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난 작품에 먹을 게 많더라. <경이로운 소문>
최근 OCN에서 방영중인 드라마 <경이로운 소문>의 인기가 상당하다.
이제는 너무나도 당연한 수순으로 원작 웹툰 <경이로운 소문>도 그 기류에 힘입어 다시 인기를 얻고 있다. 필자 또한 자연스럽게 정주행하게 되었다. 보통 이렇게 드라마나 영화를 먼저 접한 후 웹툰을 볼 경우 재미가 반감될 때가 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는 말처럼 드라마로 기대를 높인 뒤 웹툰을 보면 실망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웹툰 <경이로운 소문>은 우려와는 달리 드라마와 별개로 웹툰 자체로도 상당히 흥미롭다. 보통 웹툰과 드라마는 제작 과정상 어쩔 수 없이 다른 부분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공통적인 재미를 준다는 건 작품 자체의 중심적인 무언가가 분명하기 때문인데, 원작을 보니 그 이유를 명확하게 느껴졌다. 한 마디로 소문난 잔칫집에 갔더니 말 그대로 소문이 날만한 잔칫집이라는 생각이 확 들었다.
우선, 이 작품에 세계관은 묘하게 흥미롭다. 저승과 이승, 그리고 영혼의 개념이 존재하는 세계관
그렇게 생소한 세계관은 아니다. 웹툰 <경이로운 소문>의 세계관이 바로 이러하다. 기본 틀은 이렇다. 영생을 꿈꾸며 이승에 내려온 악한 영혼들을 잡는 이들의 이야기. 여기서 악한 영혼들은 악한 사람들을 숙주로 삼고, 이들에게서 악한 영혼들을 끌어내는 자를 ‘카운터’라 부른다. 작품에서는 ‘융’, ‘융인’, ‘땅’, ‘카운터’와 같이 생소한 용어들이 꽤 등장한다. 하지만, 이 작품을 이해하는 게 어렵지는 않다. 용어는 생소할지 모르나,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이야기의 구조이자 설정들이기 때문이다. 기본 틀의 구조를 다시 쉽게 설명해보자.
“악한 영혼들을 때려잡는 저승사자 이야기.”
이렇게 보면 명확하고, 그러면서 사실상 새로워 보이지 않는다. 왜 이렇게 용어 설정을 새로이 했나하고 의문도 살짝 들지만,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이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자 차별성이 되어 묘한 흥미를 유발한다. 단순히 용어를 새롭게 해서만이 아니다. 어설프게 접근했다면 오히려 낯설고 어렵게만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어설프지가 않다. 작가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세계관을 그대로 쓰기 보다는 자기 스타일에 맞게, 자신의 이야기에 맞게 새롭게 구축하였다.
저승을 ‘융’이라 칭하고, 그 저승에 사는 이들을 ‘융인’이라고 한다. 코마 상태에 빠진 사람들에게 ‘융인’들은 깨어날 수 있게 해주는 대신에 악귀를 잡아달라는 계약을 한다. 그리고 그들은 계약과 동시에 일반 사람들보다 강한 힘과 특수 능력 등을 갖게 되는데 이들이 ‘카운터’이다. ‘카운터’들은 전 세계에 있고, 고정으로 일을 하는 이들과 돌아다니며 일을 하는 이들이 따로 존재한다. 숙주를 죽이지 않아야 하고, 기절 상태의 숙주의 몸에서 영혼만을 ‘융’으로 소환해야한다. 단순히 저승사자의 이야기로만 치부되기에는 디테일한 면에서 차이가 있고, 이러한 디테일한 차이들은 모여 결국 차별성을 만든다. 곱슬머리나, 손에 생기는 점과 같이 ‘카운터’가 되며 생기는 외형적인 특징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디테일을 들자면 ‘융’에 가는 방법과, 악귀를 ‘융’으로 소환하는 방법을 들 수 있다. 이는 몇 초간 가슴에 손을 얹고 있는 것인데, 사소해보일지 모르나, 이러한 세심한 요소들은 차별성을 넘어 세계관이 살아 숨 쉬게 하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소한 요소는 한두 가지가 아니고, 곳곳에 담겨 있다. 이렇게 우리에게 친숙한 구조와 설정의 이야기를 교모하게 꼬아놓은 결과, 작품의 세계관은 익숙한 듯 새롭게 느껴진다. 심지어는 새롭게 이야기를 언제든지 펼칠 수 있는 도화지가 되었다. 원한다면 이 도화지 위에 새 이야기를 써내려갈 수도 있는 셈이다. 앞서 저승사자 이야기라 했지만, 실상은 ‘융’과 ‘카운터’로 이루어진 새로운 세계관이 되었다.
