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들로부터 <해오와 사라>
수천년을 이어온 세상에서 우리는 고작해야 수십년, 길어야 백년을 산다. 그런데도 어른이 되면 우리는 너무 쉽게 “원래 세상이 그렇다”는 말을 하곤 한다. 익숙함은 우리를 편안하게 만들고, 편안함은 우리를 안주하게 만들고, 새로운 변화를 받아들이기 어렵게 한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원래 그런’ 것들을 제대로 발견하지 못했다. 다섯개의 원소로 세상이 이루어진 줄 알았던 시기가 지나고, 뉴턴의 고전역학마저 양자역학이 작동하는 아주 작은 세계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 어쩌면 세상엔 ‘원래 그런’ 것이 없는지도 모른다. 너무나 유명한 양자역학의 역설을 설명하는 사고실험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사실은 “이런게 말이 되냐”고 말했다는 걸 생각해보면 ‘원래 그런’ 것이 얼마나 있을까 싶어진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우리가 받아들이고 싶은 세상을 받아들인다. 그런 세상에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 있다. 바로 다음웹툰에서 송송이 작가가 연재중인 <해오와 사라>다.
“원래 그런거”라는 말은 누굴 위한 걸까
지금보다 훨씬 ‘원래 그랬던’ 세상을 그리는 <해오와 사라>의 주인공 고해오는 할머니때부터 지금까지 해녀로 일해온 집안에서 태어났다. 제주도 본도에 붙은 작은 섬, 우도에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아주 작은 섬인 우도에서는 조금 더 벌거나 못 벌거나 차이만 있을 뿐 여자라면 다들 물질을 시작한다. 엄마를 따라 물질을 배우던 중 인어를 발견했던 해오는 아주 어릴 때부터 물질을 시작했을만큼 재능이 있었다. 그렇게 인어를 발견한 이후, 해오의 인생이 180도 달라지게 된다.
해오는 인어가 있다고 말하자 해오의 엄마는 해오에게 “알아도 아닌 척하는 게 좋은 일도 있어. 비겁해도 자기를 지키기 위해…”라고 말한 다음 사라져버린다. 말 그대로 사라져버린 엄마 때문에 할머니와 옆집 가족이 해오를 돌보게 된다. 자연스럽게 자신을 돌봐주던 이웃집 동우네에 시집가는 걸로 되어 있었고, 원래 세상이 그런가보다 하면서 살고 있었다. 혼처도 정해져 있고, 물질도 잘하니 남들보단 낫다면서.
그런데, 자신이 살던 마을을 벗어나 읍내에 나간 세상은 조금 달랐다. 벽에 걸려있던 큰 지도에서 제주도는 아주 작게 그려져 있었고, 그 옆에 우도는 작은 점 하나였다. 이렇게 작은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았다는 것에 놀란 해오는 물질이 아닌 다른 ‘일’을 하는 여자를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여자라면 물질해서 전복 캐고, 성게 잡는 게 최고인 줄 알았던 해오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원래 그런 것’이 진리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 해오에게 세상이 조금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선택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된 해오는 “원래 다들 그렇게 사는 거”라는 말을 거부할 수 있게 된다. ‘원래 다들 그렇게 사는’ 세상이 누구를 위한 건지 처음으로 질문한 해오는, 그 답을 찾기 위해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놓고 새로운 고민을 시작한다.
오히려 ‘원래 그런 세상’에서 득을 보고 사는 사람들은 자식도 내팽개치고 자기 멋대로 섬을 떠나버린 동우 아빠나, 마을의 또다른 여자아이 연지와 섬을 떠나자고 약조한 동우 같은 남자들이었다. 말하자면 그들에겐 ‘원래 그런’ 세상은 없었다. 집에서는 본섬에서 공부를 시켰고, 부산으로 유학을 보내려고 했지만 해오나 다른 여자아이들에겐 아니었다. 이런 불합리를 깨달은 해오는 ‘세상을 바꾸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다.
복잡다단한 캐릭터: 영지와 여희
해오를 움직이는 건 해오의 욕망만이 아니다. 다른 여성 캐릭터들도 굉장히 입체적이고, 구체적인 욕망을 보여준다. 바로 영지와 여희가 대표적인데, 영지는 마을에서 가장 예쁜 아이로 통한다. 하지만 물질을 잘 하지 못하는 ‘하군’에서도 가장 일을 못해 항상 구박받고, 심지어는 물에서 나오지 못해 해오가 종종 구해내곤 한다.
영지는 이 좁아터진 섬 밖으로 나가고 싶어하고, 자신을 세상 밖으로 꺼내놓을 ‘동앗줄’이 다가오면 언제든 잡을 준비가 되어있다. 처음 동앗줄이라고 생각했던 건 자신을 좋아하는, 해오와 혼약이 되어 있던 ‘동우’였고, 그 다음에는 인어를 잡아 미국에서 연구 성과를 올리고자 하는 ‘여희’였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영지의 독백을 통해 영지가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보여준다. 여성에겐 ‘원래 그런’ 세상에서, 영지는 자신을 살려두기 위한 전략을 택한 셈이다.
