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슨은 이상하다. 초반의 에피소드를 읽다 보면 주인공 윌슨에 대해 호감은 전혀 느끼기 어렵다. 지나친 솔직함은 무례해 보이기까지 하며, 그가 하는 4차원적인 행동을 보고 있자면 공감능력은 물론이거니와 사회성도 떨어져 보인다. 중년의 나이에 직장은 없고, 아내와는 이혼했고, 어머니는 돌아가셨으며, 강아지 한 마리와 산다. 취미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일없이 시비를 걸기다. 특히 윌슨의 냉소는 이른바 잘나가는 이들에게 주로 향하는데, 이 조롱은 사회의 주류까지도 갈 것 없이, 평범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렇다. 윌슨은 이른바 사회적 ‘루저’, ‘아웃사이더’다.
표지와 속지에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그가 바로 윌슨이다. 작가 대니얼 클로즈는 여러 작품에서 이와 같이 냉소적이고 부정적인 등장인물들을 많이 등장시켜왔다. <윌슨>은 그의 첫 그래픽노블이다. 한 페이지의 분량의 짧은 에피소드가 반복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에피소드는 한국에는 먼저 발간된 <아이스헤이번>과 같이 각 에피소드가 서로 다른 화풍으로 그려져 있는데, 출판사인 ‘세미콜론’ 블로그에서는 이를 코믹스트립 장르에 대한 오마주로 설명하였다.
(참조: 세미콜론 공식블로그 https://blog.naver.com/semicoloni/10132556683)
스토리텔링에서 주인공에 대한 이입과 공감은 필수적이다. 독자는 서사에서 몰입할 대상을 잃는 순간 이야기에서 이탈해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대개 독자가 이입하기 쉽도록 ‘평범’을 개성으로 내세우거나, 주인공의 성격과 사연에 충분한 구체성과 개연성을 부여하여 이입을 돕는다. 윌슨은 후자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 이상한 남자 윌슨. 이해하기 어려운 남자 윌슨. 그의 이야기가 보편적 인류에 대한 메시지로 끌어올려지는 지점은 어디일까.
<윌슨>은 특이한 성격을 가진 주인공을 내세운 만큼, 독자에게 무리한 공감을 요구하지 않는다. 몰입을 위한 가장 쉬운 연출은 클로즈업과 컷의 드라마틱한 구성 등 극적인 페이지 구성일 것이다. <윌슨>에서는 제일 클로즈업된 컷도 바스트컷 정도로, 감정이 최고조로 고조된 순간에서조차 거리 두기의 연출을 유지한다. 컷 배치 역시 극적인 연출 없이 규칙적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각 에피소드의 컷 수도 6~8컷 사이를 유지한다. 이런 냉정한 시선을 통해 독자는 객관적으로 윌슨을 바라볼 수 있고, 따라서 드라마의 힘 자체로 그에게 이입할 수 있다.
<윌슨>의 내적으로 빠져들게 하는 특성은 무엇인가? 윌슨이라는 인물이 가진 인간성은 그의 이중적인 면을 통해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아버지의 임종이 가까워졌음을 알게 되는 에피소드부터 드러난다.
윌슨은 거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진 아버지를 대놓고 비난하면서도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그래도 오래 살아서 다행이라는 택시 손님과 아기 다루듯 다루는 간호사에게 불퉁대는 소리를 한다. 그는 아버지를 원망하면서도 막상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릴 적 함께 캐치볼을 했던 장소에 엎드려 흐느낀다. 자기밖에 모르던 그는 딸의 존재를 알게 되자 적극적으로 그녀를 찾는다. 윌슨은 항상 세상 부정적이면서도 어떻게든 가족에의 희망을 잃지 않는다. 초반에 처제 가족에게 소포로 개똥을 보내놓고서, 후반에 깨진 관계들을 이어 붙이려고 하는 모습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다. 그런 윌슨이 유일하게 행복하고 안정되어 보이는 장면은 전처와 납치한 딸과 함께 가족여행을 하는 짧은 며칠이다. 특이하고 괴상한 성격 아래 숨어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유대와 애정에 대한 근본적인 갈망. 약한 마음들. 두려움과 슬픔, 외로움. ‘우리’가 되고 싶은 희망. 그럼에도 사랑하고 사랑받는 법을 몰라 매번 고전하는 사람. 이것들이 윌슨을 인간답게 보이게 하며 연민을 일으킨다.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까지 잃고 혼자가 된 윌슨은 전처를 그리워하며 가정을 꿈꾼다. 전처를 찾아간 윌슨은 입양 간 딸의 존재를 알게 되고, 사설탐정을 고용해 딸을 찾아낸다. 윌슨은 짧게나마 해후한 가족에게서 소속감과 유대감을 느끼지만, 조각난 가족의 해후는 가족이 다시 조각나며 끝난다. 전처와 윌슨은 딸의 양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딸을 데려왔으며, 전처가 윌슨과의 다툼 끝에 그를 경찰에 신고해 교도소로 보낸 것이다.
윌슨이 교도소에서 복역하는 동안 전처는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하고, 그는 출소 후 강아지를 돌봐주던 여자와 동거한다. 그러던 어느 날 기별 없이 지내던 딸에게 연락이 오고, 할아버지가 된 것을 알게 됨. 윌슨은 딸의 가족과 함께하고 싶어 하지만 거절당한다. 토마스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윌슨은 만난 적도 없는 손자를 위해 토마스 장난감을 보여주며 모니터 너머로 그를 사랑한다며 눈물을 흘린다.
수평선을 바라보곤 하셨던 부모님을 따라 바다를 바라보며 부모님을 이해해 보려 했지만 잠만 온다던 윌슨은(12p) 교도소 복역 중, 고드름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아직도 아무것도 없다’(58p). 그리고 윌슨의 이야기는 창가에 앉아 내리는 빗방울을 보며 무언가를 깨닫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그가 무엇을 깨달았는지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바다> 에피소드에서 윌슨이 독백한 대로 ‘물의 화학 성분처럼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류의 통찰일지도 모른다.
항상 궁금했다. 산다는 게 무엇인지. 언제쯤 되어야 우리가 왜 사는지 알 수 있는지. 아버지 연배쯤 되면 알 수 있는지, 현대인 평균수명의 반도 살지 않은 주제에 삶의 진리를 알고자 한다는 것이 우스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그러다 어느 날이면 조금 알 것도 같다가, 어느 날이면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우리의 삶 또한 이렇게 미로에 놓여있는데, 윌슨의 인생과 다르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우리의 드라마도 다사다난한 파편만 모아놓으면 윌슨의 그것과 다르지 않으리라.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동정과 연민을 느낄 것인지, 공감을 느낄 것인지 독자들의 개인차는 있겠다마는, 작품 초반에서 느꼈던 그 감정보다는 모두 훨씬 복잡해졌을 것이다. 윌슨과 우리의 심리적 거리는 훨씬 가까워졌을 것이다. 그의 지난했던 삶은 이것을 위함이 아니었을까. 모두가 그토록 알고 싶어 하는 진리에 우리보다 한걸음 더 다가간 그가 부러울 따름이다.
이해는 한자로 理解라고 쓰지만, 윌슨은 감히 異解을 지향하는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다름을 보편적인 것으로 풀어 타인과 세상을 간접경험을 통해 이해하게 하는 것이 예술의 근본적인 사회적 역할이다. 그 설득력이 뛰어난 작품을 우리는 좋은 작품이라고 칭한다. 그런 면에서 <윌슨>은 감히 예술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멋진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