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이 관객을 만나러 오는 길, <블루 피리어드> 큐비즘의 공동 창시자이자 20세기를 대표하는 예술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은 사람, 살아생전 흥행에 성공한 피카소에게는 '블루 피리어드(Blue Period)'가 있었다. 20대 초반이었던 그가 회화에 파란색을 주로 사용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다고 한다. 이 시기의 피카소는 우울증을 겪었으며, 그의 작품은 잘 팔리지 않았다고 한다. 야마구치 츠바사는 《블루 피리어드》 본문에서 제목의 유래를 명확하게 밝힌다. 하지만 피카소의 ‘블루 피리어드’와 이 만화의 주제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는 않은 듯하다. 만화의 파랑은 '새싹이 파랗게 돋아나는 봄철[靑春]'의 파랑이 아닐까 싶지만, 아직 연재 중인 작품이니 조금 더 두고 볼 일이다.
월간 애프터눈에서 연재 중인 《블루 피리어드》(2017~)에는 젊은 예술가들의 삽화가 등장한다. 그림을 그리거나, 피규어를 만들거나, 온갖 미술 전시를 섭렵하거나, 가족을 따라 미대 진학을 목표로 하거나, 의상 디자인에 뜻을 둔 인물들이 야구치 야토라와 함께 등장한다.
야구치는 부모님과 친구들, 교사와 또래에게 두루 인정받는 팔방미인이다. 어른들이 기대하는 대로 높은 성적을 유지하는 한편,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담배를 피우거나 밤새 술집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친구들은 모범생 노릇과 불량아 노릇을 모두 해내는 그를 신기하게 여긴다. 나머지는 그를 호감 가는 불량아 정도로 받아들인다. 얼핏 부족하고 아쉬울 것이 없는 듯 보여도, 사실 야구치 본인은 누구도 거스르지 않고 상대에게 맞춰주기만 하는 생활에 지쳐있다. 부정당하는 것을 두려워해 자기주장을 못하고 움츠러들기 일쑤다. 우연히 접한 미술은 그가 조금씩 달라지는 계기가 된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기 직전에 예술대학으로 진학하겠다며 부모를 힘껏 설득하는가 하면, 전에 없던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기도 한다.

1화부터 25화까지는 수험 편이다. 야구치가 고등학교 미술부와 미술학원을 거쳐 예술대학 유화과에 진학하기까지의 과정을 다룬다. 자리를 옮긴다고 해서 본질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다. 모두 작품을 만드는 훈련을 하는 곳이다. 기한 이내에 과제물을 제출한 다음 교사나 강사나 교수에게 평가받는 수업 방식도 똑같다. 외부 세계와 어느 정도 분리되어 있다는 점, 평가와 지도를 담당하는 사람이 관객이나 대중을 대표할 수 없다는 점도 매한가지다. 소속과 무관하게 작품을 만드는 사람은 모두 예술가이며, 굳이 그 자격을 증명해야 한다면 작품과 작품 활동 이외 다른 수단은 없다. 따라서 예술가에게는 대학 입학 여부보다 수련 기간이나 밀도가 더 중요하다. 예술대학이 창작 활동에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을 의식한 듯 작중에서는 이에 대한 견해와 장점을 조목조목 짚고 넘어간다. 예술대학에 대한 견해와는 별개로, 입시와 대학은 등장인물에게 뚜렷한 목표 내지는 “통과점”이 된다. 만화의 독자에겐 알기 쉬운 플롯으로 기능한다. ‘좋은 작품을 완성한다’보다는 ‘실기 시험 과제로 좋은 작품을 만들어서 예대에 합격한다.’, 혹은 ‘예대 입학이 가능할 정도로 좋은 작품을 만든다’는 목표가 자초지종을 파악하고 공감하기도 쉽다. 덕분에 독자는 줄거리를 이해하는 수고를 덜고 만화를 더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다.