이렇게 나름의 세계관을 구축한 작품의 경우 전개를 위해 세계관에 대해 설명해야 한다. 이런 경우 작가는 메인 스토리와 세계관 설명 사이에서 우선순위와 이야기 배분을 고민하게 된다. 메인 스토리를 진행하면서 세계관에 대한 설명도 해줘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작품들이 보통의 경우 첫 번째 에피소드는 친절하고 천천히 전개 된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세계관과 캐릭터들을 설명하면서 독자들의 몰입을 돕기 때문이다. 이 작품도 비슷한 방식으로 도입부가 시작되는데, 이 경우엔 한 가지를 더 더했다. 바로 직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익숙한 요소들의 활용한 것이다.
악귀들을 때려잡는 이들이 ‘국숫집’을 운영하고 있는 것도 그 중 하나이다. 한 곳에 모여 사는 것은 캐릭터 별로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쉽게 정리된다. 거기다 음식은 인간의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 중 하나로, 그만큼 음식을 파는 가게는 우리 일상에 있어 굉장히 친근하고 익숙한 공간이다. 그러한 공간에 ‘카운터’들이 있다는 설정은 이들의 가치관을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포인트이기도 하다.
‘국숫집’의 구성원 또한 직관적이다. 열혈형사인 ‘가모탁’이나 조금 차가운 캐릭터 ‘도하나’, 그리고 걱정과 잔소리가 많은 ‘추매옥’ 캐릭터들이 특별하기 보다는 기존에 많이 봐오던 캐릭터들로 따라가기에 쉽다. 심지어 주인공인 ‘소문’의 경우만 보더라도 굉장히 많이 소비되었던 정의로운 캐릭터다.
포괄적인 구성도 인식에 용이하게 형성되어 있다. ‘소문’을 중심으로 보자면 ‘추매옥’은 엄마, ‘가모탁’은 삼촌, ‘도하나’는 누나의 포지션으로 하나의 ‘가족’으로 작용된다. 이는 다른 ‘카운터’들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캐릭터 설정과 포지션은 관계성을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들의 행동을 쉽게 이해시킨다. 이렇게 적절한 직관성 높은 설정은 분량 및 연출의 영리한 분배를 가능케 한다. 덕분에 좀 더 몰입도 높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한다.
이 작품에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요소, 바로 ‘악귀’이다.
악한 영혼들은 자신들이 들어갈 수 있는 숙주를 찾아 그 몸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숙주와 함께 온갖 악행을 저지른다. 여기서 인상 깊었던 것은 악귀가 들어가 나쁜 짓을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나쁜 짓을 할 놈에게 악귀가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설정은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구도를 명확하게 만들고, 다른 생각이 들지 않게 한다. 그리고 가장 쉽게 따라가지는 이야기 구조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작품에서 악귀를 다루는 방식은 상당히 신선하다. 숙주를 제압하고 악귀를 ‘융’으로 소환하면 숙주 안에 있던 존재가 ‘융’의 기차역에서 소환되는데, 지상에선 그렇게 잔인하고 무섭던 존재도 ‘융’에서는 볼품없어진다. 외형이나 포스적인 면에서 말이다. 이는 방금 전까지 내가 보던 그 악귀가 맞나 싶을 정도이다. 더불어,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이들에게 분량을 많이 할애하지도 않는다. 즉, 악으로 묘사되는 이들에게 대체적으로 서사를 주지 않는 것이다. 이는 작가의 의도로 엿보인다. 작품에선 악귀에 대한 묘사를 하기 보다는 그들로 인해 피해 입은 자들을 더 조명한다. 그리고 그것은 작품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인류애, 가족애 등의 선한 가치를 또렷이 보여준다.
<경이로운 소문>이라는 제목은 다소 생소하다. 주인공의 이름이 ‘소문’인 것만 봐도 그렇다. 이는 중의적인의미로 보인다. 먼저, 주인공의 이름이기도 하고, 작품 내 특정 설정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떠돌며 들리는 말’ 정도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궁금해진다. 작가는 어째서 제목을 ‘경이로운 소문’이라고 지었을까.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이 작품은 굉장히 인간성, 휴머니즘에 대한 이야기가 두드러진다. 동시에 판타지라는 과장의 기법을 썼지만, 실상은 현실 범죄들을 다루기도 한다. 주인공 ‘소문’은 정의롭고, 누군가 아파하거나 다치는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현실엔 이런 정의롭고 강한 ‘소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쩌면 작가는 현실 어딘가 ‘소문’과 같은 자들이 있어, 모두가 행복하다고 떠드는 그야말로 ‘경이로운 소문’을 듣고 싶은 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