그리고 <먹어온 것들> 시리즈는 바로 그 결심을 닮아있다.
세상은 아프고 무력한 이들을 좋아하지 않고 너무나 슬프게도 그런 시선은 자신에게도 스며들어 우리는 때때로 스스로를 미워하게 되는데, 그런 속에서 누군가를 살리기로 결심하는 이들을 나는 좋아한다. 미워하기보다 아껴주기로 다짐하고 어두운 방에서 이끌어내 밝은 빛을 쬐게 하고 가능한 한 맛있는 것들을 먹이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그 모든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다정함과 용기를. 연약해서 곤궁에 처하고만 ‘자기 자신’을 버리지 않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그런 행위가 너무나 개인적이고 내밀해서 대단치 않아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곤경으로부터 자신을 구해낼 수 있는 이가 결국 타인도 구해내는 사람일 것이라 믿는다.
상반기를 떠올리면 벌써 몇 년이나 지난 것처럼 까마득한 기분이 든다.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힘든 일이 많았기 때문일까. 한 해가 끝나가는 지금, 사회적으로는 지치는 것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질 만큼 여전히 고난한 시간이 계속되고 있다. 나의 경우 개인적인 힘든 시기로부터는 한 걸음이나마 빗겨 설 수 있게 되었는데 지나고 나니 그 깜깜했던 지난 시간 속에서 위로가 되어준 만화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싶었다. 아무도 몰랐겠지만 이곳에서의 리뷰는 1년간의 정기 기고였고 이번이 그 마지막 글인데,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를 꺼낼 수 있어 기쁘다. 어두운 시간을 더듬더듬 통과해내는 여정 안에서 이 만화가 빚어낸 빛나는 문장들을 직접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따뜻하고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춥지만 다정한 겨울이 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