여희 역시 해오의 친구인 인어 사라를 잡아 미국 유학을 가고 싶어한다. 작품 중간에 등장한 여희는 영지보다 조금 더 복잡한 악역으로 그려진다. 인어 사라를 잡아 해부하겠다는 계획을 말할 때는 매드 사이언티스트처럼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으로 그려지지만, 동시에 우도에 여성을 위한 야학을 설립하거나, 공부하러 온 아이들에게 바지를 지어 입을 천을 준다거나 하는 ‘자기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여성들의 삶을 바꿔놓기 위한 노력을 하는 캐릭터기도 하다. 우도의 여성들을 바깥에서 지켜보며 ‘지독하게 습득당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영지와 여희는 자신의 욕망, 더 큰 세상으로 나가고자 하는 주체적 욕망을 실현하려는 캐릭터다.
영지와 여희의 존재는 주인공인 해오가 각성하는 기폭제 역할을 하는 동시에 작품 속 이야기의 설득력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영지와 여희의 욕망은 자신을 위한 욕망이고, 자신의 미래를 자신이 결정하고자 하는 당연한 욕망에서 나온다. 욕망은 이들이 어떤 임무를 수행하는 NPC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를 가진 인물처럼 느껴지게 하고, 여기서 나오는 설득력은 작품 속 개연성, 또는 내적 정합성(整合性, 모순이 없음)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영지가 섬을 떠나고 싶어하지 않았다면, 동우와 섬을 떠나기로 약조하지 않았다면 해오의 각성은 늦어졌을 것이고, 그렇다면 영지의 쓸모를 잃어버린 여희가 해오에게 접근해와 거래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복잡하고 구체적인 캐릭터, 그리고 그들의 입체적인 욕망은 <해오와 사라>를 읽는 즐거움 중 하나다. 우도라는 좁은 섬 안에서 서로의 관계와 상황이 빚어낸 갈등이 얽히는 모습을 지켜보는 독자들을 위해 준비된 무대는 독자들이 캐릭터를 하나하나 깊게 이해하고 작품을 읽어나가게 만든다.
바지와 치마, 다리와 꼬리
해오, 영지와 여희. 서로 다른 욕망을 가진 인물들이 공통적으로 원하는 것이 있다. 바로 섬 밖의 더 큰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다. 해오는 ‘어딘지 모르겠지만 일단 밖으로’에서 ‘엄마가 있는 곳’으로 욕망이 점점 다듬어져가고, 영지는 ‘우도 밖, 육지’, 그리고 여희는 ‘미국’을 꿈꾼다. 이 작품은 더 큰 세계를 꿈꾸는 여성을 조명하지만, 다른 욕망을 부정하지도 않는다. 바로 인어를 통해서다.
인어 사라는 드넓은 바다에서 살며 자유로운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라는 인어 사회안에서 비주류로 취급받고 살아온 삶 때문에 인간 해오의 삶을 동경한다. ‘더 넓은 세상’이나 ‘다른 세상’ 자체가 없는 사라의 경우를 통해 내부 집단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욕망, 그리고 독립하고 싶어하는 욕망을 비춘다. 작품에선 나아가 사라가 해오를 만나면서 점차 사라의 세계가 변화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모습은 24화에서 여희가 바지를 지어 입히는 모습을 통해, 27화에서 사라가 해오에게 하소연하는 모습을 통해서 해오의 치마와 사라의 꼬리를 교차시켜 보여준다.
인어는 바다에서 자유롭지만, 오직 바다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 사라는 육지를 다닐 수 있는 해오를 동경하지만, 다리가 있어 바다와 육지 어디든 갈 수 있는 해오는 사라를 동경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세계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서로 다른 욕망이 있고, 그 욕망의 우위를 평가하지 않는다. 한편으론 해오를 만나면서 변화해가는 사라의 욕망 역시 인어공주 동화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처럼 보이는 에피소드를 통해 기회를 열어둔다. <해오와 사라>의 세계는 자신이 주체적으로 결정한 모든 욕망이 가능성을 가지는 세계다.
1950년대 우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환상적인 이야기 <해오와 사라>는, 우도라는 섬이 세계의 전부인 줄 알았던 해오와 다양한 인물들, 그리고 인간 세상이 궁금했던 인어 사라와 인어들을 통해 ‘욕망의 주체로서의 나’를 발견하는 작품이다. 우도 밖에는 바다가, 바다 너머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 우리의 세상 밖에도, 우리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새로운 세상이 존재한다. 욕망은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억압하던 세계를 깨고 나오게 하고,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해서, 또는 인정할 수 없어서 “원래 그런 것”이라고 변명했던 세상을 돌아보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