특정 분야에 대한 취재 및 연구 내용이나 생생한 경험담이 담긴 작품은 드물지 않다. 《바쿠만》에서는 판매 부수를 보장하는 소년만화를 만들기 위해 만화가와 편집부가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크게 휘두르며》는 통계와 스포츠 이론을 기반으로 한 치밀한 작전과 훈련, 그리고 선수의 심리 상태가 야구 경기 내용에 미치는 영향을 조명한다. 둘 다 픽션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픽션이기 때문에 다큐멘터리나 르포가 포착하기 어려운 부분까지 보여줄 수 있다. 이러한 작품들은 해당 분야에 대한 정보, 그것을 분석할 수 있는 맥락, 당사자(등장인물)에게 이입하는 경험을 모두 제공한다. 농업고등학교를 거쳐 농장에서 일했던 작가가 그린 에세이 만화 《백성귀족》도 비슷한 맥락에서 배우는 재미를 준다. (같은 작가가 그린 만화 중 농업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은수저》도 있는데, 필자가 제대로 읽지 않아서 제외했다.) 《블루 피리어드》는 상기한 작품들의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다. 우선 작가 본인이 도쿄 예술대학 유화과 졸업생이다. 작중에는 실제 회화 작품이 빈번하게 인용된다. 21세기 일본에서 예술가 훈련을 받고 활동할 수 있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상세하게 소개된다. 회화 기법이나 재료를 소개하는 부분은 그대로 튜토리얼이나 강의로 옮겨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로 상세하다.
작품을 어떻게 만들지 쉽게 떠오르는 경우도 있겠지만, 연달아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 학원이나 대학에서는 매번 그런 식의 요행을 기대할 수 없다. 야구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주제에 대해 사유하고, 자료를 조사하고, 어떻게 만들지 계획을 세운다. 최우선 목표는 주제 전달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관객이 작품을 보고 무언가 경험하는 계기를 제공하려고 한다. 본인이 다른 작품을 보고 아름답다든가, 근사하다고 느꼈던 순간을 자신의 작품을 통해 관객이 경험하길 원하기 때문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욕심을 낸다.
작품에 정해진 답은 없다. 운동 경기처럼 점수를 매기거나 기록을 재고 명확하게 우열을 가릴 수도 없다. 잡지에서 진행하는 앙케트 조사 결과나 단행본 판매 부수를 근거로 작품의 성패를 판단하는 《바쿠만》과 같은 기준을 사용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블루 피리어드》는 미술 애호가 하시다가 피카소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장면을 통해 흥행 여부나 다른 사람의 평가가 작품의 가치를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라고 말하면서 여러 가지 답이 나올 수 있는 문제를 복잡한 상태 그대로 둔다.
작품을 어떻게 만들지 고민하면서 한계에 부딪히는 것은 야구치의 일상이 된다. 그 영향인지는 몰라도, 각자 다른 이유로 한계에 부딪힌 사람들과 만나서 소통하는 일이 생긴다. 쿠와나는 모종의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는 미대 입시생이다. 코이가쿠보는 원하는 진로가 있는데도 비웃음을 사는 것이 두려워서 망설인다. '유카'라는 애칭으로 통하는 크로스 드레서 아유카와는 차별과 편견 때문에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는 것에 괴로워한다. 대부분의 문제는 작중에서 만족스럽게 해소되지 않는다. 이들과 함께 보낸 시간이 야구치와 그의 작품에 영향을 미친다는 전개가 어쩔 도리 없이 작위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시도와 실패를 거듭하면서 점점 더 나은 사람이 되고, 더 나은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메시지와 맞물리면서 전체 이야기에 설득력을 더한다.
《블루 피리어드》는 작화가 매력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그림체에 서양의 고전 회화와 일본 만화의 데포르메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삐딱하고 아슬아슬해 보이는 자세, 엄청나게 유연해 보이는 다리와 손가락, 작고 얇게 그리는데도 반드시 눈에 띄는 날카로운 치아 등 과장된 신체 묘사가 재미있다. 화려한 한편 가독성도 좋다. 요점이 확실한 디자인 덕분에 등장인물이 많은데도 헷갈리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회화 작품을 연상시키는 명확하고 치밀한 구도에는 상황과 분위기, 인물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패널 사이의 강약이 확실해서 화려한 작화에도 불구하고 산만하다는 인상 없이 술술 읽힌다.
이 만화는 작품을 만드는 법, 감상하는 법, 예술가들의 일상과 그들을 둘러싼 세계로 꽉 차 있다. 원한다면 도쿄 예대 입시에 대한 부분만 참고할 수도 있고, 미술학원 등록을 고민하다 말고 펼쳐볼 수도 있다. 왜 모리 선배와 타카하시 요타스케는 쌍둥이처럼 닮았는지, 대학에 가지 않은 인물들이 나중에 다시 등장할지 궁금해서 계속 읽어나가는 것도 괜찮다. (아쉬운 독자라면 등장인물이 운영 중인 인스타그램 계정도 구경할 만하다.) 작품의 어느 부분에 주목하든 구석구석에서 반짝이는 그림과 예술 전반에 대한 작가의 애정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