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코패스는 이제 한국의 스릴러 장르물에서도 흔한 소재가 되었다. 악역이 아니라 주인공이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로 설정되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란 정확히 무엇인가?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 둘 다 반사회성 성격 장애라는 진단명에 포함되는 개념으로, 반사회성 성격 장애는 사회적인 규칙을 따르지 못하고 타인의 권리를 경시하며 공감능력이 결핍되어있는 등의 특징을 가지는 성격 장애다. 사이코패스는 감정 조절에 문제가 있고 선과 악을 잘 구분하지 못해 충동적으로 범죄를 저지르는 반면 소시오패스는 감정 조절에 능하고 타인의 감정을 잘 이용하며 잘못이라는 것을 인지하면서 범죄를 저지른다는 차이점이 있다.
네이버 지상최대공모전 3기에서 대상을 수상한 <소녀재판>도 사이코패스 소리를 들을 만큼 어딘가 문제가 있어 보이는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주인공 박가을은 고등학교 1학년. 집안엔 아버지의 도박으로 인한 빚이 있다. 부모님은 하루가 멀다 하고 싸우고 그 결말은 늘 아버지의 폭력이다. 학교에서는 항상 속으로 사람들을 외모와 학급에서의 지위로 평가하며 1군~4군으로 나눈다. 본인은 ‘공기처럼 조용한 그냥 한 반의 구성원’인 3급에 속한다. 같은 반에는 잘생기고 성격도 좋고 심지어 뮤투버여서 인기가 아주 많은 한유현이 있다. 박가을은 한유현에게 호감이 있지만, 1군인 한유현과 친해질 기회는 별로 없다. 반에서 제일 예쁜 진은설이 한유현에게 고백했다가 차였다는 소문을 듣고 통쾌해할 뿐이다. 하지만 어느 날 일찍 등교한 박가을은 여자친구가 없다던 한유현이 진은설과 키스하는 장면을 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박가을은 두고 온 수면유도제를 가지러 새벽에 학교에 갔다가 진은설이 교실에서 추락사하는 것을 목격하고, 그 옆에 서있던 한유현과 눈이 마주친다.
평범한 고1이라면 바로 경찰에 신고했어야 하지만, 박가을은 아주 범상치 않은 행동을 한다. 바로 비밀이 밝혀지고 싶지 않다면 자기에게 키스하라고 한유현을 협박하는 것! 한유현의 비밀을 쥐고 박가을은 자신의 썸남인 것처럼 행동하고 자기가 원할 때 키스하도록 한유현을 휘두른다. 한유현과의 유사연애를 즐기던 박가을은 중학교 때 한유현과 친했다는 같은 반의 강효민으로부터 한유현과 깊게 엮이지 말라는 충고를 듣는다. 알고 보니 강효민은 진은설의 이복남매였고 한유현이 진은설의 죽음과 관련 있다고 의심하고 있다. 강효민은 한유현을 견제하기 위해 박가을과 사귀는 척을 해주기로 하고, 박가을은 어떻게 하면 두 남자를 다 손아귀에 넣을 수 있을지 고민한다. 박가을과 한유현의 관계에 강효민이 끼면서 상황이 더욱 복잡해지는 가운데, 한유현은 박가을 아버지의 도박을 무기로 박가을과의 주종관계를 뒤집으려 한다.
1화를 보고 나서 도대체 무슨 내용일지 감도 안 잡힌다고 생각했던 때부터 벌써 40주가 지났는데, 이 만화가 도대체 어디로 흘러갈지 아직도 모르겠다. 40화가 넘도록 진은설의 죽음에 대해 밝혀진 것은 많지 않다. 유서 같지 않은 메모가 유서로 취급 받고 자살로 결론이 났다는 것, 한유현이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것이 전부다. 독자들에게는 수많은 궁금증이 남아 있다. 진은설은 왜 죽어야 했는지? 박가을의 동생 가연은 이야기에 어떤 역할을 하게 될 것인지? 소녀재판이라는 제목에서 소녀는 재판의 주체인지 대상인지? 42화에 한유현의 어린시절이 밝혀지면서 마침내 이야기의 실마리가 한 매듭 풀리기 시작한다.
연재된 회차 수에 비해 중심 내용이 많이 드러나지 않았음에도 한 화라도 별 내용 없이 싱겁게 끝나는 느낌이 든 적은 없다. 40화 정도의 분량을 캐릭터의 성격과 사고방식을 아주 구체적이고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에피소드들로 알차게 채웠기 때문이다. 박가을과 한유현의 유사연애(라고 쓰고 기싸움이라고 읽는다) 에피소드들은 광기어린 두 인물의 강렬한 캐릭터로 긴장감 넘치게 전개된다.
특히, 어떤 캐릭터보다도 박가을은 <소녀재판>만의 현실적이면서도 약간 돌아버린 듯한 분위기를 끌고 가는 역량 있는 캐릭터다. 유일하게 1인칭 시점이 등장하는 만큼, 즉 그의 미묘한 감정이나 못난 생각들이 우리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지는 만큼 박가을은 역겹다. 연애상담 사이트에서 핸드크림을 발라주는 척하면서 스킨십을 시도하라는 글을 읽고 나서 ‘한유현이랑 말 하는 사이도 아니지만 혹시 몰라’ 핸드크림을 챙기는 장면, 진은설의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흘리는 자신의 모습에 도취되어 ‘진은설 니 친구들보단 내가 나은 거 같다’며 우월감을 느끼는 장면은 참으로 강렬한 비호감을 불러일으킨다. 살인사건에 휘말린 와중에 ‘예뻐지면 한유현이랑 강효민이 나를 더 좋아해주지 않을까’ 생각하는 것도 골 때린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심지어 작가는 이 골 때리는 캐릭터를 통해 소소한 반전과 개그 포인트까지 살려냈다. 예를 들어, 박가을이 한유현과 장하나가 부적절한 관계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장면이 있다. 박가을이 충격 받은 표정을 클로즈업해 보여주고,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고개를 숙이고 몸을 떠는 컷을 2개 삽입했다. 여기까지 보고 독자는 또 박가을이 질투심에 화가 났다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조금 긴 스크롤을 내리면 박가을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ㅈ나 재밌다…!!’고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다. 주인공의 사고가 어디로 튈지 정말이지 예측할 수가 없다. 32화에서 사귀기로 한 걸 어떻게 취소하냐며 “그리고… 난 남자잖아. 말한 건 지켜야지.”라고 말하는 강효민을 보며 박가을이 ‘이자식… 가부장적이로군!’ 하고 생각하는 장면에서도 실소가 터진다. 할 얘기 있으면 집에 가서 하자는 말에는 온갖 상상을 다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왜 저 순간에는 그토록 이성적이란 말인가.
이렇게 이상한 캐릭터임에도 불구하고 회차마다 수없이 달린 “둘 다 문제 있는 것 같다”, “사이코패스 같다” 같은 댓글에 완전히는 동의할 수 없었다. 물론 사망사건 목격을 빌미로 잘생긴 인기남과 첫 키스를 해치우기로 마음먹는 그의 파격적인 전략은 정말 필자 같은 범인의 머리로는 따라갈 수가 없으나, 선악을 구분하지 못하거나 공감능력이 없다는 확신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는 비록 의사는 아니지만, 정신과적 진단기준에 따라 박가을을 진단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박가을을 반사회성 성격장애로 진단할 수는 없다. 반사회성 성격장애의 진단기준에 최소 18세 이상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신 반사회적 성격장애의 전구단계로 여겨지는 품행장애의 기준에 맞는지 확인해볼 수 있다. 정신질환의 국제적 분류체계인 DSM-5의 진단기준에 의하면 품행장애는 지난 12개월 동안 15개의 기준 중 적어도 세 가지 이상을 충족하고, 지난 6개월 동안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을 충족하면 진단할 수 있다. 15개의 기준은 사람과 동물에 대한 공격성, 재산의 파괴, 속이기 또는 훔치기, 심각한 규칙의 위반의 4개 카테고리로 이루어져 있다. 박가을의 경우 ‘1. 자주 타인을 괴롭히고, 협박하거나 겁을 준다’, ‘7. 타인에게 성적인 행동을 강요한다’에만 해당했다. 타인에게 신체적인 폭력을 가하거나 법과 규칙을 지키지 않는 모습은 보인 적이 없어 전형적인 품행장애의 양상으로 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박가을은 대체 무엇인가?
박가을이 유난히 역겹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사이코패스여서가 아니라, 그가 느끼는 감정들이 무엇인지 사실은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감정에 공감할 수 없다면 거북함보다는 오히려 거리감이 느껴졌을 것이다. 박가을이 보여주는 소위 ‘잘 나가는 애’로 보여서 부러움을 사고 싶은 마음, 외모 랭킹을 매기는 게 어이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가 몇 등으로 매겨졌는지가 궁금한 마음, 또래들에게 연애 상대로 사랑받고 싶은 마음 (그리고 강렬한 성욕)은 누구나 조금씩은 느껴본 것들이리라. 다만 내 것을 꺼내 봐도 혐오스러울 그 못난 마음들이 포장이라곤 되지 않은 날것의 상태로 우리에게 보여지니 역겨울 수밖에.
그렇다면 박가을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이제서야 본론을 시작한 듯한 이 웹툰이 앞으로 박가을을 비롯한 그 모든 이상한 캐릭터들을 통해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줄지 아주 기대가 된다.